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모든 순간들 하나하나 후회 없는 사랑으로 추억되길…
그 모든 순간들 하나하나 후회 없는 사랑으로 추억되길…
  • 승인 2014.02.05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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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어느 영화 그리고…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테지만, 나름대로 유명한 영화다. 여주인공인 마리아나와 남주인공인 마틴이 부에노스 아이레스라는 도시에서 만나 사랑에 빠지기까지를 다른 로맨스에 비해 객관적으로 그려내는 영화.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이 영화를 봤든, 못봤든, 어쨌거나 그건 별로 상관없다. 이 영화에는 반전도 없고,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도 않는 로맨스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글은, 완전한 타인이었던 두 사람의 교집합이 커지다가, 결국 마주치게 되기까지를 그리는 영화를 본 ‘나의 소감’이다. 영화는 재미있으니, 시간이 괜찮다면 한번 보는 것도 낭비는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보지 않아도 상관없다. 내가 하려는 얘긴 영화 이야기인 것만은 아니니까.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이라는 제목은 마치 ‘굉장히 희박한 확률’이라는 뉘앙스를 풍기지만, 사실 마리아나는 특별한 여주인공이 아니라 마치 일반인 그 자체다. 타인과 나의 교집합이 있다는 사실은 하나도 특별할 것이 없는 사실이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카페 안에도, 내가 전혀 모르는 타인들이 이 시간과 이 공간을 교집합으로 공유하고 있으니까. 도시라는 배경 안에서 계속되는 둘의 교집합과, 그것을 알아채게 되기까지의 희박한 확률. 이는 아직 타인으로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확률이고, 그 희박한 확률이 실제로 일어나는 건 딱히 드라마 속 여주인공이 아니라도, 사회적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 모두 경험하는 일이다.





나는 이 로맨스 영화가, 남녀주인공이 만나는 일을 그렇게 운명적이고 특별하고 드라마 속에나 가능한 환상적인 일로 꾸며내지 않았다는 것이 좋았다. 예컨대 마리아나가 전 남자친구와 헤어진 이유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그런 이유 때문에 마리아나가 꿈꾸는 새로운 남자의 덕목을 마틴이 갖추고 있었다는 식으로 묘사했다면 그들의 우연한 만남과 서로를 알아채지 못하는 상황이 더욱 안타깝게 느껴졌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마리아나가 전 남자친구와 헤어지게 된 이유는 완전히 구체적이지 않다. 어째서 종착역이 마틴이어야만 했는지 역시 완전히 구체적이지 않다.

마틴을 만나기 전에, 잠깐 만났던 남자가 더 이상 연락을 해오지 않자, 연락을 기다리던 마리아나는 눈물을 흘린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반드시 ‘마틴’이어야만 했던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 남자와의 인연이 거기서 끝났기에 결국 마틴과 사랑에 빠질 수 있었던 것이고, 그것이 스크린 안이기에 누군가는 ‘놀라운 사랑의 희소한 확률’로 받아들일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현실에서는 당사자들만 운명이라고 꺅꺅댈 하찮은 이유임에 틀림없다.

나는 지금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연애를 지속 중이다. 영화를 보고 조금 놀랐다. 나 역시 근래에 이 오랜 연애의 끝을 생각하고 있다. 영화의 시작, 4년의 연애를 마친 마리아나처럼, 그 생각은 몇 년 동안 나도 모르게 켜켜이 쌓여, 어느 날 아무렇지도 않은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등장했다.

남자친구는 내 앞에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나는 그 옆에서 내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전날 싸우긴 했지만 어쨌거나 늘 그렇듯 화해를 했었고, 앙금이 남긴 했어도 그 찌꺼기가 흙탕물처럼 부유하고 있진 않았다. 남자친구가 핸드폰에 집중하고 있다는 게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 순간, 나는 바뀔 수 없는 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남자친구는, 내게 특별한 사람이다. 사람에게 빠진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느꼈다. 가족을 제외한 사람과의 관계에서 안전거리를 늘 유지해오던 내게는 낯선 일이었다.

