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문지연의 나 홀로 동유럽 유람기> 7회 체코 프라하 3편



빛바랜 공산정권의 흔적이 감도는 회색빛 도시. 과거 동유럽을 떠올리면 스치는 이미지였다. 동유럽에 대한 막연한 관심이 샘솟았던 이유도 신문지면에서 발견한 회색빛 전운 때문이었다. 전쟁의 긴장을 부인할 수 없는 한반도에 살면서 어떤 동질감이 자극된 연유였을 것이다. 동유럽 대부분의 국가에서 그 흔적이 사라진 뒤에도 필자의 머릿속에는 한동안 이와 같은 우울한 이면들이 뿌리박혀 있었다.
서유럽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발전했고 여행 지역으로 덜 조명 받고 있다는 호기심과 개척 정신 또한 여행지로 관심을 갖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동유럽 여행의 처음부터 끝까지 끊임없이 펼쳐진 도전은 또 다른 나를 만드는 그릇이 되었다.
독일을 시작으로 체코,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헝가리, 루마니아, 그리스, 터키에 이르기까지 9개국을 홀로 거닐었던 시간들을 꺼내어 본다.



# 성 비투스 대성당은 웅장하고 화려한 첨탑이 특히 눈에 띈다. 남쪽과 서쪽 탑이 각각 100미터, 80미터가 넘는다.

이른 아침 숙소에서 제공하는 식사를 하고 다시금 잠에 빠져들었다. 유럽에 온 뒤 계속해서 강행군을 펼치다보니 어느새 체력이 바닥을 치달았다. 하루 종일 침대에 쓰려져 있고 싶은 마음뿐. 그러나 매일 같이 손님이 들어왔다 나가기를 반복하는 민박집에서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정해진 시간에 청소를 해야 하기 때문에 투숙객이 자리를 비워주길 바랐다. 숙소에서 마냥 쉬기에는 눈치가 보였다. 무엇보다 이역만리까지 와서 시간을 허비 할 수는 없는 일. 잠깐의 망설임 끝에 결국 정신을 재무장하고 밖으로 나갈 채비에 나섰다.

숙소를 빠져나와 트램을 타고 프라하의 대표 명소 가운데 하나인 프라하 성으로 향했다. 프라하 성은 전날 밤 찾았던 카를교 건너편 언덕에 우뚝 솟은 궁전이다. 길이 약 570m에 폭 128m로, 9세기부터 만들기 시작해 14세기 때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1918년에는 대통령 관저로 썼으며 지금도 일부는 집무실 등으로 쓰고 있다.

궁전의 입구는 근위병이 지킨다. 매일 오후 12시에 위병 교대식이 열리는데 시간을 제때 맞추지 못해 그 장면을 보지는 못했다. 아쉬웠다.


# 아름답고 화려한 성 비투스 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

경사면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니 구시가지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빼곡하게 모여 있는 중세풍 건물과 주황색 지붕들이 밝은 태양빛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였다. 지붕 위에 예쁘게 꼬아 놓은 은줄을 걸쳐 놓고 그 위에 은빛 가루를 한 움큼 뿌려 놓은 것처럼 말이다.

허나 유럽의 어느 도시든 높은 곳에만 올랐다하면 마주하던 주황색 지붕인지라, 이제는 처음처럼 입이 떡 벌어지는 떨림 따위는 없었다. 흐흐

프라하 성은 화려한 외관만큼 내부 역시 발을 디디는 곳마다 고혹적인 아름다움이 물씬하고 볼거리가 풍성했다. 성 안에는 통치자가 사용했던 로브코위츠 궁전 외에도 성 비투스대성당, 성조지바실리카, 성십자가교회, 수도원 등 여러 부속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 언덕 위에 우뚝 솟은 프라하 성. 9세기부터 만들기 시작해 14세기 때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사진은 카를교 쪽에서 바라본 모습

성 안을 돌다 눈앞에서 장엄한 자태로 우뚝 솟은 건물과 마주했다. 성 비투스 대성당이다. 성당의 섬세하고 정교한 외관을 마주하는 순간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웅장하고 화려한 첨탑 때문이었다. 남쪽의 탑은 100미터에 달하고 서쪽 탑은 80미터가 넘는다.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의 스테인드글라스 또한 신비로움을 자아냈다.

11세기 때부터 짓기 시작한 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양식을 버무리며 20세기 들어 드디어 끝을 맺었다.

고개를 쳐든 상태로 성당 주변을 한 바퀴 돌자니 쏟아지는 자외선에 망막이 익는 느낌이었다. 성당 앞 작은 노천카페에서 푹푹 찌는 더위를 달랠 25코루나 짜리 아이스크림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의자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삼키며 한참이나 신비로운 성당의 모습을 좇았다. 세월이 무색한 견고한 아름다움에 연신 탄성이 흐르고 또 흘렀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갈 곳 많고 볼 것 많은 프라하 성의 모든 것을 놓치지 않으려 바쁜 걸음을 재촉했다.


