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의복





‘의복’이란 좁은 의미로는 옷을 의미하지만 넓은 의미로는 옷, 모자, 신발, 가방, 장신구 등을 포함한다. 의복은 단순히 외부로부터 신체를 보호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다. 아마 인류의 초기에는 의복의 목적 중 거의 전부를 차지했을, 신체의 보호라는, 의복의 ‘기능적인 면’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그 비중이 줄어들어 왔다. 기능적인 면을 무시하기 시작했다는 뜻이 아니라, 의복에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의복은 다른 소비와는 달리 자신의 신체에 바로 접한다는 의미에서 다른 상품들보다 훨씬 자기 자신에게 가까운 소비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어떤 소비보다 ‘나’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해야 하는 소비라는 의미다. 예를 들어 문구점에서 노트를 살 때와, 의복을 구매할 때를 비교해보자. 노트를 구매할 때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나와 이 노트가 얼마나 ‘어울릴 것인지’를 고민하는 사람은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반면, 의복의 구매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내 모습을 떠올리고, 이것이 과연 나와 어울릴 것인지, 내가 추구하는 나의 이미지에 부합할 것인지 따져본다. 이는 의복이 나의 자아를 상징한다는 점을 반증한다. 의복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할수록, 의복을 고르는 일은 단순히 옷을 사는 것 이상이 된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옷을 구매하는데 비싼 값을 치르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으며, 좋은 의복을 통해 자신을 보다 나은 이미지로 표현해내고자 노력한다.

세상에는 의복에 굉장히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이 있고,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옷은 자신의 생각이 담긴다. 누구에게나 의복은 ‘의미’로 남는다.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좋은 의복이 인생에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명품족이든지, 의복은 값싸고 질 좋은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든지, 자신의 생각이 곧 옷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싸고 흔한 옷을 입는 사람은 분명 자신의 삶에서 의복이 차지하는 의미가 명품만을 고집하는 사람보다 적겠지만, 적어도 그의 옷차림은 ‘나는 겉치레 보다는 비용이 적고 효율적인 것을 더 중시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오랜 시간동안 자신을 자아를 표현해왔던 옷의 ‘추억’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차곡차곡 쌓여 하나의 지층을 이룬 나의 생각과 시간이 나와 함께한 익숙한 의복에 켜켜이 쌓여, 그것은 수많은 비슷한 옷들과는 완전히 다른 무언가가 되는 것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심지어 겉치레는 별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시간이 흐르면 의복은 단순히 재봉된 천 이상의 무엇이 된다. 값이 더 비싸더라도, 튼튼하게 재봉된 좋은 질의 옷을 선호하게 되는 이유도, ‘오래오래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의복 중 굉장히 특이한 특성을 지니는 것이 바로 ‘가방’이다. ‘빽’에 목매는 여성들도 흔할 만큼, 가방이 갖는 의미는 다른 의복보다 굉장히 상징적이다. 다른 의복들은 신체 일부에 착용된다. 재킷, 치마, 구두나 모자도 전부 신체의 어딘가에 부속되게 된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가방은 신체와 분리된 아이템이다. 온전히 나와 1:1 관계가 되는 유일한 의복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가방은 나의 ‘미니미’, 혹은 ‘아바타’인 셈이다. 뿐만 아니라 다른 의복에 비해 계절도 덜 타고, 수명도 훨씬 긴 편이다. 가방은 다른 의복보다 오랫동안 나의 아바타로서 날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나의 이미지(혹은 내가 보이고 싶은 나의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나의 의복생활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것이 바로 들고 있는 가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방을 고르는 것은 보다 신중해야한다. 그래서인지 가방만큼은 다들 명품을 선호한다. 나를 보여주는 것이 초라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일까. 명품 가방은 보다 값싼 다른 브랜드에 비해 고급 가죽을 쓰고, 오랜 전통의 노하우가 녹아 있는 꼼꼼하고 튼튼한 재봉과 마감 등으로 훨씬 오랫동안 허름해지지 않고 사용할 수 있다. 가방을 오랜 시간 튼튼하게 사용할 수 있다면, 나의 손을 타는 동안 보다 나를 닮아가면서 보다 효과적으로 나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아바타가, 나라는 인간의 향과 색을 담뿍 머금고 있다면 그보다 좋은 것이 더 있을까. 사람들은 오래된 나의 가방을 통해 나의 이미지를 ‘진짜 나’에 가깝게 인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비싼 명품가방도, 누군가에겐 ‘그 값어치’를 분명히 해낸다. 청년시절부터 써왔다는 중년의 수트케이스처럼 말이다. 수트케이스는 마치 완강했던 눈꼬리에 세월로 새겨진 주름처럼, 날카롭게 각진 모서리가 온화해져왔다. 그가 어떻게 나이 먹어왔는지 보여주는, 어쩌면 그 수트케이스는 이제 그 자신이 된 것이다. 세월의 무게를 버텨낼 수 있을 만큼 튼튼한 가방은 혹 비슷한 디자인의 다른 제품보다 수배 비싸더라 하더라도, 그만한 가치를 해내는 경우가 많다. 비싼 명품 백을 선호한다고 해서 마냥 ‘된장녀’라고 손가락질 받을 일은 아니라는 거다.

