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픽업아티스트에 관한 단상





낯선 사내가 말을 걸어오는 것도 완전히 로맨스일수만은 없는 세상이다. 흉흉한 세상. 날마다 뉴스에는 좋지 못한 소식들로 가득하고, 카더라 통신에는 창의적일만큼 무서운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업데이트 되고 있는 요즘. 세상에 무서워야 할 것과 조심해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도서관 책상 위의 쪽지 붙은 수줍은 음료수 한 캔도 조심성 없이 들이키면 안 되는 세상. 울고 있는 미아를 선뜻 도와선 안 되는 세상. 노인분의 무거운 짐을 의심 없이 들어드려선 안 되는 세상.

그런 생각지도 못한 창의적인 방법으로 무서운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보다 더 무서운 건, 어쩌면 사람이 사람을 생각하는 예쁜 마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마음을 악용했다는 것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딱히 무시무시한 범죄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사람의 마음을, 선심을, 파고들어 이용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가끔은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무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내 생각에 ‘그게 뭐가 무서운 사람이야?’하고 반대하고 나서는 모습은 도리어 내가 누구나 악당일 수 있는 악당의 소굴에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만 더욱 깊게 들게 만든다. 사람들의 선심이 이용당해도, 범죄가 되지 않는 수준에 한에서는 조심하지 않은 사람이 더 문제라는 식인 것 같아서.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을 사랑하고 그를 의심하지 않는 마음을 상술로 이용하는 것도, 나를 좋아한다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여는 것을 악용하는 것도, 뭐랄까, 건드려서는 안 되는 부분마저 침범한 것이 아닐까 하고 슬퍼져버리는 거다.

그런데 그걸 슬퍼하지 않는 세상이라는 건 더더욱 슬프다. 순수함을 가장하여서라도 구매 욕구를 불러일으키면 그만이라고 생각해온 사람들과, 그리고 이것이 아주 나쁜 것은 아니라고 받아들인 사람들. 이것이 어린이를 범죄에 악용하는 나쁜 사람들보다, 우리가 ‘어린아이들의 순수함’을 의심 없이 믿지 못하게 된, 보다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이유다.

어린아이는 거짓말을 못한다는 말이 틀리게 된 건, 이런 것들이 나쁘지만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어째서 슬픈 일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깨끗하게 지켜주려는 마음이 없었다는 걸, 전혀 반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길을 걷다가, 누군가 “저기요” 하고 말을 걸어온다면, 어떤 기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당연히 의심한다. 의심할 수밖에 없다. 뭔가 낯선 나에게 말을 걸만한 긴급하거나 중요한 일이 있지 않을까 배려하여 그들의 말에 친절하게 귀를 기울였다가, 이상한 홍보나 종교적인 권유를 받았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들은 누군가 내게 말거는 것 자체를 의심하게 만든다. “뭐요?” 하고 도끼눈을 뜨고 째려봤다가, “**로 가려면 어떻게 가야하나요?” 물어보는 앞에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은 적 역시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친절하게 대답했다가 찰거머리처럼 떨어지지 않는 ‘도를 아십니까?’에 시달리지 않으려면, 잘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걸때는 어느 정도 싸늘하게 대답해야 할 필요가 있다. 말은 건 사람이 “그쪽이 마음에 들어서”라며 웃고 있을 경우에도 의심을 거둘 수 없다. 이렇게 접근하는 사이비들도 부지기수기 때문이다. 지켜보고 있노라니, 사이비도 아닌 것 같고 정말 내가 이성적으로 마음에 든 사람이 맞는 것 같다고 해도, 역시 의심을 거두기는 이르다. 특히 내가 여자라면 말이다. 슬프게도 이 세상에는, 처음 보는 여성에게 한 눈에 반한 남자의 순정과 어렵게 낸 용기, 그리고 그 모습에 수줍게 마음을 여는 여자들만이 존재하는 게 아니다. 수많은 픽업 아티스트와, 야매 픽업아티스트들이 바글바글한 세상이다. 그리고 그게 나쁘지도 않단다. 내게 “저기요” 말 붙인 이 사람이 정말 내게 첫 눈에 반해버렸고, 정말 어렵사리 용기를 낸 순정남이라면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우리는 이 “저기요”를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솔직한 생각으로, 나는 이제 길을 걷다가 누군가 이런 식으로 번호를 물어보거나, 호감을 표시하면 열에 아홉은 ‘이거 픽업(아티스트) 아니야?’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든다. 남녀 간의 사랑도 순수하게 보이지 않는 세상. 과연 픽업 아티스트가 그들의 주장대로 정말 ‘나쁘지 않은 것’일까. 글쎄.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픽업아티스트란 말 자체가 생소한 분들도 계시겠다. 픽업아티스트는 이성을 유혹하는 기술을 심리학부터 과학까지 동원해서 연구하는 직업이다. 마음에 드는 낯선 여성에게 접근하는 길거리 헌팅법,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는 기술적인 방법 등등을 연구하고 전수한다.

