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꿈





TV를 볼 시간이 거의 없다. 아주 단순한 이유다. 시간이 없고, 텔레비전이 없기 때문이다. 떡볶이가 갑자기 너무 먹고 싶어서, 집 앞의 분식집에서 떡볶이랑 어묵을 시켜놓고 기다리는데, 천장에 달려있는 텔레비전이 얼마나 반갑던지. 작고 낡은, 색깔조차 성치 않은 그런 텔레비전. 우리 집 전자레인지보다 작은 그 화면으로, 송혜교랑 조인성이 나오는데, 나는 도대체 이게 어떤 드라마인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지금 어떤 상황인 것일까? 송혜교와 조인성은 무슨 사이인 것일까? 송혜교는 대체 지금 왜 저렇게 화가 났을까? 아는 것 하나 없었지만, 다만 포털사이트에서 송혜교의 시각장애인 연기를 연신 헤드라인으로 올렸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나, 이 드라마 요즘 꽤나 인기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추측만 잠시 해볼 뿐이었다. 내용도 하나도 모르면서 그냥 텔레비전의 움직이는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떡볶이는 아직 멀었고, 나는 같이 온 일행이 없었고, 좁은 분식점 안에는 손님도 나 하나, 딱히 구경할 만한 다른 것이 없었기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재방송으로 추측되는 (뭔가 시간대가 애매했다) 드라마는 내가 자리에 앉고 얼마 안 있어 끝이 났다. 그리고 끝남과 동시에 내가 주문한 떡볶이가 나왔다. 그렇게 먹고 싶었던 떡볶이건만, 나는 분식집 아주머니께서 채널을 돌리는 것에 더 집중하고 있었다. 화면이 휙휙 돌아가다가 곧, 한 채널에서 멈췄다. 나도 알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사람들의 고민 사연을 들어주는 프로그램. 패널들의 입담이 워낙 뛰어난지라 나도 꽤 좋아하던 프로그램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텔레비전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떡볶이를 먹는데 속도를 못 낼 지경이었다. 이 프로그램을 보고 있으면, 세상엔 참 다양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딸이 걱정이라는 사연을 들고, 한 어머니가 나오셨다. 코스프레를 하는 딸이 걱정이라는 어머니. 딸은 중학생이었는데, 노란가발을 쓰고 화장이 짙었다. 코스프레라는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를 가장하는 놀이 문화다. 자신이 좋아하는 게임캐릭터나 만화캐릭터로 변신해, 그 캐릭터와 자신의 유대감도 키우고, 자아를 사람들에게 표출하는 문화라고 해야 할까. 코스프레라는 것이 내겐 굉장히 낯선 문화지만, 코스프레를 하는 사람들은, 마치 배우처럼 여러 가지 캐릭터로 변신하고 이에 이입하면서 다양한 내 모습을 발견하고, 또한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사람들에게 표현하면서 일종의 해방감과 동시에 자신의 자아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어머니는 어린 딸이, 노출이 심한 옷과 짙은 화장과 같은 차림을 하고 돌아다니는 것이 걱정되고, 한창 공부할 시기에 가발이니 옷이니 신경 쓰고 있는 것도 염려된다고 하셨다. 사실 모녀간에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코스프레 그 자체가 아니었다. 코스프레를 한다는 것이 조금 특이하긴 하지만 나쁜 일은 아니지 않은가. 물론 코스프레를 하면서 어린나이에 너무 조숙한 차림을 하고 다니는 딸이 걱정되는 부분은 있겠지만, 사실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모녀간의 대화 단절이었다. 어머니는 단지 근본적인 문제가 ‘코스프레를 하는 것’ 그 자체라고 생각하고 계신 것처럼 보였다. 코스프레를 그만두기만 한다면, 성적도 오르고 옷차림 때문에 신경 쓰실 일도 없을 것이고 감기에 걸릴 일도 없을 거라, 그리 생각하시고 계신 게 시청자인 내 눈에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완고하셨다. 공부도 잘하던 딸이 코스프레를 하면서 성적도 떨어지고 그랬다고. 코스프레만 그만두면 다시 성적도 오를 것이라고 생각하고 계신 듯했다. 영어도 곧잘 하니, 공부에 집중한다면 외교관도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시고 계시니 코스프레가 못마땅하실 수밖에.

