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유년시절을 더듬어 올라가다 보면, 항상 마음이 무거워지는 기억이 있다. 내가 떠올릴 수 있는 한, 가장 어린 시절의 외로웠던 기억. 어쩌면, 내가 살면서 가장 마음이 추웠던 기억이 그때가 아닐까 생각한다.

난 유독 내 유년시절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유치원을 다니던 시절이나, 초등학교 1학년 전반의 기억은 너무나 흐릿하게 남아 있다. 심지어 그때 당시 내 단짝친구였다는 아이를 훗날 만났을 때, 난 정말 눈곱만큼도 알아보지 못했다. 당시 내가 뭘 하고 놀았는지, 친구가 있긴 했는지, 사진으로 남겨져 있지 않은 모든 기억은 죄 단편적이고 뿌옇게 흐려져 알아볼 수가 없다. 다만 사진 속의 어린 내가 꽤나 밝아 보이고, 드문드문 떠오르는 기억도 슬프고 괴로운 것보다는 기쁘고 즐거웠던 기억이 대부분이라, 잘 기억하지 못하긴 하지만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내지 않았나 추측한다.

내가 떠올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슬프고 괴로웠던 기억이라고 해봤자 어린아이다운 소소한 것들이 전부인데다가(유치원의 수녀님이 낯설고 무서웠던 기억이라든지, 갈색 털이 북슬북슬한 스웨터가 마치 곰 같다고 느껴져 등교하기 싫었던 날의 기억이라든지) 어머니께서도 당시 내가 선생님의 예쁨을 받는 아이였다고 전해주셔서 아마 내 추측이 틀리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초등학교 1학년 말, 2학년으로 올라가기 직전에 우리 집은 이사를 하게 된다. 이사라고 해봐야 근처 동으로 옮기는 정도의 것이었지만(시간이 조금 걸려도 걸어갈 수 있는 정도의 거리), 어쨌든 그로 인해 나는 정든 학교를 떠나 다른 초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1학년 끄트머리에 전학을 오게 된 나는, 거의 충격적인 대우를 받게 된다. 당장 전학 첫날의 일이었다. 가방을 매고 새로운 담임선생님을 따라 내가 새로 소속하게 된 교실로 들어갔다. 어째서인지 선생님은 친구들 앞에서 날 소개할 시간을 주지 않으셨다. 게다가 자리를 배정해주지 않고, 일단 뒤에 서있으라고 지시했다. 당장 책상이 준비되지 않았던지 그런 이유였겠지만, 나는 새로운 친구들에게 나를 소개할 기회도 갖지 못한 채 참관인처럼 교실 뒤편에 멀뚱멀뚱 서 있어야만 했다. 금방 내 자리를 만들어 줄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나를 방치해 둔 채로 수업이 시작되었다. 이방인처럼 교실 뒤편으로 내몰린 나는 주눅 들고 어리바리한 상태였다. 감히 ‘저는 계속 이렇게 서있어야 하나요?’ 하는 건의를 할 생각조차 못한 채 그저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어린 내가 얼마나 참고 있었을지는 모르겠다. 내 기억과는 달리 아주 잠깐의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린아이들은 참을성이 부족하니까. 계속 이렇게 서있어야 한다면 매고 있는 가방이라도 내려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교실 뒤쪽에 있던 피아노 뚜껑 위에 가방을 올려놨다. 그 순간 내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시던 선생님이 별안간 소리를 지르며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대로 선생님은 내 뺨을 때렸다. 뺨을 맞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맞은 곳이 아프다는 생각보다, 씨근거리는 낯선 선생님과 날 보고 있는 낯선 학우들 앞에서 무언가 잘못을 저지른 이방인으로서의 두려움이 더 컸다. 울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피아노 위에 가방을 올려놓으면 어떡하냐고 혼이 났다. 뒤돌아서며 “웃긴 애야”라고 말씀하시던 선생님. 날 힐끔거리는 학생들. 무서운 기억이다.

