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사실, 네 탓이 아니야!
그건 사실, 네 탓이 아니야!
  • 박신영 기자
  • 승인 2014.08.20 09: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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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과거의 내가 원망스러울 때가 있다. 막연하게 괜찮다 괜찮다 넘어갔지만, 실은 전혀 괜찮지 않아서, 그런 것들이 갑작스럽게 빵 터져버리는 날. 주로 잠이 오지 않는 밤이나, 남과 비교되는 초라한 나를 발견한 때, 자신이 미봉된 것을 시위라도 하듯 실은 괜찮지 않았던 모든 걱정들이 우루룩 쏟아져버리고 만다. 앞날에 대한 막연한 고민, 과거에 대한 후회, 두려움, 무기력함, 우울함, 초라함. 평소엔 못 본 척 눈 감고, 이제부터 열심히 하면 되지! 꽤 긍정적으로 극복할 수 있었던 것 같은데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그런 날이면 뛰는 심장만큼이나 생각을 주체할 수가 없어진다.

아프니까 청춘이란다. 낮이 되면, 다들 아닌 척. 밝은 척, 걱정 하나 없는 척, 확고한 척들 하고 있지만, 사실 베갯머리에서 컴컴한 천장을 바라보며 불안으로 뛰는 심장에 어쩔 줄 몰랐던 밤을 한번쯤은 다 가지고 있는 청춘들이다. 4학년이 될 때까지, 졸업을 목전에 둘 때까지, 혹은 이 나이가 될 때까지 난 무얼 했나. 그런 소화시키지도 못할 자괴감을 주워 삼키면서 빨리 잠들었으면 좋겠다, 억지로 감은 눈에 힘이 들어가는 그런 밤. 갓 스무 살이 되었을 때는 우리들이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 일러스트 정다은 기자 panda157@naver.com



스무 살이 되기까지 우리는 대학입학만을 위한 레이스 위에 있었다. 삐끗함이 없이 ‘현역’으로 대학에 입학하게 된 스무 살들은, 몇몇 친구들이 다시 고3과 같은 1년을 보내기 위해 학원가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운과 성공에 안도하며, 눈앞에 펼쳐진 캠퍼스 라이프에 들뜬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신입생의 나날은 빠르게 지나간다.

금세 2학년이 되고, 처음으로 대학 후배들이 생기고, (학과 특성 상 나는 후배가 없었지만) 대학교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 질 때까지도 아직 갓 스무 살이 된 신입생과 다름없이, 대입을 무사히 넘긴 안도감 속에서 살고 있었다. 패배자마냥 학원가로 돌아갔던 친구들이 내가 다니는 학교보다 훨씬 좋은 학교에 입학한지도 오래건만, 근거도 없어진 우월감은 해가 떠오른 뒤에도 잠시나마 시야를 가리는 연무처럼, 어리석은 학생들의 두 눈을 가린다. 그때까지도 내가 다니는 학교 이름이 내 성실도를 대신한다.

다들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보다는 내가 어떤 학교에 다니고 있는지에 관심이 많다. 그렇게 대단한 대학도 아니건만, 나 역시 거기에 취해있었던 것 같다. 3학년이 되면, 안개는 걷히고,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남들은 차근차근 바쁘게 미래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을 동안 천지도 모르고 여유부리고 있었구나 싶다. 어찌저찌 지내다 보면, 곧 졸업이다. 이젠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던 대학의 무게가 나를 짓눌러 온다. 그간의 시간, 학비, 주변의 기대들. 이제 와서 적당한 곳에 취직하지 못한다면 어쩐단 말인가.

대학원에 입학하고, 이런 고민들도 몇 년 후로 다시 미뤄졌지만, 내 주변엔 여전히 이런 고민에 휘청거리는 젊은 친구들이 많다. 다들 비슷한 자괴감을 가지고 있다. 그때 내가 그렇게 노는 게 아니었는데. 그 때 공부를 더 했어야 했는데, 그때 스펙을 더 쌓아 뒀어야 했는데. 대학원에 입학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도 같은 생각으로 괴로워했었다. 나의 현실이, 모두 내 잘못인 것 같고, 지나간 날들이 모두 내가 멍청했던 탓으로 생각되었다. 제 앞길을 잘 찾아가는 친구들을 보면, 다들 1학년 때부터 열심히 준비했던 것 같기에, 그들의 성공과 비교해 손에 쥐어진 것이 하나도 없는 나는 탓할 대상이 나 자신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자괴감에 빠져있어서는 나빠지기만 할 뿐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이며 조금씩 차근차근 준비해보려 해보아도 가끔 찾아오는 밤에는 모든 게 이미 늦은 것만 같았다.