하지만 딸의 생각은 달랐다. 딸은 메이크업아티스트가 되고 싶다고 했다. 애초에 외교관이 되고 싶은 생각조차 없어보였다. 어머니에겐 외교관도 될 수 있는 딸아이가 ‘의미 없는’ 일에 신경을 쏟느라 학업을 소홀히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딸은 사실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꿈꾸며 스스로 화장하고, 옷을 입는 코스프레가, 꿈을 향한 일종의 ‘공부’인 셈이었다.

이 두 사람의 견해 차이는, 대화의 단절을 통해 간격을 좁히지 못하고 평행선처럼 달려왔다. 그러다 보니 둘 사이에 갈등의 골이 이만큼 깊어졌는지도 모르겠다. 딸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것을 호소했다. 어머니는, 너는 예술에 재능이 없다고 못을 박았다. 예전에 보신 점 얘기까지 꺼내시면서 말이다. 딸은 자신의 꿈을 들여다 봐주지 않고, ‘안 되는 길’이라 단정 지으시는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께서 자신에게 쏟는 기대감을 다시 코스프레로 해소하고 있다고 했다.

대화가 없으니, 악순환의 반복이다. 어머니는 코스프레를 하는 딸을 더욱 걱정하시고, 딸은 탈출구로 코스프레에 더 집중하게 된다. 사실 어머니의 걱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딸과, 딸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어머니의 문제는, 사실 딸이 되고 싶은 것이 ‘외교관’이 아니라는 것이 보다 본질적인 것임을 간과하고 표면적으로 ‘코스프레’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그 사연의 마무리를 보기 전에 나는 떡볶이와 어묵을 다 먹었고, 계산을 하고 가게를 나왔다. 어머니의 꿈이 아닌 자신의 꿈을 꾸고 싶다는 딸의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예전에도 같은 프로그램에서 아들이 잠이 너무 많아 고민인 아버지의 사연을 본 적 있다. 아침에 못 일어나는 아들의 문제는, 아침잠보다 더 본질적으로, 학교에 가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점이었다. 아들은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었다. 학교에서는 내가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고 했다. 약간 무기력한 느낌의 아들의 얼굴과, 그 아들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던 아버지의 얼굴이 겹쳤다. 왜 부자는 웃음을 잃었을까.

생각해보면 요즘에는 참 다양한 성공의 길이 열려있다. 성공의 개념이야 딱 뭐라 정의하긴 어려운 것이긴 하지만, 세상이 다양해진 만큼, 어떤 일의 일인자가 될 수만 있다면, 딱히 공부가 아니더라도 명예와 부를 모두 가질 수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모든 일은 저마다 필요한 ‘공부’가 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되고 싶다면, 단순히 화장품에 대한 공부부터, ‘아름다움’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인 공부까지, 알고 익혀야 하는 것이 참 많다.

꿈이 확고한 아이들은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자신의 꿈을 위한 공부에 목이 마를 수 있다. 중고등학교에서는 입시를 가르친다. 수능점수를 잘 받을 수 있는 방법은 가르쳐주지만, 훌륭한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되는 방법은 가르치지 않는다. 백번 양보해서, 메이크업을 교육하는 ‘대학’을 가는 방법까진 학교에서 배울 수 있지만, 결코 그 이상은 없다.

나는 어릴 적에 꿈이 무엇이었을까. 내 친구들은 무엇을 꿈꾸고 있었을까. 사실 잘 기억이 안 난다. 나와 친구들 모두 대학을 꿈꾸고 있었다. 서울 상위권의 대학, 무슨 학과. 자습실 칸막이에는 저마다 목표로 하는 대학교의 마크나 사진 따위가 붙어있고, 그걸 보면서 졸린 눈을 부릅뜨며 결의를 다지고 그랬다. 생각해보면 맞다. 우리의 꿈은 대학이었다. 좋은 대학에 입학하면, 그 이후를 너무 막연하게 다 좋을 것이라 생각한 것도 있지만, 아예 생각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 그냥 우리는 대학만을 생각했다. 이후를 생각할 여유도 없었을 뿐더러, 그를 생각하는 방법도 잘 몰랐다.