그냥 연애를 한다는 것과 사랑을 한다는 것이 다르다는 걸 알게 해준 친구다. 늘 무덤덤하고 시큰둥하던 내 연애의 첫 번째 반례였다. 나의 낯선 모습에 당황스럽고 무서웠지만, 동시에 정말 기뻤다. 청춘이 가기 전에 이런 경험을 해볼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연애를 시작한지 1년쯤 되었을 때, 나는 남자친구가 사실 나와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았다. 갈등이 생길 때도 최대한 침착하게 설명하고, 서로 경청해주려 노력하는 편이지만, 몇 시간을 이야기해도 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래도, 조금씩 고쳐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내 인생에 이만큼 사랑할 사람이 다시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 안 맞는다 하더라도 최선을 다해 서로 맞춰 보려했다. 애착이 있는 상태로 무언가를 고쳐보려 하는 것은 아주 힘이 드는 일이다.

그러던 중 남자친구는 대학을 중퇴하고 다시 대입을 준비했다. 나는 일 년간을 수험생의 어머니처럼 보냈다. 그러면서 생긴 보상 심리 때문에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남자친구와의 벽은 더 두터워졌다. 그 연애가 지금에까지 왔다. 그 오랜 시간동안 ‘나를 좀 생각해줘’ 하는 호소는 지치지도 않고 계속되었고, 남자친구는 그 긴 기간 동안 나의 그 호소를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서로 사랑한다는 걸 알고 있으면 되었지 왜 내가 우선순위여야만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나의 요구가 모든 일을 제쳐놓고 나에게만 집중하라는 뜻이 아님을 계속해서 설명했다.

내가 헤어짐을 생각하게 된 그 날의 전 날도 아마 그런 이유로 싸웠던 것 같다. 나는 일이 있어서 나와 연락하지 못하게 되는 것을 아쉽게 여겨주길 바랐고, 남자친구는 그것이 할 일이 있는데 못하게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몇 시간을 통화하며 서로의 오해를 풀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스마트폰을 보는 남자친구를 보는 그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나는 이제 지친 것 같다’ ‘최선을 다했으니 후회는 없다.’ 아무리 섭섭하고 속상해도 한 번도 말로 뱉은 적 없던 이별이, 그렇게 처음 내 입에서 나왔다.

2014년에는, 더 이상 내 인생에 이 친구가 등장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별이 수면위로 떠오른 지 한 달이 지났다. 그 시간동안, 이별을 전제로 우린 나름대로 교훈과 추억을 정리했다. 그리고 나는 일종의 놀라운 우연으로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영화 속에서 나는 마리아나를 만났다. 4년의 연애를 끝내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마리아나. 그리고, 곧 제대로 이별하게 될 나. 이 길었던 연애가 끝나고 나면, 나는 마리아나가 될까.

마리아나는 건축학도였다. 건축일은 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녀는 디스플레이어란 그녀의 일을 꽤나 사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그녀와 마틴과의 공통점보다, 마리아나와 나의 공통점에 더욱 몰입했다. 나는 검사가 되고 싶었다. 어린 시절부터의 꿈이었다. 법대에 진학한 것도, 고시를 준비했던 것도, 모두 검사가 되기 위해서였다. 휴학을 하고 고시공부를 했다. 나는 결과적으로 고시에 실패했다. 앞으로도, 아마 내가 검사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괜찮다 생각한다. 건축이 아닌 쇼윈도 디스플레이 일에도 열심인 마리아나처럼, 나도 아마 그렇게 될 것이다. 이루지 못한 꿈이 때로 입맛을 씁쓸하게 하겠지만. 나는 이미 이 부분부터, 마리아나가 되어있었다. 4년 사귄 남자친구와 갑작스럽게 헤어지는 모습도 나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아직은 헤어짐을 준비하는 단계의 나를 두고, 마리아나는 멈춤 없이 나아간다. 나는 마리아나를 통해, 남자친구와 이별한 뒤의 내 모습을 엿본다. 그렇게 마리아나는, 동거하던 전 남자친구와 함께 했던 집을 떠나 몇 년 만에 자신의 삶,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다. 자신의 집 욕실 거울에 비친 마리아나는 이미 미래의 나다.