혹자들은 “아티스트라는 말로 미화시켰을 뿐, ‘제비’와 다를 게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여자 꼬시는 법을 가르치는 학원’의 강사들. 그들이 바로 픽업아티스트이며, 그들이 그 학원에서 양성하는 것도 픽업아티스트이다.

픽업아티스트들은 그들의 연구를 통해 연애에 성공하고, 솔로들이 진짜 사랑을 찾을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말하는 긍정적인 면은 더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감이 없는 사람이 사랑의 기술을 통해 자신감을 얻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수강을 통해서 새로운 자신을 발견한 사람들이 꽤 있다고 한다. 자신감이라는 긍정적인 변화, 이를 통해 자신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호감을 얻을 수 있다면 이는 분명 좋은 일이라는 것. 마음에 드는 이성이 있어도 말 한번 붙여보지 못하고 후회하던 소심한 남자로 평생을 사는 것 보다 훨씬 좋은 일이므로, 결론적으로 자신들이 하는 일이 나쁘지 않은 일이라고 변호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엔, 아무리 그럴 듯하게 꾸며도 픽업아티스트들이 추구하는 목적이라는 게 절대로 좋게 만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가르치는 것은 사랑의 기술이 아니라 연애의 기술이다. 스스로도 ‘연애의 기술’이라고 칭한다. 이게 이상한 부분이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이 마음을 전달할 방법을 모른다면 사랑의 기술이 필요하다. 그렇다. 그들의 주장대로 사랑에 기술이 아예 없어서는 안 된다는 건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해놓고 실상 그들이 가르치는 건 연애의 기술이다. 사랑과 연애를 어떻게 구분하는 걸까? 사랑과 연애는 다른가?

연애는 그 자체로 이미 기술적인 부분이다. 사랑을 나누는 방법이다. 때문에 ‘내가 누굴 사랑한다’는 말이 곧 ‘내가 누구와 연애한다’와 같은 말이 되는 건 아니다. 사랑은 연애만이 아니어도 존재할 수 있다. 나와 사귀지 않더라도, 누구보다 그 사람을 크게 짝사랑할 수도 있지 않은가. 또한 연애는 사랑이 없어도 존재할 수 있다. 사랑을 나누는 방법이기에, 대부분 사랑하는 사람과 연애를 하겠지만, 아닌 경우도 없지 않다. 남자가 나를 너무 좋아하기에 일단 사귀기 시작했다는 연애나, 조건만 보고 만나는 연애, 너무 외로워서 일단 만나본다는 연애, 비정상적인 부분이 없잖아 있긴 하지만 모두 ‘연애’다. 픽업아티스트들은 이러한 ‘연애’의 기술을 가르친다.

사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농담’이라고 말하면 다들 헛소리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실제로 연애에 가장 중요한 것이 ‘농담’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서 자신들이 사랑의 전도사라고 생각하고 거창하게 아티스트라는 표현까지 붙인다는 건, 과한 것 아닌가?

뿐만 아니다. 픽업아티스트 커뮤니티에는 여자와 어디까지 진도를 나갔다는 후기를 공유한다. f-close라는 용어도 따로 있다. 성관계를 뜻한다. ‘홈런’이라는 거다. 생각만 해도 머리가 쭈뼛 설만큼 기분이 나쁘다.

