<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집착과 애착 그 사이




요 며칠 흐리더니 다시 햇빛이 난다. 아침에 눈을 떠서 창밖이 환하면 기분이 좋다. 날씨가 좋으면 사람이 기분 좋은 건 당연한 일이지만, 유독 햇빛이 반가운 것은 내가 들여온 군식구들 때문이다. 다섯 개의 화분들. 얘들이 우리 집에 온지도 벌써 한 달이다.

사실 처음엔 다섯이 아니라 여섯이었다. 어느 날부턴가 하나가 갑작스럽게 시들시들하니 맥을 못 추는 것이다. 제일 잡초처럼 잘 자라던 녀석이 그러기 시작하니, 물이 부족한가 싶어 물을 펑펑 주었건만, 녀석은 기력을 회복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유독 정성을 쏟아가며 햇빛에 내놓고, 물을 주고, 흙을 더 덮어주고, 난리를 쳤건만 녀석은 기어코 완전히 죽어버리고 말았다.

녀석이 완전히 말라 죽고 난 뒤에, 뿌리근처의 줄기에 뭔가 희끗희끗한 것이 눈에 띄었다. 줄기가 완전히 검어져 버리니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이다. 가까이 보니, 가느다란 실 같은 뭉치들이 얽혀있는 모양새가 마치 곰팡이 같았다. 검색해보니, 백색 곰팡이란다. 여기 감염된 식물은 시들시들해지다가 결국 죽고 마는데, 이게 물이 부족해 그런가 싶어 물을 많이 주면, 곰팡이만 살판나게 만들어버리는 일이라고 한다.

혹시 뿌리라도 남겨놓으면 살아날까 싶어, 깨끗하게 씻은 뿌리를 다른 화분에 옮겨 심었지만, 아무래도 역시 완전히 죽어버린 것 같다. 관심이라고 기울였던 것이 되레 더 빨리 죽게 만들었으니, 잎 가장자리가 갈색이 된 것이 몇 개 보인다든가, 한 줄기의 잎 끝이 노르스름하게 바랜다든가 하는 일로 호들갑을 떠는 게 오히려 독이 될까봐 겁이 난다.

그 이후부터는 날이 흐리거나 하면 어쩐지 시들시들하여 마음이 좋지 못한 것이다. 잎에 힘이 없으면 곧 죽어버릴 것만 같다. 만약 잠시 기운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죽어가고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내가 과연 그네들을 소생시킬 수 있을까. 물주고 햇볕 쪼이는 것 외에는 모든 게 다 소심해져버렸다.

무언가를 돌보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생각을 하게한다. 심지어 내가 키우는 무언가와 교감이 어렵다 하더라도, 그를 돌보는 행동 그 자체만으로도 나는 나 혼자만을 생각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식물을 키우는 것은 어떻게 보면 참으로 손쉽다. 손을 타지도 않고, 큰 관심을 요구하지도 않으며, 키우는 동안 다른 비용도 크게 들지 않는다. 그들이 요구하는 건 사료도 간식도 아니다. 단지 한 덩이의 흙과, 물, 햇빛, 그리고 적당한 온도. 그뿐이면 족하다. 그들은 그만으로도 참 풍족하게 자라난다.

산책도, 교육도, 장난감도, 교감조차 필요 없는 그네들의 삶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쉬운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 역시 물과 햇빛만큼으로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하는 부러움도 슬며시 든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딱히 그런 것도 아니다. 화분 안에 담겨있는 녀석들은 아무래도 밖에서 자유롭게 자라나는 녀석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약하다. 물 양이 조금만 적거나 많아도, 기온이 조금만 내려가도 이 녀석들은 금방 시들시들해지고 만다.

내가 처음으로 죽인 녀석도, 야생에서 쉬이 번식하는 생명력 강한 종이었다. 나를 위해 화분 속에 담기면서, 녀석은 그렇게 약하게 죽어갔었던가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프다. 녀석들이 죽지 않았으면 하는 이 마음조차, 내 이기인것인지, 그들을 아끼는 마음인건지 잘 알기가 어렵다.

죽어버린 녀석의 뿌리만 남은 화분은, 처음 얼마간 안타까운 기분을 불러 일으켰으나, 이제는 담담해져 ‘버릴까’하는 생각조차 든다. 이런 나를 발견하면, 역시 이 녀석들을 곁에 두는 것, 죽이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들 모두 내 이기에 가까운 것인 것 같아 입이 쓰다.

식물도 사랑하는 마음과 정성으로 키우면, 그에 보답하듯 보다 튼튼하게 더 잘 자란다고 한다.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아끼고, 사랑해주는 것이 식물에게 어떤 감정적 영향을 주는지는 증명하기 힘드나, 그런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이 식물을 더 꼼꼼하고 세심하게 돌봐줄 것이라는 것은 당연히 예측 가능한 일이다. 그런 사람의 손에서 길러지는 식물이 튼튼하게 더 잘 자랄 테니, 어려운 증명이나 실험이 없더라도 상식적으로 기르는 사람의 ‘애착’이 식물의 성장에 영향을 준다는 것에 크게 반대할 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애착’이라는 것이 경계가 영 애매하다는 것이 문제다. 애착을 형성하는 기반은 애착의 상대방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보통 ‘나’에게 있다. 내가 무언가를 친밀히 두려할 때는 보통, ‘내게 필요하다’거나, ‘나에게 만족감을 준다’거나, 기타 등등 나의 감정적 이유가 있다. 나 같은 경우도, ‘집에 생기가 조금 있었으면 좋겠다’ 하여, 식물을 들였었다.

