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나는 처음 보는 사람의 얼굴을 잘 구별하지 못한다. 묘하게도 그렇다. 특별히 관찰력이 부족하다거나 이미지를 기억하는 데 취약하다거나 한 것도 아닌데 얼굴 기억만큼은 나에게 어려운 과제다. 새 학기나 신입생 때 흔히 겪는 일로, 새로운 사람들을 한 서른 명 만나게 되면, 반갑게 인사하며 자기소개를 하지만, 내 눈엔 구별되지 않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서너 쌍 정도 존재한다. 인사했던 사람에게 또 인사를 건네고, 인사를 나눴다고 생각하고 그냥 지나치는 경우는 아주 허다하다. 훗날 개인적으로 친해지고 난 뒤에야 서서히 그들의 차이점이 눈에 들어오고, 나중에는 이들을 왜 헷갈렸던 것인지 스스로도 의문스러워 지는 것이다. 대부분은 전혀 닮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건 흡사 처음 쌍둥이를 만났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쌍둥이를 따로 따로 만나면, 두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 오해하기 쉽지 않은가. 때문에 생전 처음 보는 한쪽에게 아는 척을 한다거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알고 있는 것과 모순되는 대답에 혼란에 빠진다거나 하기 쉽다. 혹은 쌍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도, 내가 어제 마주쳤던 사람이 쌍둥이 중 어느 쪽이었는지 굉장히 헷갈릴 수밖에 없다. 그러다 나중에 쌍둥이 둘과 친해지고 나면, 서서히 다른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그 전까지는 가르마의 방향이라든지 얼굴의 점 위치라든지 하는 걸로 구별해야만 한다.




# 일러스트 정다은 기자 panda157@naver.com



나는 거의 동일성이 없는 사람들이 비슷하게 느껴진다. 이목구비의 구성이 다른 것은 알겠는데, 도무지 누가 누군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 처음엔 주로 안경테 색깔이나 가르마 방향, 소품을 외워 사람을 구별해야한다. 이건 나에게 조금 고민스러운 일이다. 대개 새로운 사람의 얼굴을 갑작스럽게 많이 익혀야 하는 경우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할 때와 맞물린다. 얼굴을 익히지 못하면 발생하는 사소한 문제가 많다. 가뜩이나 어리바리한 신입생에게 얼굴 익히기라는 막중한 과제가 하나 더 얹어지는 셈이다.

새로운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을 때, 70명의 동기들과, 140명(물론 140명 모두와 마주친 것은 아니지만)의 선배들을 한꺼번에 마주하게 되면서, 나의 뇌는 거의 과부하에 걸렸다. 삼분의 일 정도를 제대로 구별하지 못했다. 비슷한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세쌍둥이, 네쌍둥이가 몇 그룹씩 우글우글이다. 이제는 자주 마주치는 분들에 한해 거의 다 구별할 수 있는 것 같지만(사실 아직도 몇 명 남아있다.) 초반에 나와 밥 한 끼 먹기로 약속한 분이 누구인지, OT때 먼저 인사 건네주신 그분은 또 누구인지 대체 알 수가 없다.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든지 하면 아 그때 그분이 이 사람 이었구나 할 수 있을 텐데, 사람들은 한번 눈에 익었다고 생각하면 더 이상 ‘나는 ○○인데, 점심 안 먹었으면 밥 먹으러 갈래?’ 라고 말해주지 않는다. 당황한 내색은 하지 않지만 내 머리는 이 사람이 네쌍둥이 중 누구인지 구별해내기 위해 맹렬하게 가동된다. 물론 결국엔 뒤죽박죽이 되어 포기하고 만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그냥 눈앞에 사람 형체만 나타나면 인사하고, 헷갈리면 존댓말부터 하고 보고, 학생수첩을 늘 가지고 다니면서 단어장처럼 자주 들여다보곤 하는 식으로 나름대로 문제를 해결해보려 노력한다. 덕분에 한두 달이 지나고 나면 곤란한 일은 더 이상 새롭게 발생하진 않지만, 이미 발생한 곤란한 일들이 문제다. 당사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내 기억 속의 그 사람이 누군지 추적해 가는 수밖에 없다. 끝끝내 놓치고 마는 경우에는, 오해를 받게 되더라도 어쩔 수 없다.
이러한 내 고민을 친구에게 토로한 적이 있다. 누가 누군지 도저히 모르겠다고. 첫인상부터 실수투성이로 기억되는 것도 싫고, 가뜩이나 긴장할 요소들이 많은 신학기에 사람을 마주칠 때마다 긴장 잔뜩 한 상태로 마주친 사람들의 가르마나 안경테 따위를 기억하려고 끙끙거리고 나면 집에 돌아가서 완전히 뻗어버리고 만다고. 그렇게 끙끙 머리를 쥐어짜도 외워지긴 커녕 더 헷갈리기만 하는 둔한 기억력 덕분에 결국 상황은 해결도 되지 않고, 누굴 만나도 숙제를 안 해온 학생마냥 두근두근 혹시 실수하지 않을까 초 긴장상태. 너무 피곤한 나머지 학교에 올 때면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그리워지기까지 한다고. 내 푸념을 듣고 있던 친구는, 고작 그게 고민이냐는 얼굴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화제를 돌렸다. 너는 양반이지, 하고 본인의 고민을 토로하기 시작했는데, 글쎄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대수롭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그 이야기를 꺼내던 친구의 표정은 전혀 대수롭지 않았지만. 나는, 내 작지 않은 고민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겨버리는 친구가 꽤 야속했었다. 내 설명이 모자랐나 싶어 입이 근질근질 했다. ‘아니 이게 꽤 큰 문젠데 말야. 얼굴을 구별을 못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친구가 우와, 진짜 힘들겠다. 하는 반응을 보여주길 바랐다. 하지만 이미 화제는 다른 쪽으로 넘어갔고, 내 고통은 대수롭지 않은 듯 넘어가야 했다. 그리고 아마, 내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버린 친구의 고민에 대해서도, 친구는 야속해 했을지도 모르겠다. 서로의 고통은 작은 것만 같고, 내 고통은 큰 것이 자명하니, 우리는 알아주지 않는 서로를 야속해하며 서로에게 닿지도 않는 대화를 나눴다.