아이들은 저마다 꿈이 있어야한다. 이왕이면 공부를 해서 성공했으면 하는 것이 부모의 맘이라는 건 알지만, 부모의 욕심 이전에 아이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우리나라엔 세 종류의 아이들이 있는 것 같다. 부모님의 꿈과 자신의 꿈이 일치하는 아이들. 공부하는 것이 자신의 꿈을 이루는 길인지라, 부모님과 선생님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면서 정진한다. 이 친구들의 학업 성취능력은 정말 놀랍다. 공부를 원해서 하는 친구와 그렇지 않은 친구의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그리고 두 번째, 꿈이 없이 그저 시키는 대로 공부하는 아이들. 이 중에는 공부를 잘 하는 친구도 있고 그렇지 않은 친구도 있다. 사실 어느 쪽이든지 자신의 인생의 주인공으로서 그다지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다. 돛단배가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빨리 나아간다고 해서, 그게 단지 좋은 일일까. 배의 주인은 자신이 어디로 가야하는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리고 세 번째, 부모님의 꿈과 자신의 꿈이 대립하는 아이들. 내가 제일 안타까운 건 바로 이 세 번째 유형의 친구들이다. 사실 첫 번째 유형의 아이들처럼, 세 번째 유형의 아이들도 자신이 인생의 주인공으로서 스스로의 길을 정하고 꿈을 키워가고 있다는 점은 똑같은데, 단지 그것이 우리들이 노래하는 ‘공부, 공부’하는 그 길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웃음을 잃어간다. 이상한 일이다. 대학에 오고 나서도 갈 길이 이렇게 먼데, 어째서 공부만큼은 ‘안 될 거다’라는 말없이 그렇게 응원해 주셨으면서, 다른 길을 선택한 아이들의 꿈에는 ‘힘들다’ ‘어렵다’ ‘안 된다’는 저주를 그렇게 거침없이 퍼부을 수 있는 것일까. 평범한 아이가 미친 듯이 공부해서 판검사가 되겠다고 하는 건 훌륭하고, 평범한 아이가 미친 듯이 노래해서 유명한 가수가 되겠다고 하는 건 헛된 꿈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한 아이의 부모가 된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아이는 어려서, 스스로의 삶의 무게를 온전히 감당하지 못한다. 아이가 완전히 단단하게 자신의 삶을 지탱해낼 수 있을 때까지, 부모는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야한다.

헷갈리는 일이다. 지금 어린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아이의 꿈이, 단순히 치기어린 것인지, 아니면 진지하게 자신의 삶의 방향을 결정한 기특한 것인지 부모들은 쉬이 알기 어렵다. 혹시 전자일까 두려운 것은, 부모라면 당연한 것이다. 네 꿈이 무엇이 되었든, 꿈이 확실하게 여물 때까지는 동시에 학업도 포기하지 말라고 조언해주는 부모님은 훌륭하다. 하지만 네 꿈이 헛된 것일 수 있으니 그 꿈을 키울 생각조차 하지 말고 학업에만 열중하라고 말하는 부모님은 문제다. 아이가 달고 있는 날개를 부러트려서 달리기를 시키는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무엇이 아이가 ‘성공하는 길’인지는, 아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공부, 좋다. 아직은 공부한 사람이 보다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세상이다. 하지만 편견을 가지진 말자. ‘공부만’이 유일한 길은 아니다. 공부가 통상적으로 가장 빠른 길이라고 해도, 자신의 아이에겐 정말로 세상에서 제일 힘들고 느린 길일 수도 있다. 아이와 이야기하자. 아이만의 ‘가장 빠른 길’을 찾아주자. 꿈꾸는 아이들의 웃음이 지켜졌으면 좋겠다.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경희대 학생입니다. `위클리서울` 대학생 기자로 멋진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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