이런 것들이 화제가 되고 나서, 픽업 아티스트들에 대한 비난의 시각이 우후죽순 생겨나자, 픽업아티스트들은 이러한 ‘일부’ 때문에 전체가 욕을 먹는다고 잡아뗀다. 하지만 애초부터 그건 당연한 것이었다. 사랑이 없는 연애를 가르치는 그들이(그들은 배운 이론을 자주 실천, 연습하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정기적으로 낯선 이성의 전화번호를 물어보는 연습을 한다. 이게 어떻게 ‘사랑’인가?) 만들어낸 연애가 정상적인 사랑을 담고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목적이 육체적인 스킨십으로 치우치는 것은 예상 가능한 진로였을 것이다. 잡아떼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실제로 그들이 가르치는 내용 중에는 어떻게 무의식중에 여성을 성적으로 개방된 마인드로 바꾸는지가 자주 공식화하여 등장한다. 그들은 사실 조신하고 바람직한 개념녀 보다는, 쉽게 ‘홈런’칠 수 있는 여자를 더 선호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정말 제대로 된 사랑을 하고 싶었던 것이라면 절대로 누구나 ‘홈런’칠 수 있는 여자를 선호했을 리 없다.

단언하건대, 픽업아티스트는 제대로 된 사랑을 결코 할 수 없다. 그들은 여자를 대하는 법을 공식화시키는데, ‘사랑’에 대한 근원적인 접근은 아예 배제한 ‘공식’만을 만들어내는 게 다다. ‘공식’이라는 기술만을 배운 이는 공식을 ‘적용’할 순 있어도, 거기서 더 나아가 공식에 없는 사랑을 공식만으로 도출 할 순 없다. 사랑 없는 연애가 대체 인생에 무슨 가치란 말인가. 그런 연애를 백번 만번 해봤자, 그들의 인생이 뭐 어떻게 더 발전한다는 것인가.

그들이 스스로를 나쁜 사람이 아니라 항변하는 것 자체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들은 사랑을 배우고 싶었던 사람을 아주 노련하게 연애‘만’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는다. 정말 표현할 줄 모르는 답답한 순정남보다 사랑으로부터 더 먼 사람이 되고 만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연습’하고 ‘사냥’하는 여자들에게도 피해를 준다. 누군가의 순정을 더는 보이는 대로 믿을 수 없는 세상으로 만들고 있으면서, ‘오해다’라고 말하는 그 모습은 가증스럽기까지 하다. 맞다. 범죄는 아니다. 그들이 여자들로부터 금품을 뜯어낼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니까 제비도 아니다. 목적이 연애라는 게 범죄는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범죄가 아니라고 나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제 갓 대학생이 된 남자는 버스 안에서 어떤 여자를 보고 첫 눈에 반한다. “첫 눈에 반한다는 건 고작 겉모습이 맘에 드는 거지, 그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어떻게 사랑에 빠져?” 하고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늘 믿지 못했던 그였지만, 그녀를 보는 순간 이 생각이 송두리째 바뀌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예쁜 것도 아니고 평상시 좋아했던 연예인과도 너무 다른 타입의 여자이지만, 눈빛이나 분위기가 마음에 꽂히듯 끌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두근거리는 심장. 그녀가 내리는 정류장에 얼결에 따라 내려버렸다. 멍하게 서있는 사이 그녀의 뒷모습이 그녀의 보폭만큼 계속 멀어진다. 지금 놓치면 평생 후회하겠지? 용기 내서 그녀에게 말을 건다. “저기요….” 이어지는 풋풋한 러브 스토리…가 아니라, 자신을 붙잡은 이 남자를 보고, 그녀는 ‘픽업꾼 아니야?’ 싸늘한 대답. 그리고 끝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이래도 나쁘지 않은가? 이 남자의 순정을 짓밟은 건 도대체 누군가 말이다. 슬프고도 무서운 세상에 살고 있다. 내가 슬프고 무서운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내 상상속의 순정남이 느끼는 만큼 슬프게 느껴지는 듯하다. 이런 순수한 마음을 깨끗하게 지켜주려 하지 않았다는 걸, 언젠가 후회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경희대 학생입니다. `위클리서울` 대학생 기자로 멋진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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