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문지연의 나 홀로 동유럽 유람기> 5회-체코 프라하 1편



빛바랜 공산정권의 흔적이 감도는 회색빛 도시. 과거 동유럽을 떠올리면 스치는 이미지였다. 동유럽에 대한 막연한 관심이 샘솟았던 이유도 신문지면에서 발견한 회색빛 전운 때문이었다. 전쟁의 긴장을 부인할 수 없는 한반도에 살면서 어떤 동질감이 자극된 연유였을 것이다. 동유럽 대부분의 국가에서 그 흔적이 사라진 뒤에도 필자의 머릿속에는 한동안 이와 같은 우울한 이면들이 뿌리박혀 있었다.
서유럽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발전했고 여행 지역으로 덜 조명 받고 있다는 호기심과 개척 정신 또한 여행지로 관심을 갖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동유럽 여행의 처음부터 끝까지 끊임없이 펼쳐진 도전은 또 다른 나를 만드는 그릇이 되었다.
독일을 시작으로 체코,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헝가리, 루마니아, 그리스, 터키에 이르기까지 9개국을 홀로 거닐었던 시간들을 꺼내어 본다.


# 프라하 구시가 광장에 위치한 구시청사. 1338년에 지은 건물이다. 천문시계로 더욱 유명하다.


학창시절 프라하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낭만이었다. 프라하에서 붓을 잡고 있노라면 시 한편을 막힘없이 술술 써내려 갈 것 같고, 툭하고 어깨를 찌르기만 해도 서정적인 노랫말이 우수수 쏟아질 것만 같았다. 풍류안에서 낭만을 즐기는 상상만으로도 소녀의 감성은 황홀지경이었다.

무엇보다 프라하는 ‘사랑’의 이미지가 가득했다. 처음 만난 사람과도 금세 사랑에 빠질 것 같은 느낌. 마주 앉은 여고생들은 사랑과 낭만을 주절주절 이야기하며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돌이켜보면 그때 영화와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던 모양이다. 훌쩍 커버린 뒤에는 그저 그때의 수다를 떠올리며 슬쩍 미소만 지었을 뿐이니 말이다.

베를린에서 이른 아침 기차를 잡아탔다. 유레일패스를 구입할 때 함께 받았던 타임테이블(열차 시간표)에 맞추어 기차역에 갔더니 정확한 시간에 열차가 플랫폼으로 진입하는 모습이 보였다.

5시간 조금 못되는 시간을 달려 프라하에 도착했다. 국경 통과 절차는 그저 역무원에게 유레일패스와 여권만 보여주는 것이 다였다. ‘나라에서 나라를 건너는 일도 이렇게 쉬운데, 한반도는 언제쯤이면 남에서 북으로, 북에서 남으로 쉬이 오갈 수 있을까.’

겨우 5시간을 달릴 뿐이었는데도 좀이 쑤셨다. 노트북에 저장해 온 영화도 보고, 글도 쓰면서 시간을 달랬지만 목적지까지는 마냥 아득한 느낌이었다.

바쁘게 달리던 기차가 서서히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소녀 적 아련한 호기심이 집중됐던 그곳 프라하에 닿았다.

프라하 중앙역을 벗어나 역전에 위치한 숙소로 향했다. 이곳 역시 한국에서 미리 예약했던 한인민박이다.


# 민주화 운동인 이른바 `프라하의 봄`의 무대가 되었던 바츨라프 광장이다.


민박집에 짐을 풀고 밖으로 나와 유로를 체코 화폐인 코루나로 바꾸었다. 환전까지 마쳤으니 이제부터 진짜 프라하의 품으로 파고 들 때다.

몇 걸음 걸어 나와 처음으로 마주한 곳은 바츨라프 광장이었다.

바츨라프 광장은 민주화운동인 이른바 ‘프라하의 봄’ 사건의 무대가 된 역사적인 장소다. 민주주의를 부르짖던 군중들이 희생당한 곳이다.

광장은 일반적으로 연상되는 둥그런 형태가 아니다. 은행, 카페 등 갖가지 상점이 좌우로 늘어선 대로의 모습이다. 이곳을 필두로 이후 유럽에서 수많은 광장을 거닐며 ‘광장에 대한 정의’를 다시 썼다. 이제까지 ‘여의도 광장’처럼 둥그런 형태의 넓은 공간이 광장인줄 알았는데, 유럽에서는 손바닥만 한 동네의 작은 공터도 광장이었다.

광장이 시작되는 곳에는 성 바츨라프의 기마상이 장엄한 모습으로 서 있다. 세계 10대 박물관으로 알려진 프라하 국립박물관도 자리해 있다.

