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명품?





우리 동네에는 그다지 크지 않은, 거의 슈퍼마켓이라 불릴만한 마트만 서너 개 나머지는 죄 편의점이다. 가난한 자취생이 장보기에는 그다지 좋지 못한 환경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다행하게도 아주 멀지 않은 곳에 대형마트 체인이 하나 있다. 눈이라도 심하게 오는 날에는 그 멀지 않은 거리가 너무나 멀게 느껴지긴 하지만, 어쨌거나 걸어서 10분 내에 도착하는 정도의 거리다. 대형마트라 해도 우리 동네에 입점해 있는 마트는 다른 동네처럼 의류나 가전 등등 여러 가지를 파는 서너층짜리 건물이 아니라, 단지 그저 지하 한 층이 오밀조밀 전부인, 파는 물건들도 거의 생필품과 식품류가 대다수인 그런 마트다. 이름만 대형마트지, 동네에 조금 큰 마트정도라 생각하면 딱 그 정도다. 그래도 자취생에게 필요한건 거의 다 갖추고 있기에 아무런 불편 없이 생필품과 양식들을 쇼핑하고 있다.

이 한 층짜리 마트는 그다지 변화랄 것이 없다. 고향 동네에 있는 마트만 해도 여기보다 훨씬 촌인데도 갈 때마다 상품 배열 위치며 행사상품이며 입점 상점도 매번 바뀌곤 하는데, 여기는 뭐 그런 게 하나도 없다. 식빵이 있는 자리엔 늘 식빵이 있고, 만두가 있는 자리엔 만두가 있고, 간장이 있는 자리엔 간장이 있고, 우유가 있는 자리엔 우유가 있고, 양상추가 있는 자리엔 양상추가 있다. 이 동네에서 3년을 넘게 살았는데, 그간 변화한 게 거의 손에 꼽는다. 와인코너가 조금 더 확장된 정도?

하지만 이런 마트에도 예외 없이 변화의 바람이 부는 때가 있다. 바로 명절 때다. 내가 명절을 가장 먼저 체감하는 장소가 바로 마트다. 고향으로 내려가는 버스를 인터넷으로 예매할 때도 피부로 와 닿지 않던 명절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한복을 입은 직원들이 연신 인사를 건넨다. 진열도 변화를 겪는다. 식빵이 있던 자리엔 온통 선물세트로 가득 찬다. 마트는 1월 말부터 민족 대명절, 설을 맞이하는 이른 준비를 했었다. 계란이며 우유를 사러 일주일에 한두 번은 들르는 곳이니, 이런 광경이 수번. 설날이 되기 전부터 미리 설을 다 지낸 기분이다.

별다른 재미난 일이 없다보니 마트에 오면 괜스레 물건들 구경하는 것을 좋아한다. 결국 계산대에서 구매하는 건 역시 계란과 우유, 양파 정도겠지만. 마트 안은 춥지도 않고, 산책하는 기분으로 쭉 둘러보는 거다. 매번 그렇게 구경하다 보면 정말 새로울 것이 하나도 없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지금도, 마트 안에 걸려있는 머그컵 종류를 떠올릴 수 있을 정도다.

그런 내게 명절을 맞이하는 마트의 변화가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도 당연하다. 행사 상품도 조금 더 많아지고, 선물세트도 갈 때마다 조금씩 업데이트 된다. 지난 설에는 선물세트 중에도 주류가 꽤 많았다. 대부분이 와인. 패키지로 두병이 묶여 있는 와인은 가격이 아주 합리적이라서 괜히 솔깃한 마음으로 구경했다. 그러다가 선물세트들 사이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선물세트. 남에게 선물을 하는 목적의 상품이니, 단순히 식용유가 되었든 통조림이 되었든, 최대한 고급스럽게 보여야 되는 것은 이해한다. 포장이 일반 상품보다 화려한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명절 선물세트의 포장은 흥미로운 사실이 아니다. 그건 언제나 늘 그래왔지 않은가.

재미있는 사실은, 바로 ‘명품’이라는 단어의 남용이다. 어디를 가나 ‘명품’이다. 명품이라는 단어는 마치 만능처럼 여기저기에 붙어있다. 평상시 마트에서는 ‘프리미엄’이나 ‘명품’을 상대적으로 비슷한 상품보다 조금 비싼 상품 앞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마치 이것은 명품이니 이 정도 가격이 정당하다는 것을 설명이라도 해주듯이 말이다. 그런데 설날 선물세트들은 가격이 어찌되었건 죄다 명품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모두가 하나같이 말이다. 만원 비싼 애도, 천원 싼 애도, 죄다 명품이란다. 자칭 명품들 앞에 조금은 어안이 벙벙해진다.

선물세트는 받는 사람이 받고 싶은 것을 선물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읽어서 마케팅에 활용한다. 한마디로, 사람들은 ‘명품’을 받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선물하는 입장에서는 현실적인 경제적 여건도 있으니, 고가의 명품만을 선물할 수는 없을 것이고, 그러니 명품이라고 적혀 있는 합리적인 상품을 고르게 될 것이다. 아마 이런 이유로, 모든 선물세트들이 저마다 ‘명품’이라는 이름표를 달게 되었을 것이다. 명품 통조림 세트와, 그 명품 통조림 세트보다 저렴하지만 역시 명품인 다른 통조림 세트. 모든 종류가 다 저마다 명품이라면, 그게 도대체 왜 명품인건지 알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모든 ‘명품’들은, ‘명품’이라는 이름표가 아니라 ‘가격표’로 그 질을 평가받는다. 여기서 ‘명품’이라는 이름은, 그냥 포장 같은 것일 뿐이다.