내가 가지는 애착이라는 게 내 필요만으로 인해 이루어졌으니 참으로 일방적인 셈이다. 이 애착은, 과연 사랑인 것일까, 욕심인 것일까. 내가 이 친구들이 좀 더 오래, 건강하게, 잘 자라주었으면 하는 것은, 감히 사랑이 아닐까 싶다가도, 어쩌면 내가 이들을 잃지 않으려 하는 욕심일 수도 있겠다하는 생각도 든다. 완전히 어느 한쪽이 아니라, 이 두 가지가 혼재한 감정으로 이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게 가장 정확하겠다. 마치 분홍을 두고, 희다 하여야할지 붉다 하여야할지 자신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이들을 두고 사랑을 느끼는지, 욕심을 채우는지 명확하게 얘기해 낼 수가 없다.

내손으로 키워본 것이라곤 내 인생 통틀어, 고작 학교 앞에서 파는 병아리 몇 마리, 강낭콩, 그리고 지금 사들인 화분 여섯 개(이젠 다섯 개)가 전부인 주제에, 감히 어찌 일반화할 수 있겠냐마는, 무언가를 키운다는 것은 내 감정의 경계를 지키는 게 가장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조심스레 해본다. 돌본 것들의 종류를 불문하고, 하나같이 마냥 쉬운 적이 없었다. 강낭콩도, 수많은 병아리들도, 결국은 내손에서 족족 죽어나갔다.

아, 한 마리, 닭까지 키워냈던 병아리가 있었다. 예뻐하고 관심을 가졌던 병아리들은, 어린 내 손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그 밤에 죄 죽어버렸지만, 살아남은 한 마리의 병아리는, 운 좋게도 우리가족이 며칠간의 휴가, 바로 그 전에 우리 집에 왔다.

집의 난방과, 풍족한 모이, 물, 그리고 ‘어린 나로부터의 자유’를 얻은 병아리는, 그 며칠의 휴가동안 기력을 비축했고, 덕분에 내가 돌아왔을 때는 학교 앞에서 구매했을 때보다 훨씬 건강해져 있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애착이 크다는 것이 곧 뭔가를 잘 돌볼 수 있다는 뜻은 아닌 것 같다. 애착의 색깔이 어떤가 하는 것은, 관심을 빙자하여 병아리를 괴롭히는 어린애의 손처럼 잔혹한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애착이 이기심의 색깔을 띠고 있다는 것은, 때로는 무지로, 때로는 강압의 이름으로 상대방의 목을 조른다. 물론 악의는 없었지만, 병아리는 어떨지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예쁘다 예쁘다 손노리개 삼은 어렸던 나도, 화분이 다 말라 죽을 때까지 흰곰팡이가 뭔지도 몰랐던 최근의 나도, 바로 내 이기적인 애착이 그들을 결국 죽이게 만들었던 게 아닌가.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거기서 부터가 잘못이었다. 내 바람대로 커주길 바란 것. 내 바람대로, 내가 바라는 그들의 ‘용도’대로, 그렇게 되어주길 바라며, 그를 그대로 강요한 것이 잘못이었다.

어쩌면 잘못된 애착은 무관심보다 더 무서운 일이다. 그것은 애착이라기보단, 이미 집착이다. 애착이라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이, 완전히 자신의 감정과 욕심에서 분리되어 존재하긴 힘들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정말로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면, ‘애착’ 자체가 존재하기 힘들다.

때문에, 애착은 완전히 희지도, 완전히 붉지도 않은 분홍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혼자 자라지 않는 모든 것들은, 누군가의 애착을 필요로 한다. 애완동물이 그러하고, 정원과 화분의 식물이 그러하고, 가축과 농작물이 그러하고, 우리의 아이들도 그러하다. 누군가의 관심과 사랑, 정성으로 자라난다.

이 모든 것을 돌보는 손은, 욕심으로 물들어서는 안 된다. 단지 그들이 잘 되길 바란 게 전부였다는, 그 말에 들어있는 자신의 욕심을 반성해야한다. ‘내 것’이 아니다. 내가 바란 대로, 내 욕심을 채워주길 바라는 것은, 제대로 된 애착이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그 욕심은 당신의 바람과는 반대로, 당신의 어리고 소중한 무언가를 힘들게 할 수도 있다.

애착과 집착, 그 미묘한 경계를 확연히 구분 지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욕심 많은 어미는 과연 나쁜 것일까. 어떤 경우엔, 외려 그 아이의 인생을 망쳐버릴지도 모르지만, 또 어떤 경우엔, 그러한 어머니의 욕심이 아이를 구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아무도 정답을 알지 못한다. 무언가를 돌본다는 것을 그래서 어려운 일인 것이 아닌가 싶다.

내가 쏟는 애착에 내 욕심은 과연 어느 정도여야 하는 것일까. 아마 세상 누구도 이에 대해 명확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고작 식물을 키우면서, 나는 이런 고민을 한다. 내가 쏟는 애착이 과연 욕심인지, 집착으로 변하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행하게도, 오늘까지는 남은 다섯 화분의 잎들이 파릇하다. 잎에 도는 생기가, 내가 잘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아직은 내가 아주 잘못하지는 않았다는 칭찬처럼 여겨져 기분이 좋다.

비가 오면 축축 늘어지는 이파리들과 같이 내 기분도 쳐지겠지만, 그래도 이 친구들이 내게 긍정적인 존재들이라는 건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이다. 많은 걸 배우고 있다. 내일도, 내가 이 친구들에게 집착 아닌 애착으로 다가갈 수 있길 바랄 뿐이다.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경희대 학생입니다. `위클리서울` 대학생 기자로 멋진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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