나는 지금의 남자친구와 헤어지고나면, 앞으로 내가 몇 년을 더 살게 된들 이만큼 열렬하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다시 만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남자친구와의 연애는 내게 의외의 일이었다. 내 예상대로 마리아나는 한동안 새로운 사랑을 찾지 못한다. 하지만 결국, 마리아나는 마틴을 만난다.

극적인 우연이지만 이 둘의 만남이, 다른 로맨스처럼 ‘굉장히 특별한, 영화 같은 로맨스’처럼 느껴지지는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둘의 만남에 운명적인 필연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서로를 강하게 끄는 자석 같은 인력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전에도 우연히 마주쳤지만, 첫눈에 반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마리아나는 마틴을 만나게 된다. 이 부분이 마치 나나 내 주위의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을 것만 같은 ‘보편적인 사랑의 기적’처럼 느껴진다. 남들이 보기엔 하나도 특별할 것이 없지만 당사자에게는 영화처럼 특별한 기적. 그래서 이건 보통의 로맨스 영화와 다르다.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은 우연히 만나 첫눈에 반하고, 운명적인 이끌림으로 온갖 시련을 헤쳐내고 재회, 진한 키스 그리고 해피엔딩…. 이건 영화 속의 희소하기 그지없는 특별하고 극적인 사랑이다. 로맨스 영화 속 여자주인공과 현실의 나는 거리가 멀다. 반면 마리아나는 나이고, 또 당신일 수 있다. 마리아나는 운명의 필연성으로 마틴이라는 목적 의식을 가지고 마틴을 만나게 된 게 아니다. 마리아나는 단지 이별을 하고, 새로운 인연을 바라며 일상을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이다. 그리고 사랑을 만나는 사람이 모두 경험하는 ‘기적’으로 마틴을 만나게 된다. 남들이 보면 특별할 것도 없는 두 사람만의 기적.

마리아나가 마틴을 만나기 전에 만난 남자와 결국 사랑에 빠졌다면, 그와의 만남 역시 ‘기적’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그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결과적으로 마틴을 만날 수 있었고, 마틴과의 만남이 ‘기적’이 된 것과 같은 이치다. 현실에도 그런 기적들이 존재한다. 그날 그 버스를 타지 않았다면, 그때 지갑을 놓고 가지 않았다면, 그 친구가 해준다는 소개팅을 거절했더라면….

진정한 사랑은, 영화 속에 있지 않다. 극적이고 운명적인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아직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정의내릴 만큼 사랑을 잘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가끔 그런 상상을 한다. 내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어 죽음을 앞두고 있는 마지막 순간, 지난 삶을 돌아보며 그간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을 떠올리는 것이다. 그들을 떠올리면서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나는 그 순간 그 모든 사랑들이 하나하나 후회 없는 사랑으로 추억되길 바란다.

내 인생의 마지막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이 단 하나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내가 죽기 직전 떠올리는 모든 사랑들이, 모두 나의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연애는 끝을 맞이했지만 어쨌거나 마지막 그 순간까지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안타깝게도, 계속해서 사랑할 수 없는 사이가 되고 말았지만, 그래도 함께했던 시간들은 평생을 간직할 보석 같은 시간이었고, 마무리를 잘못해서 이 모든 시간을 후회로 망쳐버리고 싶진 않기 때문이다.

행복했던 순간은, 결과가 어찌되었든, 행복했던 순간이었음에 변함이 없다. 소중한 시간을 만들어준 그 사람에게 감사한다.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새해와 함께 다시, 시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여기, 또 다른 마리아나와 마틴이 있다. 영화가, 다시 시작된다. 마리아나는 마틴을 떠나고, 마틴은 마리아나를 떠난다. 영화의 말미에는 또 다시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마리아나와 마틴의 앞날에 축복을.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경희대 학생입니다. `위클리서울` 대학생 기자로 멋진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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