사람들은 명품을 원한다. 명품의 사전적 의미는 ‘뛰어나거나 이름난 물건’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명품이라고 하면, 여기에 ‘비싼’을 더해 ‘뛰어나고, 비싸고, 이름난 물건’을 의미한다. 여자들이 모두 가지고 싶어 하는 비싼 핸드백이나 구두 같은 것. 남자라면 비싼 차, 비싼 시계 등등. 오늘날은, 모두가 가지고 싶어 하지만 모두 가질 수 없는 것만이 명품이라고 불린다.

사람들은 명품을 가지고 싶어 한다. 사람들은 왜 명품을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일까? 아주 일차적으로 명품은 같은 종류의 다른 물건들 보다는 품질이 좋다. 물론 명품의 품질이 일반 제품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경우가 화제가 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한다면 이런 경우가 예외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재질이나 성능뿐만 아니라 서비스에서도 비싼 명품의 질이 더 좋은 것이 보통이다.

이유가 그뿐이라면 합리적인 소비자들은 적당한 가격에 품질이 좋은 제품을 찾아야 할 텐데, 유독 비싸고 희소한 명품에 대한 욕구가 큰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일종의 표현 욕구 때문이다. 물건을 소비하는 행동은 단순히 소비 그 자체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나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확장된다. 내가 먹고 쓰는 것들은 나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 된다. 예컨대 애플을 쓰는 사람들은 단순히 애플사의 기기만을 보고 애플에 애정을 쏟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애플사의 혁신적 이미지, 철학까지도 추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경제적 여유를 과시하고, 자신의 품격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구가 명품 구매로 이어진다. 가격이 높아질수록 수요가 높아지는 이 같은 현상을 ‘베블런 효과’라고 부른다. 베블런은 ‘비싸지 않고 아름다운 물건은, 아름답지 않은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여기까지는 굉장히 상식적인 이유였다. 비싼 명품을 사는 사람들은 비싼 게 질이 좋고, 또 비싼 것을 살 능력을 과시하고 싶기 때문에 사는 것이라는, 그냥 당연한 이야기였다.

명품에 대한 욕구의 또 다른 이유이자, 가장 비합리적인 이유는 바로 ‘남들이 다 사니까’이다. 주변 친구들이 다 명품을 가지고 있으니 나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명품을 살 경제적 여유가 없거나, 명품을 구매 하는 것이 그다지 합리적인 것이라 생각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명품을 사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결코 적지 않다. 이러한 현상을 ‘밴드웨건 효과’라고 부른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하는, 바로 그런 현상이다.

명품을 살 경제적 여유가 되지 않는 사람들. 혹은 그 비싼 돈을 들여가면서 명품을 사는데 동의하기 힘든 사람들은 사실 명품을 사지 않는 것이 맞다. 반대로 명품을 살 경제적 여유가 되는 사람이거나, 그 정도의 비용을 지불해서라도 명품의 가치를 누리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명품을 구매하는 것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 것처럼, 그들이 명품을 사지 않는 것 역시 아무도 뭐라 할 일이 못 된다.

하지만 남과 비교하길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습관 때문인지, 누군가가 명품을 사면, 명품을 못 가진 사람들은 어쩐지 그것이 ‘부끄러운 일’처럼 여겨지게 된다. 친구들이 죄다 스마트폰을 사면, 본인은 사실 스마트폰이 필요하지 않지만 자신의 피처폰이 부끄러워 스마트폰을 사야할 것만 같은 그런 기분 말이다. 이런 밴드웨건 효과 때문에 가짜 명품, 즉 짝퉁 시장이 형성되게 되는 것이다. 살 여유가 없거나, 그 돈을 주고 사긴 싫은데, 남들 다 가진걸 안 사자니 부끄러워 사긴 사야겠고, 해서, 그만큼 비싸진 않은 짝퉁을 사게 되는 것이다.

명품 종이백이 비싼 값에 거래된다고 한다. 짝퉁만이 아니라, 이제는 명품을 담는 ‘종이백’을 거래하기에 이른 것이다! 명품 로고가 박힌 종이가방 하나에 몇 만원을 주고 사서는, ‘마치 이런 명품을 살 수 있는 사람’인 척 한다고. 거기에 담아 다니는 건 명품이 아니라 자신의 소지품들. 남들을 지나치게 의식한 우리들의 못난 이면이다. 그 사실을 알고 얼마나 경악했는지 모른다.

명품이라는 두 글자가 우리들에게 갖는 의미는 대체 무엇일까. 무엇이 마트의 모든 선물세트들에 껍데기뿐인 ‘명품’ 이름표를 달게 한 것일까. 무엇이 고작 종이가방을 명품 로고가 인쇄되어 있다는 이유로 몇 만원씩에 거래되게 한 것일까. 명품이 아니면 안 되는 사회를 만든 것은 대체 무엇일까. 우리는 어쩌면… ‘명품’ 이 아니고서는 자신의 가치를 표현할 수 없는 바보들이 되어버린 건 아닐까?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경희대 학생입니다. `위클리서울` 대학생 기자로 멋진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