바츨라프 광장에서 구시가지로 걸어 내려가다 보니 광고판에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소프라노 조수미의 체코 공연을 알리는 포스터였다.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찌나 반갑고 뿌듯하던지! 조수미를 바라보는 필자의 환한 웃음을 누군가 보았더라면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 정도는 되는 줄 알았을 것이다.ㅎㅎ


# 두개의 탑이 인상적인 틴성당과 구시가의 모습이다. 구시청사 꼭대기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구시가로 향하는 길목에는 엄청난 인파가 떼를 지어 다녔다. 현지인 보다 관광객이 더욱 많은 듯했다. 특히 각국에서 온 단체관광객이 눈에 띄었다. 이 중에는 국내 유명 여행사들의 깃발을 든 한국인 단체관광객도 무척이나 많았다. 특징이 있다면 관광객끼리 맞춰 입기라도 한 듯 비슷비슷한 아웃도어 옷을 걸쳤다는 점이었다. 훗날 헝가리에서 만난 한 한국인은 독일인과 나눴던 이야기를 이렇게 전해왔다.

독일인은 그에게 “한국 사람들은 유행 따라 옷을 참 비슷하게 입는다. 몇 년 전에는 죄다 골프웨어를 입고 다니더니 요즘은 모두 아웃도어 옷으로 갈아입었더라”고 했단다.

프라하에서 마주한 몰개성은 이후 방문한 유명 관광지에서도 톡톡히 느끼고는 했다.

아기자기한 카페와 인형극을 하는 소극장, 기념품 가게 등이 즐비한 좁은 골목길을 빠져 나왔다.

골목을 벗어나자마자 구시가 광장에 높다랗게 서 있는 프라하의 명물 구시청사와 천문시계가 시선을 끌었다. 명성대로 고풍스런 멋이 흘렀다.

천문시계는 1490년에 시계공 하누시가 제작했다. 시계가 완성된 뒤 그가 다른 곳에서 똑같은 시계를 만들지 못하도록 눈을 멀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 바츨라프 광장의 모습. 광장이 시작되는 곳에 성 바츨라프의 기마상이 장엄한 모습으로 서 있다. 좌우로 식당과 카페, 은행 등 다양한 종류의 상점이 늘어서 있다.


시계는 매시 정각에 울린다. 해골의 움직임을 시작으로 12사도들이 하나둘 나타났다가 사라진 뒤 정각을 알리는 울림이 광장을 가득 메운다.

20초가량 진행되는 이 장면을 목격하기 위해 진작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건물을 앞뒤좌우로 에워싸고 있었다. 저마다 하늘을 향해 목을 쭉 뺀 채로 시계 바늘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했다. 필자 역시 그 중에 하나였다. 찰나에 벌어질 쇼 장면을 놓치지 않기 위해 뚫어져라 시계 바늘을 응시했다.

드디어 쇼 타임.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여기저기서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카메라 셔터를 누르느라 바빴다. 댕~. 이윽고 커다란 종소리가 광장을 울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또 하나의 소리. “에이~.” 생각보다 싱겁게 끝이 난 쇼를 아쉬워하는 군중의 탄성이었다. 필자 또한 거창한 명성이 무색한 시계의 짧은 울림이 약간은 아쉽고 허탈했다. 그러나 멋진 시계를 눈으로 직접 감상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내친김에 시계탑에 오르기로 했다. 탑에 올라 주변을 둥그렇게 걸어가노라니 금방이라도 훅 떨어질 것 같은 아슬아슬함에 두려움이 밀려왔다. 고소공포증 때문이었다. 등줄기에 땀이 후루룩 떨어졌고 다리는 후들후들 떨렸다. 그러면서도 발아래 펼쳐진 주황색 지붕의 향연을 눈에 담느라 분주했다. 일정한 색깔로 끝없이 펼쳐진 중세풍의 건물과 지붕의 이국적인 아름다움에 연신 탄성을 내질렀다.


# 프라하의 명물 천문시계. 구시청사 탑에 달려있으며 천체를 상징하는 기호로 제작되었다. 시계공이 다른 곳에서 같은 시계를 만들지 못하도록 사람들이 눈을 멀게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탑에서 내려와 광장 끝을 향해 걸었다. 프라하의 또 다른 명물 카를교를 보기 위해서였다. 야경이 특히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다.

카를교 쪽으로 열심히 걷고 있다가 광장 한 편 상점이 늘어선 곳에서 예상 못한 장면을 접했다. 사람들이 쭈뼛쭈뼛 서 있는 곳을 비집고 들어섰더니 불과 50미터 앞에서 경찰이 건물로 조심스레 투입을 시도 중인 것이 아닌가. 이윽고 제복을 입은 경찰 몇 명이 자동차 뒤로 몸을 바짝 숨기며 공격 태세를 갖추고 건물로 조용히 진입했다. 범인과의 대치로 짐작되는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으로 짐작됐다. 흡사 영화 촬영 장면 같았다. 건물 안에서 총성이 울리지는 않을까 내심 걱정과 불안이 엄습했다.

다행히 10분이 넘도록 주변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멈추어 서서 상황을 보던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걱정 반 불안한 마음 반을 끌어안고 다시금 카를교 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ohora88@naver.com<문지연 님은 언론인이며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습니다.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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