누구에게나 고통이 있다. 나이나, 성별, 주어진 상황에 상관없이, 누구든 크고 작은 고민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법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부유한 사람이라면 아무런 걱정이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외모로 고통 받는 사람들은 잘 생긴 사람을 보며 비슷한 생각을 한다. 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은, 건강해질 수 만 있다면, 그렇다면 지금의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누구나 걱정과 고민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 수는 없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은 고통이 없을까. 모든 걸 다 갖춘 사람들도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들의 고민은 우리가 볼 때는 배부른 소리처럼 느껴질지 모르나, 어쨌거나 그들에게도 고민이 있고 나름의 고통이 있다. 심지어 해맑아 보이는 어린 아이들도, 제 나름대로는 심각한 고민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비록 그 고민이 어른의 눈으로 봤을 때는 고민할 만한 일인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어린 아이에게는 어린이의 나름의 사고와 세상이 있기 때문에 사소해보이거나 별일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일도 그들에게는 심각한 고민이 되기도 한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아픈 부분을 공감 받거나,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는 것 같다. 자신의 고통이 치부가 되어 숨기고 싶은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공감 받고자 하는 욕구가 주변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가로막혀 미처 밖으로 표출되지 않을 뿐, 심리 저변에서는 그런 욕구가 사라지지 않고 깔려 있다. 익명의 공간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걱정과 고통, 고민에 대한 이야기가 늘 끊이지 않고 북적이는 것은 아마 그런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말. 사실 타인을 이해한다는 말처럼 오만한 말이 있을까. 우리는 모두 자신의 한계 밖의 생각을 하지 못한다. 타인의 삶, 그들이 갖은 고통을 이해한다는 말은, 그저 자신의 입장에서 그 고통에 대해 자신만의 해석을 내놓는 것에 불과하다. 인간은 완전히 독립된 섬이다. 타인과 닿을 수 없는 독립된 섬. 세상은 나 자신으로 가득 차 있다. 타인은, 나와 연결된 단면으로만 내 세상에 존재한다. 내가 그러하듯, 타인에게 나란 존재 역시 그들의 삶에 맞닿은 나라는 단면일 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공감을 욕망하는 존재다. 나의 존재가 단순히 단면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 갈증을 느낀다. 나의 고통을, 그 고통과 상관없는 사람들이 온전히 공감해주길 바라는 존재다. 우리는 이러한 바람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타인의 같은 바람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헤아리고 이해하려는 것은, 피상적이고 의미 없는 행동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고통을 공감받길 원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려 노력해야한다. 그런 노력은, 나의 세계를 좀 더 넓혀준다. 나라는 존재만 가득한 세상에서는, 나의 고통이 섬을 집어 삼킬 듯 덮쳐오는 해일 같이 느껴진다. 이런 고통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타인이 못내 섭섭하고 속상할 수 있다. 하지만 나부터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려 노력한다면, 더 이상 나의 세계는 망망대해에 덩그러니 존재하던 섬이 아니게 된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 막연하고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시작은 여기서 부터다. ‘타인의 고통을 과소평가 하지 않는 것.’ 나의 고통만큼, 타인의 고통도 귀 기울여 들어주는 것, 거기서부터 타인에 대한 이해, 내 세계의 확장이 시작된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기 시작한다면, 나를 잡아먹을 듯 괴롭히던 나의 고통도, 전과 같이 나를 괴롭게 만들진 못할 것이다. 어쩌면 나를 줄곧 괴롭히던 고통도 생각보다 작은 고민이었음을 발견하고 놀라게 될지도 모르겠다.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법학전문대학원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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