# 프라하 성의 야경. 한 폭의 유화 같은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한다.

걷다보니 파스텔 색을 자랑하는 아기자기한 건물들이 눈에 띄었다. 프라하 성의 또 다른 주요 볼거리인 ‘황금소 로’다. 황금소 로는 16세기에 형성된 마을로 금세공업자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황금소’라는 이름도 여기서 유래됐다. 한편으로는 난쟁이 마을로도 불린다. 실제 집 안의 모든 가구와 세간이 몹시도 작다. 저마다 다르게 꾸민 다양한 집안의 풍경을 보고 있자니 당시의 생활상이 고스란히 읽혀져 마냥 신기했다.

황금소 로는 후에 성을 지키는 포병들의 처소로 쓰였다. 여러 집에 각종 무기류 등이 전시돼 있는 이유다. 색색의 다양한 빛깔을 뿜으며 아기자기한 형태로 늘어선 또 다른 집들은 현재 인형 마리오네트 등의 기념품을 파는 가게와 전시관 등으로 쓰인다.

수많은 집 가운데 특히 유명한 곳은 소설가인 프란츠 카프카(1883~1924년)가 머물던 공간이다. 22번지 집으로, 카프카가 글을 섰던 곳이다. 그는 단출한 작업 공간에 머물며 여러 작품을 집필했다고 한다.


# 16세기 금세공업자들이 모여 살던 `황금소 로`


# `황금소 로`는 난쟁이 마을로도 불린다. 실제 집 안의 모든 가구와 세간이 몹시 작다.

학창시절에 수없이 들었던 그 이름도 유명한 카프카가 먹고 마시며 숨을 쉬던 작업 공간을 찾는다는 생각에 살짝 기대가 되었다. ‘그때 그 시절 그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았을까.’ 그러나 막상 가보니 카프카의 집에서 그의 손때와 체취를 직접 느낄 수는 없었다. 그가 집필했던 책만 진열되어 있을 뿐. 내심 아쉬웠다.

황금소 로의 여러 집들을 둘러보며 아기자기한 풍경에 빠져 시간 가는 줄을 몰랐고 이후에도 미술관을 훑고 수도원과 교회 등을 샅샅이 관람했다. 궁전의 방대한 규모 덕에 그 모습들을 천천히 훑으려면 하루를 꼬박 써야할 지경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머리 위로 더욱 강렬한 볕이 내리 꽂혔다. 땡볕을 가르며 한참을 걷고 또 걷다보니 등줄기에서 땀이 샘처럼 쏟아져 나왔다. 더위를 식히려 아이스크림을 하나 더 입에 물었지만 속수무책. 시간이 갈수록 쏟아지는 햇빛의 강도는 더욱 거세질 뿐이었다. 그것을 달랠 묘수란 딱히 없었다. 틈틈이 그늘을 좇는 수밖에.

한 뼘 그늘 아래 궁색하게 몸을 말아 넣고 있던 순간, 저 쪽에서 누군가가 막간을 이용해 짧은 인형극을 시작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프라하의 인형극이 기가 막히다니 잠시 휴식할 겸 가보자!’ 기대하는 마음으로 잘 쓰던 그늘을 누군가에게 내어주고 한달음에 달려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 `황금소 로` 22번지 집은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의 작업 공간이다.

의자에 걸터앉자마자 공연이 시작되었다. 한 여성이 홀로 여러 개의 인형을 들고 나오더니 연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느낌이 영 심상치가 않았다. 연습이 전혀 없는 아마추어 무대를 보는 느낌이랄까. 아니, 그 보다 더 했다. 급조된 것 같은 어설픈 실력이 계속해서 거슬렸다.

한 5분 쯤 흘렀을까. 무언지 모를 난해한 그 느낌은 곧 확신이 되었다. 공연에는 우리 식으로 철수, 영희, 영수 등 다른 얼굴을 한 여러 인형이 등장했는데 이를 연기하는 여성은 하나 같이 똑같은 목소리와 말투를 읊조렸다. 마치 한 사람을 보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인물에 따라 말투, 목소리, 성격 등을 달리해야하는 기본을 깡그리 무시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인형을 움직이는 연기자의 연기가 지루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너무하다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무대 주변을 감싸고 있던 관객들이 하나 둘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뒷줄 사람들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조용히 자리를 뜨는 중이었다. 필자의 인내심 또한 10분이 안 돼 바닥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그래, 싼 게 비지떡이라고 하지 않았나. 하물며 공짜 공연인데 뭘 바라. 돈 주고 재밌는 공연 찾아보자.’ 그래도 섭섭한 마음을 단박에 털어버릴 수는 없었다. 아쉬움을 머금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프라하 4편 다음 호로 이어집니다.>

ohora88@naver.com<문지연 님은 언론인이며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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