그 날, 그 교실 안에서 나는 어떤 존재로 낙인찍힌 것만 같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계속해서 그 교실 안에서 겉돌았다. 다음날, 내가 전학 오기 전에 예정되어 있던 받아쓰기를 하게 되었다. 선생님은 예상대로 엄청난 호랑이 선생님이셨다. 받아쓰기에 나올 문제들을 유인물로 나눠주시고 시험에 틀린 개수대로 손바닥을 맞았다. 시험 직전 아이들에게 마지막으로 공부할 시간이 주어졌다. 나는 그제야 시험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선생님께 ‘나는 유인물이 없다’고 여쭈어 보았더니, 옆의 친구들이랑 알아서 보라고 말씀하셨다. 딱히 친구라고 부를 만큼 친한 존재도 아니었던 옆의 짝에게 유인물 좀 같이 봐도 될까 하고 물어보았지만, 회초리의 공포 앞에 짝 역시 그렇게 여유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나 봐야해’ 머뭇머뭇 나를 거절한 짝 옆에서 나는 어쩔 줄 모르고 그저 앉아 있었다. 한참동안 멍하니 앉았다가, 도저히 해결이 나지 않을 것 같아, 선생님께 다시 말씀드렸다. 아무도 나와 같이 보려고 하는 친구가 없다고. 그때 내가 마주 해야 했던 선생님의 짜증이 가득한 얼굴, 니가 알아서 하라고 말하던 짜증난 목소리. 나는 자리로 돌아와서, 그냥 손바닥을 맞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었다.

이후에도 내가 관련된 모든 일은 내 짝에게 전적으로 일임하셨다. 심지어 그 친구는 무슨 일이 있든 매일 날 집에 데려다주어야 했다. 그런 책임에 부담을 느낀 짝은, 슬슬 나를 기피하기 시작했다. 그 아이도 선생님을 무서워했기에, 어쩔 수 없이 나와 함께 시간을 보냈지만, 결국 나를 굉장히 짐처럼 여기게 되었다.

나는 그냥 계속 주눅 들어 있었다. 한번 형성된 분위기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우리 교실은 전학 오기전의 우리 교실과 다르게 말소리 하나 없이 조용했다. 쉬는 시간이라고 해서 쉽게 나에게 호기심을 표시하는 친구도 없었고, 공식적으로 내가 ‘배려 받는 전학생’이 된 적도 없었다.

선생님과 모든 학급이 나누어 분담해야 했을 그 배려는 온전히 내 짝 혼자 다 짊어져야 했다. 내가 이 교실의 친구들과 친해질 수 있는 유일한 접점은 내 짝 뿐이었는데, 짝은 그런 나를 짐스러워 했다. 하나 둘, 알려줘야 할 것을 알려주지 않게 되고, 나는 그때마다 당연하게도 실수를 했다.

그 교실 안에는 내가 모르는 룰이 굉장히 많았다. 피아노에 손대면 안 되는 것도 그 룰 중 하나였다. 선생님은 내게 자주, “니가 바보야?”, “니가 물어봤어야지” 같은 말을 하곤 했다. 유독 예쁨 받던 학생이었던 나는 하루아침에 문제아로 전락해 버렸다.

한번은 받아쓰기가 끝나고 분단 별로 끝의 학생이 뒤에서부터 걷어오는데, 그중 내가 제일 늦게 거둬왔다고 뺨을 맞았다. 몇 번의 받아쓰기 시험이 있었지만, 제일 늦게 거둬오는 사람이 혼난다는 룰 따위는 없었던 것 같았기 때문에 나는 조금 억울했다. 이번에야 말로 나는 혼날 일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교실 안에 내 편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차마 말로 내 억울함을 표현하진 못했다.

하교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나는 전학 오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바보 같게도, 어렸던 나는 이 모든 일들을 어머니에게 조리 있게 설명하지 못했다. 뺨을 맞았다고만 말했어도 어머니께서 알아챘을 수 있었을 텐데, 나는 당시 선생님의 모든 체벌이나 꾸지람을 ‘혼났다’고 표현했었다. 초등학교 1학년답게 횡설수설 설명했으리라.

“어제 짝이 집에 데려다 줘야 했는데요, 걔 친구가 기다린다 그래서요, 근데 내가 집에 못가니까요, 넌 왜 아직도 길 모르냐면서 막 그래서요, 그래도 그때 걔랑 나무 있는데 까지 갔는데요, 그냥 그대로 쭉 가면 집이 나온다면서 중간에 걔가 갔는데요, 그대로 쭉 가니까요, 집이 아니라 밭이 나와 가지고요, 오늘 선생님한테 그거 말했더니요, 왜 길 알려주는데 못 찾냐고 혼냈어요.”

1학년의 말투를 생각해보면, 난 아마 이따위로 말했으리라. 어머니께서 귀 기울여 듣는다 해도, 알아들으셨을 리 만무하다.

