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염 밀어낸 천일염, 프랑스도 멕시코 천일염도 가라!!
자염 밀어낸 천일염, 프랑스도 멕시코 천일염도 가라!!
  • 승인 2013.04.08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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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철희의 바라래 살어리랏다> 소금이야기-2



# 곰소염전


사람은 소금 없이는 살 수 없다. 혈액에 포함된 0.9의 염분을 제외하더라도 신체내의 모든 조직과 세포들의 수분도 0.9%의 염분을 유지하고 있다. 혈액 뿐 아니라 땀, 눈물, 콧물 등이 짠 이유는 그 때문이다. 소금은 우리 몸에 들어와 음식물을 분해하고, 노폐물을 배설 처리하는 등 신진대사를 주도한다. 혈관을 정화시키고 적혈구의 생성을 도우며, 장의 기능을 높여서 단백질이 소변으로 빠져 나가는 것을 방지한다. 그리고 위장의 기능을 높여 소화를 돕고, 해독, 살균, 해열, 지혈작용을 하고, 세포 생성작업 등 신체 내에서 중요하고 꼭 필요한 많은 일들을 한다. 그래서 사람은 소금 없이는 살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인류는 어떤 방법으로 소금을 얻었을까? 물론 인류가 수렵·어로생활을 할 때는 동물(특히 내장에는 다량의 염분이 함유되어 있음.)에 함유된 소금성분을 자연스럽게 섭취했겠지만, 그래도 부족분은 소금기 있는 해조류를 먹는다든지, 풀을 태워 그 재를 먹기도 했다.

인류가 수렵·어로 생활을 하다 농사를 지으며 곡물과 채소류를 주식으로 하면서부터 더 많은 양의 소금이 필요해졌고, 이에 치열하게 소금 만드는 방법을 개발해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정착생활을 최초로 시작한 곳이 소금을 쉽게 얻을 수 있는 해안지방일 것이라는 것도 쉽게 추정할 수 있다.

그런가하면 소금은 식품의 저장 수단으로도 활용되었다. 특히 긴 겨울을 나는 한반도에서는 대부분의 먹을거리를 소금에 절여 저장해 두었다가가 두고두고 먹었는데, 굴비, 젓갈, 김치, 고추장, 된장, 간장 등이 그 대표적 식품들이다.


# 대벌리에서 본 염창산. 조선시대에는 나라의 소금창고가 지금의 계화면 창북리에 있어 마을 뒷산이 ‘염창산(鹽倉山)’이다.


이처럼 사람에게 없어서는 안 될 소금은 왕조의 성쇠를 좌우하기도 했다. 소금 염(鹽)자는 신(臣), 인(人), 노(鹵), 명(皿)의 낱자가 모인 것으로 이것을 풀이해보면 ‘소금을 그릇에 담아 신하가 깃발을 세우고 지킨다’는 뜻인데, 이는 소금의 권위와 전매를 나타내고 있다.

중국 하(夏)나라 때 이미 소금에 과세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춘추전국시대 제나라의 관중은 소금 전매제로 재정을 키웠다고 하며, 한(漢)나라는 사염과 밀매를 금했다고 한다. 영어 ‘Salt’의 어원은 라틴어 ‘Salarium’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군인들의 봉급이란 뜻으로 로마시대에는 관리나 군인들의 봉급으로 소금을 지급하기도 했다고 한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지금의 몽골 부근까지 북진해 소금호수인 염수(鹽水)를 정벌함으로써 북방의 패자가 될 수 있었다. 또한 고려 태조는 도염원(都鹽院)을 설치해 소금전매제를 시행하고, 국가 재정의 주요 원천으로 삼았다. 이렇듯 제염업은 예부터 국가의 주요 기간산업으로 내려왔다.

조선시대 문헌을 보면 서해안 곳곳 갯벌 한 자락에선 소금을 구웠다. 전북 부안의 경우만 보더라도 이중환은 그의 택리지에서 변산을 “…주민들이 산에 올라 나무를 하고, 산에서 내려오면 고기잡이와 소금 굽는 것을 업으로 하여…”라고 소개했다. 부안 노인들의 증언을 들어보더라도 예전에 변산반도의 전 해안은 한 발 건너 염막, 한 발 건너 어살로 이어졌다시피 했을 정도였다.


# 1920년대, 최남선이 내소사 가는 길에 무수히 산재한 염막(鹽幕)들을 보았다고 했는데 아마도 저런 모양이었을 것이다. 위의 염막은 고창군 심원면 사등마을에 김만수 씨에 의해 재현되었다.


# 전통소금 ‘자염’ 기능을 가지고 있는 김만수씨. 고창군 심원면 사등마을에는 자염을 생산했던 노인들이 몇 명 생존해 있다. 그 중의 한 분이 김만수 씨로 2008년 9월26∼27일 가마에 불 꺼진 지 60년 만에 불을 지펴 소금을 굽고 있다.