나는 학생신분으로, 지나친 사치는 지양하는 편이라 내가 들고 다니는 가방도 그냥 그런 정도지만, 고가의 가방을 사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이라면, 과장 좀 보태서, 인생의 일부를 함께할 파트너를 찾는 셈이니까. 그들에게는 고의 비용을 감수하면서 까지 질 좋고 튼튼한 가방을 구입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어쩌면 자신의 형편에 꽤 무리하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내 선배 중에도, 소유한 가방의 개수가 전부 다 헤아려도 2개밖에 없는 언니가 있다. 스물한 살 때부터 스물넷까지 줄곧 메고 다녔던 하나의 가방과, 스물넷 겨울에 들인 두 번째의 신참. 언니도 한참 신입생 티내며 파릇파릇한 스무 살 때는 그냥 저렴한 몇 만 원짜리 가방을 사용했었는데,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해지고 망가지는 것이 마음 아파 오래오래, 늙어 죽을 때까지(?) 쓸 생각으로 아르바이트 한 돈을 모두 투자해 가방 하나를 샀다고 한다. 그렇게 고르고 고른 가방은, 사실, 외형으로 볼 때는 티나게 브랜드명이 도배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때 한창 유행하던 스타일도 아닌지라, 나는 그게 그렇게 비싼 가방인지도 전혀 몰랐다. 하지만 많이 광나지 않는 검은색 가죽의 큼직한 리본모양 호보백은 그냥 언니 이미지와 굉장히 잘 어울렸다. 언니가 고른 옷들과도 맞춘 듯이 잘 섞여들었다. 몇 년이 지나면서, 언니의 취향과 스타일도 조금씩 달라졌는데, 이전까지는 원피스만 줄 곧 입던 언니였지만, 취업을 준비한 때문인지 옷차림도 전에 비해 각지고 단정해졌다. 그렇게 언젠가부터 아껴 쓰던 언니의 호보백이 자신과 겉도는 느낌이 들기 시작하더란다. 그렇게 언니는 두 번째 가방을 들였다. 역시 유행이나 브랜드보다는, 질 좋고 튼튼하면서 자신의 이미지와 맞는지 꼼꼼하게 따져보았다고 한다. 이전까지 쓰던 그 호보백은 이젠 자주 사용하진 않지만, 여전히 깨끗하게 보관하고 있다. 3년 동안이나 애지중지 아끼면서 사용했기에 어디 한군데 터지거나 망가지지도 않고 그 기간 동안의 추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가방. 언니의 옛날 사진엔 빠짐없이 그 가방이 함께하고 있고, 가끔 그 가방을 메면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웃음 짓게 된다고 한다. 2호기(언니가 이렇게 부른다)도 앞으로 1호기처럼 수많은 추억을 담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언니의 모습이, 어쩐지 참 좋아보였다.

비싼 가방을 사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캠퍼스의 학생들은 죄다 비슷한 가방만을 들고 다닌다. 브랜드 로고가 도배된, 유행하고, 비싼 가방. 자신에게 어울리는 것, 내 이미지를 잘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어떤 건지 고민해 보고 그 가방을 골랐을까. 글쎄 난 잘 모르겠다. 비싼 가방을 사는 이유는, 그만큼 그에게 가방이라는 것이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미’없이 비싼 가방을 사는 것은, 어떤 이유가 남아있는 건가. 거기에 남아있는 것은 오로지 가격밖에 없다. 누구나 알아보는 ‘가격’의 가방을 사려고 요즘 제일 유행하고 브랜드를 알아보기 쉬운 가방을 산다. 그 브랜드의 그 모델이 얼마인지 다들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다들 똑같은 가방을 메고 다닌다. 그 비싼 가방을 나의 개성을 표현하기 위해 산 것이 아니라니. 마치, 다들 어깨에 큼직하게 가격표를 메고 우쭐거리며 지나가는 것만 같다. 그걸 부러워하는 사람도, 그걸 과시하는 사람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값비싼 비용을 지불하고 얻는 것이 고작 ‘가격표’ 따위라면 조금 슬프지 않은가? 심지어 유행이 지나고 나면 그 가격표는 한물간 조롱거리가 되어버리고 마는데. 마치 ‘이 사람은 약 ’얼마얼마의 금액을 지불할 능력이 있는 사람임’이라는 표식을 ‘일정기간’동안만 착용할 수 있는 사용권을 바로 그 얼마얼마의 금액에 사들이는 사람들처럼, 참 의미 없어 보인다. 의복에 가치를 두고 있다면, 명품이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다. 진정으로 좋아 보이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같은 비용으로 인생에 정말 소중한 것을 얻을 수도 있고, 단지 한동안 반짝하는 가격표를 얻을 수도 있다. 선택은 개인의 몫이다.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경희대 학생입니다. `위클리서울` 대학생 기자로 멋진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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