나는 그 시간이 한 학기 정도는 되는 줄 알고 있었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거의 한 달쯤 되는 시간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나는 그 시간을 길게 느꼈던 것 같다.

반 전체가 나에게 냉담했던 그 경험 때문에, 나는 2학년에 올라가자마자 친구를 만들기 위해 과장된 행동을 했다. 남자애들의 행동을 따라했던 것 같다. 당시 남자애들이 쓰던 말투와, 그 애들의 놀이를 따라했다.

친구가 많이 생기고부터 그런 과장된 행동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말투 같은 것은 잘 고쳐지지 않았다. 그 전의 성격이 어땠는지 사실 기억이 잘 나진 않지만, 어머니 말씀으론 내가 2학년을 기점으로 치마를 절대 입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어쨌든 나는 이후 교우관계가 꽤 원만한 아이로 남은 초등학교시절을 잘 보냈다. 여자 친구든 남자 친구든 가리지 않고 늘 친구가 많았다. 4학년 때, 그 1학년 때 선생님이 다시 내 담임선생님을 맡았다. 1학년 때와 대조적으로 나에게 굉장히 잘해 주셨다. 다정하게 대해주셨다는 것이 아니라, 뭐랄까, 신용하는 편인 학생이 되었다고 해야 할까.

선생님은 기본적으로 아이들에게 관심이 그닥 없으셨다. 교실의 룰을 많이 위반하지 않는 학생들에게는 딱히 엄하게 하시지 않으셨다. 꾸지람을 듣는 일이 거의 없어지니, 자연히 신용하는 편인 학생이 된 것이다. 반면 자주 룰을 위반하는 학생들은 별 것 아닌 일로도 혼이 났다. 때로는 약간 화풀이에 가까운 행동도 하셨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많이 좋아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그리고 4학년 2학기, 한 친구가 전학을 왔다. 그 친구 역시 선생님에게 자주 혼이 났다. 나는 내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며 그 친구에게 잘해주려 노력했지만, 그 친구는 끝내 이 이상한 교실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 아이가 울면서 선생님에게 대들었던 게 지금도 기억이 난다.

“여기는 너무 싫어요. 전학 오기 전 학교로 돌아가고 싶어요. 내가 뭘 잘못했나요.”

울면서 외치는 그 애 앞에서 선생님은 짜증난 목소리로, “돌아가! 누가 오라 그랬어?” 라고 말씀하셨다. 결국 그 친구는 다른 곳으로 다시 전학을 갔다.

어린이를 가르치는 사람은, 지식이 얼마나 있는가 하는 것만을 기준으로 선정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그때의 기억이 얼마나 아프게 남아있는지, 난 아직도 모교를 찾으면 건물의 한쪽 귀퉁이에서 그때를 연상한다. 그 위에 5년의 기억이 덧씌워지고, 그 후로도 십년이 더 흘렀는데 말이다. 가끔은 그 선생님이 볼품없이 늙어 쇠약해진 때에 젊은 내가 선생님을 찾아가는 상상을 하곤 했다.

사실 아직도 용서가 되지 않는다. 선생님의 무관심과 그릇된 체벌이 나 말고도 얼마나 많은 인생들에 상처를 안겨주었을지 생각하면, 용서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마저 든다. 스물여섯이 된 지금까지도 고작 여덟 살 때의 짧은 한 달을 이렇게 시리게 기억하고 있는데…. 나는 그나마 그 기간이 짧았고, 금방 새로운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기에  어두운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었다. 참 다행으로 생각한다. 그 싸늘한 교실에서 한 학기를 지내야 했다면, 나도 다시 전학을 가야했던 친구처럼,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당시 우리가 아이들을 사랑으로 돌봐주던, 전학 오기 전의 담임선생님 같은 분을 만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윽박지르고 짜증내거나 손찌검하는 대신, 잘못을 자상하게 타일러주시던 선생님. 체벌이 선생님 개인의 감정과는 별개의 것으로 느껴지던 선생님. 어린이를 가르치는 사람이라면, 어린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교사라는 자리에,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 얼마나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지가 가장 중요한 자격이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내 친구들 중에서도 임용을 준비하고 있거나, 오랜 공부 끝에 임용에 붙은 친구들이 있다. 친구들아. 부디, 너희들은 사랑으로 아이들의 앞날을 밝혀줄 수 있는 교사가 되길. 누군가의 인생에 등불 같은 사람이 될 수 있기를.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법학전문대학원생입니다.>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