# 밤새 소금가마에 소금이 하얗게 내렸다. 노인은 뜬눈으로 가마를 지켰다.

자염 밀어낸 곰소염전의 천일염

조상들의 지혜가 담긴 전통 소금인 자염은 일제에 의해 선보인 천일염에 밀리게 된다. 갯벌을 써래질하고, 갯벌 한가운데 웅덩이를 만들고, 걸러진 함수를 퍼 나르고, 8시간 이상 불을 지펴 굽는 등 엄청난 노동력을 요구하는 자염은 드넓은 갯벌에 바닷물을 가두어놓고 햇볕과 바람에 증발시켜 만드는 천일염에 경제적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자염에서 천일염으로 바뀌는 이러한 변환기에 천일염의 짜고, 쓴맛에 적응하지 못해 고생들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천일염을 왜염이라고 부르는 노인들이 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우리나라를 강점한 일제는 서남해안의 드넓은 갯벌 곳곳에 염전을 만들고 천일염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부안의 곰소염전도 그 중의 하나다. 일제는 줄포항이 포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자 1942년에 범섬, 까치섬 등의 무인도와 곰소를 연결, 제방을 쌓아 육지로 만들고 곰소항을 축조하여 줄포항을 대신해 물자를 수탈해가는 한편 칠산어장의 어업전진기지로 삼았다. 그리고 제방 안쪽으로 염전을 축조하던 중 8.15를 맞아 중단하고 물러갔다. 그 후(1946년) 전북 지역 주주들이 모여 남선염업을 창업하고 95정보에 달하는 드넓은 염전을 완성하여 천일염을 생산해 오고 있다.

서해안의 광활한 간석지는 지형, 토질, 기후 등 천일염 생산의 적지로 꼽히는데, 특히 줄포만은 주위가 산지로 둘러싸여 있고 큰 강이 유입되지 않으며 인근에 공장이 없어 갯벌도 바닷물도 오염되지 않았다. 곰소 천일염은 바로 이 깨끗하고 영양분이 많은 바닷물을 사용하기 때문에 자염에는 견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쓴맛이 덜하고, 소금발이 가늘며, 특히 미네랄 함량이 높은 양질의 소금이다.

곰소염전에서 생산되는 천일염뿐 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서해안 천일염의 우수성은 근래 들어 속속 밝혀지고 있다. 2006년 9월 14~15일 영암군 삼호읍 소재 ‘호텔 현대’에서 열린 ‘천일염과 건강에 관한 국제심포지엄’에서 목포대 함경식 교수는 한국산 천일염의 미네랄 함량이 외국산에 비해 크게 높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함 교수는 국내산 천일염과 프랑스 게랑드 염전 천일염, 멕시코 천일염을 비교 연구한 결과, 칼슘은 1335ppm으로 다른 천일염에 비해 1.4~2.7배, 칼륨은 4226ppm으로 3.6~13.5배, 마그네슘은 1만2300ppm으로 2.8~25.5배가량 국산이 외국산 천일염에 비해 월등히 많았다고 밝혔다.



# 젓갈


 
줄포젓갈 명성 곰소젓갈로 이어지고…

요즈음처럼 교통망이 좋지 않고, 또 냉동?냉장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예전에는 대부분의 어획물을 염장가공하거나 젓갈을 담가 유통시켰는데 줄포만 곳곳에서 소금을 생산하기에 이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또 젓갈을 담글 때나 보관할 때는 젓독이 필수적인 바, 부안의 곳곳에서는 옹기를 구웠다. 줄포만의 어선들은 출어할 때 인근에서 생산하는 소금과 젓독을 싣고 나가 어획한 선어를 선상에서 곧바로 염장처리 했다. 바다에 나가 조업하고 며칠 만에 귀항하는 배의 싣고 간 젓독에는 젓갈이 가득 가득 채워져 있었다. 2000년 경 곰소의 젓배 관계자들에 대한 한 조사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①젓독은 외포의 옹기점에서 구입하였으며, 소금은 주로 곰소의 남선염업에서 사갔다. ②한 번에 젓독을 수백 개씩 싣고 나갔으며, 때에 따라서는 열흘 이상 배에 머물렀다. ③육젓을 많이 잡았으며, 어장은 주로 법성포앞의 칠산바다였다. ④젓독은 한말짜리였다. 소금은 서 되가 들어갔으며 고기를 잡는 즉시 젓갈로 담았다. ⑤젓배로는 안강망, 꽁댕이배가 이용되었으며, 운반은 상고선(商賈船)에 맡기기도 하였다. ⑥70년대부터 기계선, 발동기가 들어왔고 80년대는 드럼통이 사용되었다. ⑦80년대 중반부터는 젓독을 사용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조기파시가 열리는 봄철이 가장 바쁜 시기라 파시 때를 맞추어 젓독을 판다는 뜻에서‘파시를 쓴다’라는 관용어가 소통되기도 했다.<참고문헌=유승훈 ‘곰소만의 젓갈 생산풍습’, <민속학연구> 제8호, 2001>


# 천일염


# 대나무통에 서해안 천일염을 넣고 황토로 봉한 후 고온에서 아홉 번 구우면 소금이 녹아 용암처럼 흘러내린다. 전북 부안군 상서면의 개암죽염 모습이다.

곰소젓갈이 유명해지기 이전, 1960년대까지는 ‘부안굴비’와 함께 ‘줄포젓갈’이 명성을 날렸다. 줄포 어물전 거리를 따라 40여 점포가 젓갈 제조판매에 종사하고 있었다. 당시 줄포젓갈은 전북지역의 전주, 정읍, 익산 등지와 인근 시장으로 팔려나갔고, 멀리로는 서울 동대문시장으로도 팔려나갔다. 김장철에는 인근 지방에서 1일 수천 명의 부녀자들이 모여 들었다고 한다.

그 당시 줄포에서 판매되는 젓갈류로는 밑반찬용으로 새우젓, 갈치속젓, 밴댕이젓, 황석어젓, 갈치젓, 조개젓, 멸치젓, 꼴뚜기젓, 오징어젓, 잡젓 등이, 김치에 넣는 갈치속액젓, 멸치액젓, 까나리액젓 등을 판매했다.

지금 줄포에는 젓갈집이 두어 군데 있을 뿐이고 199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곰소젓갈이 본격적으로 전국적인 젓갈시장 규모로 성장하였다.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허철희 님은 자연생태활동가로 ‘부안21’을 이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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