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문지연의 나 홀로 동유럽 유람기> 1회-여행을 준비하며



빛바랜 공산정권의 흔적이 감도는 회색빛 도시. 과거 동유럽을 떠올리면 스치는 이미지였다. 동유럽에 대한 막연한 관심이 샘솟았던 이유도 신문지면에서 발견한 회색빛 전운 때문이었다. 전쟁의 긴장을 부인할 수 없는 한반도에 살면서 어떤 동질감이 자극된 연유였을 것이다. 동유럽 대부분의 국가에서 그 흔적이 사라진 뒤에도 필자의 머릿속에는 한동안 이와 같은 우울한 이면들이 뿌리박혀 있었다.
서유럽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발전했고 여행 지역으로 덜 조명 받고 있다는 호기심과 개척 정신 또한 여행지로 관심을 갖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동유럽 여행의 처음부터 끝까지 끊임없이 펼쳐진 도전은 또 다른 나를 만드는 그릇이 되었다.
독일을 시작으로 체코,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헝가리, 루마니아, 그리스, 터키에 이르기까지 9개국을 홀로 거닐었던 시간들을 꺼내어 본다.


# 미지의 세상 항해를 시작하며 맞는 첫 해. 세상 어느 곳에서도 반드시 동은 튼다.

소녀 감성 물씬하던 학창시절. 그때 그 시절에 접한 영화와 드라마 속 이탈리아 로마는 낭만이 꿈틀대는 장소였다. 은은하게 번지는 달빛 조명 아래 진을 치고 앉아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의 웃음이 머릿속에 절로 펼쳐졌다.

체코 프라하 역시 사랑의 대명사와 같았다. 왠지 모르게 그곳에 가면 옷깃을 스친 이와 사랑에 빠질 것만 같은 묘한 기대감이 휘몰아쳤다.

그리스 산토리니도 그랬다. ‘푸른 빛깔 바다에 취해 있다가, 우연히 고개를 돌렸더니 그곳에 과거 베갯잇을 흠뻑 적셨던 첫사랑이 자리한다.’ 잊고 살았던 첫 사랑과 재회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설렘에 한참을 들뜨고는 했다.

사랑 찾아 이역만리로 떠나보자는 막연한 들뜸은 유럽 배낭여행의 이유이자 소망처럼 마음 한편을 항시 붙들고는 했다.
물론 공허한 환영은 사회생활 시작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유럽 배낭여행을 상상할 때면  저도 모르게 입가에 가로로 번지던 웃음기도 싸악 가셨다. 사랑이고 낭만이고 별난 것이 뭐가 있겠느냐는 지극히 현실적인 냉소만이 자리할 뿐이었다. 먹고 살기 바쁜 일상, 사람 사는 곳은 죄다 같을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여기든, 저기든 잘 먹고 잘 사는 궁극적인 목표는 같을지언정 그것을 추구하는 방식과 과정은 판이할 것이 분명하다. 태고의 ‘다름’이 빚어낸 저마다의 문화를 눈에 담는 것이 마냥 신기하고 즐거운 이유가 이 때문이다. 내 삶의 영역 밖에서 만난 ‘다름’은 그래서 항상 즐겁고 신명난다.


# 체코 프라하 천문시계탑 위에서 바라다본 구시가지 모습. 오렌지색 지붕들이 인상적이다.

그리하여 또 한 번 확인하고 싶었다. 사랑 때문이 아니라, 다른 문화 속으로 스며들어가 일상탈출의 희열과 오감만족을 다시금 경험하고 싶었던 것이다.

더는 미룰 수도 없었다. 어느 덧 30대 중반. 6년 얼굴을 맞댄 연인과의 결혼을 차일피일 미뤘더니 어른들의 염려와 우려가 하늘을 찔러 더는 이런 저런 이유를 둘러댈 수가 없었다. 더욱 깊게 따지고 보니 결혼식을 올린 뒤, 삼신할머니의 은덕으로 곧장 2세를 갖게 된다면 내 인생을 잠시 출산과 육아에 맡겨야 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지금이 바로 여행을 떠날 적기였다.

고민 끝에 다시금 과감한 도전에 나서기로 했다. 동시에 익히 알려진 서유럽보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동유럽을 파고들어야겠다는 의지가 활활 타올랐다.

2011년 6월 23일 인천공항을 출발, 터키 이스탄불을 경유한 뒤 독일 베를린에 도착하는 비행기 표를 끊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비행기 표를 결제하는 순간에도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홀로 떠나는 동유럽 배낭여행, 잘 해낼 수 있을까. 아니 무사히 살아 돌아올 수는 있을까.’ 절반의 설렘과 절반의 두려움이 넘실댔다.


# 어두운 날씨 탓인가. 쓸쓸한 정취가 물씬했던 오스트리아 빈의 모습.

가장 먼저 나라와 나라를 이동할 ‘루트 짜기’에 나섰다. 베를린으로 들어가 이스탄불로 빠져나오는 큰 밑그림을 그려놓고 나라별 동선을 따져가며 세부 루트를 그렸다. 서른 번이 넘게 지우고 또 지우기를 반복했다.

체력이 받쳐주는 한 한정된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은 곳을 보자는 생각으로 동선을 그리다보니 일정이 얽히고설키기 일쑤였다. 서유럽처럼 대부분의 지역에 유레일이 깔려 있는 것이 아니어서 동선 짜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유레일이 닿지 않으나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구간에서는 때때로 항공편을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저가 항공사 사이트를 뒤져가며 유럽 여러 나라를 오갈 티켓 구매에 나섰다.

이때 엄청난 실수 하나를 저질렀다. 어찌어찌하다 영국 사이트에 들어가서 크로아티아 스플리트에서 출발,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도착하는 항공권을 구입했는데 영문 이름을 적어 놓는 곳에 실수로 이름 끝 글자를 빼놓고 말았다. 홍길동의 ‘동’을 뺐던 것이다. 그 놈의 맥주가 문제였다. 우리말도 아닌 영어를, 맑은 정신에 읽어 내려가도 모자랄 판에 맥주를 홀짝이며 설렁설렁했더니 그만 참극이 빚어지고 말았다. 글자 하나 빼 먹어 20만원을 통째로 날려 버렸던 것이다. 다음 날 업체 측에 전화를 걸어 한 시간 넘게 통화를 하며 환불을 요구했지만 직원은 “약관에 따라 돈을 돌려줄 수 없다”는 야속한 대답만 반복할 뿐이었다. 여행 준비 과정까지 통틀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저지른 엄청난 실수였다. ㅜ.ㅜ

인터넷을 통해 21일간 사용 가능한 83만 원짜리 유레일패스도 구매했다. 이 기간 동안은 무제한 탑승이 가능하다.


# 헝가리 부다페스트는 아름다운 야경으로 유명하다.

동선을 정하고 이동 방법 결정과 티켓 구매를 마치고 난 뒤에는 숙박 시설 예약에 나섰다. 한국어가 지원되는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나라별 숙소 예약을 시작했다. 늘 그렇듯 길을 잃고 헤매더라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기차역, 버스터미널 등 역과 가까운 숙박시설을 중심으로 하나 둘 예약을 진행해 나갔다. 

‘홀로 떠나는 배낭여행인데 너무 후진 숙소에는 가지 말자’는 생각도 뒷받침했다. 안전이 허술해 보이지 않는 곳도 우선순위 목록에 넣었다. 한편으론 ‘너무 저렴한 숙소는 20대 학생들에게 넘기자’는 여유만만한 생각도 했다. 물론, 유럽에서 만난 여러 대학생들은 필자보다 훨씬 부자들이었다. 발품을 팔아가며 밤낮없이 동선을 짜고 온갖 사이트를 뒤져 항공권, 숙박시설 등을 예약했던 필자와는 달리, 여행사에 100만원 상당의 예약 수수료를 건네고 여행에 필요한 모든 예약을 맡긴 학생도 더러 있었다. 흐흐, 머쓱했다.

숙박시설을 예약할 때 4일에 한 번 꼴로는 한인민박을 찜했다. 한국음식 외에는 투입을 거부하는 저 품질 위장이 걱정됐기 때문이었다. 현지 호텔, 호스텔, 게스트하우스 등을 예약 할 때도 아침식사를 제공하는 곳만을 찾았다. 한 끼 식사 값이라도 아끼기 위해서였다.

몇날 며칠 머리를 쥐어짜며 교통, 숙박 예약을 마치고 나니 드디어 여행을 떠난다는 사실이 실감됐다.


# 루마니아 브라쇼브 시가지의 모습이다.


# 유레일 패스를 끊으면 기차 이용시 일일이 표를 끊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없다. 객차에 오른 뒤 출발지와 목적지를 적은 패스를 역무원에게 보여주기만하면 된다.

숙박비를 포함, 현지에서 쓸 일일 경비를 대충 따져보니 보통 10만원을 예상하면 될 것 같았다.

예약과 충당해야할 경비를 계산하고 나니 자금 조달이 걱정됐다. 그리하여 아르바이트를 하나 더하고 주말에는 외부 원고까지 쓰며 눈썹 휘날리게 일에 매진했다. ‘4개월만 꾹 참으면 나 홀로 자유를 찾을 수 있을지니.’ 끊임없이 자위하며 아침 7시부터 밤 12시까지 고된 시간을 버티고 버텼다. 솔직히 중간에 그만 둘 수 있는 아르바이트였다면 여행이고 나발이고 중도 포기하고 싶을 만큼 고돼도 너무 고되었다. ‘하, 진정 내 몸을 이다지도 혹사시키면서 떠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내 안의 악마와 천사가 번갈아 얼굴을 들이밀며 정신과 육체, 가치관을 마구 뒤흔들어 놓았다. 그때마다 온갖 것을 예약할 때면 으레 쓰나미처럼 밀려 들어왔던 스트레스가 떠올랐다. ‘그 많은 것을 비교하고 고르며 받았던 스트레스를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 수가 있으랴. 안 가면 더 큰 후회가 쓰나미처럼 밀려온다. 더욱이 예약한 돈은 고스란히 돌려받지도 못할 걸! 그냥 가거라.’

마음속의 다툼을 거두고 다시 한 번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혼자 서도 얼마든지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팍팍 불어 넣으면서 말이다.

ohora88@naver.com<문지연 님은 언론인이며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습니다.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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