한번 잃은 자신감은 쉬이 회복되기 어렵다. 아무리 씩씩한 친구들이라도, 고작 몇 개월, 일이년 늦는 것에 자아를 많이 다친다. 날 믿어주는 사람들에게 미안해서라도 부담은 점점 커지는데 반해 여유는 점점 사라진다. 자존감이 굉장하던 친구 입에서 ‘취집’이라는 단어가 나올 만큼, 그 시간은 사람을 많이 작아지게 만든다.

생각해보면, 오늘의 사회는 젊은 사람들에게 너무 가혹하다. 졸업 후에도 앞길이 분명치 않은 청춘들이 자기 자신만을 탓하게 되는 건, 아마도 졸업과 동시에 곧장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 친구들은 내가 알고 있듯, 보다 많이 준비했고, 보다 많이 참았고, 보다 많이 도전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에 비해 나는, 그들만큼 잘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만큼 노력도 하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이런 막막한 현실은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잘 생각해보면, 나 역시 전혀 아무 노력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막막한 불안이 나를 덮쳐 올 때면 생각의 흐름은 굉장히 부정적으로 흘러 모든 것이 내가 한심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자책하게 되지만, 사실은 기준 자체가 너무 높다는 사실을 간과하게 된다. 나는 경쟁사회에서 빠릿빠릿하게 준비되어 있던 친구들만큼 성실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태한 사람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취준생들이 그렇다. 전국의 수험생 전체에서 상위 10%가량의 학생들만이 소위 ‘괜찮은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 그 안에서 나쁘지 않은 학점을 받는 건 꽤 성실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나쁘지 않은 학점을 받는 학생들은 제시간에 출석하고, 과제를 하고, 전공공부를 하고, 시험을 치고,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들을 대부분 성실하게 해낸다. 사실 우리가 지금껏 배웠던 건 그것뿐이었다. 시키는 것들, 주어진 것들을 성실하게 해내는 것. 학점을 어느 정도 만들고 나면 영어나 필수적인 스펙을 어느 정도 만들어야 한다. 학생들 대부분이 그 정도를 해낸다. 하지만 이런 저런 ‘시키는 것들’을 해내고 나면, 그것은 당연한 것일 뿐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내가 만들어낸 ‘당연한 것’들 외에, 그 이상의 것들을 준비한 사람들이 차고 넘친다. 심지어 내가 만들어 낸 것들도 남들에 비해서 썩 훌륭한 것도 아닌 것에 불과하다. 아무런 경쟁력이 없다. 이상한 일이다. 대한민국의 교육과정을 성실히 밟아 그 중에서도 선별된 인재들이,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해서도 경쟁력이 없다면, 그건 뭔가 시스템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인데, 다들 스스로의 탓을 한다. 이런 사회에서도 경쟁력을 갖춘 사람들은 분명 존재하니까. 그들에 비해서 노력이 부족했다며, 자신이 해낸 것들을 깎아 내리며, 무능한 자신만을 탓한다. 사회도 그런 젊은이들의 무능을 비난한다. 생각이 없고, 기계적이고, 성실하지 않다고. 어째서 교육과정을 성실히 밟은 우리들이 수동적이고 기계적인 생각밖에 할 수 없어진 건지에 대한 의문은 온데간데없이, 모든 책임을 젊은이 개인에게 뒤집어씌운다.

근거는, ‘잘 해내는 사람도 있다.’는 것. 덜 열정적이고 덜 성실했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비난하고, 사람들은 그 비난에 설득당하고, 비난을 당하는 당사자 역시 그에 수긍하게끔 만든다. 아무리 당찬 젊은이도 버텨내기 어려운 압력이다. 보통 이상의 인재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뛰어나지 않고서는 취직도 할 수 없는 현실은 분명 잘못이라고 목소리를 내는 학생들에게는 스스로의 노력이 부족한 것에 대한 변명을 사회로 돌리고 있다며 혀를 찬다. 학생들은 결국 어두운 방안에서 잠이 들지 못하는 밤과 싸워야만 한다. 조용히, 그렇게 스스로와 싸운다.

우리의 탓이 아니다. 아프니까 청춘인 게 아니라, 청춘을 아프게 만든 여기가 잘못되었다. 뛰어나지 못하면 모두 누락시켜 버리는 게, 비정상적으로 높은 기준을 갖춰야만 보통이 될 수 있는 사회가, 어찌 정상이라 할 수 있겠는가. 시키는 대로 공부만 하는 고분고분한 학생들을 선별해놓고서는, 막상 그 학생들에게는 가르치지도 않은 열정을 요구한다. 대학도 열정을 가르치지 않는다. 교수님도 선배들도 사회도, 커다란 취직학원같다.

우리는 성실한 것밖에 할 줄 모른다. 그저 열심히 하고, 그래도 안 되면 더 해내지 못한 스스로를 탓하는 것밖에 할 줄 모른다. 나는 우리가 너무 안 되었다. 안타깝고 아프다. 우리가 이렇게 불합리하게 아파야하는 게 너무 안쓰럽다. 어릴 적엔 날개를 잘라 교실에 가둬두더니, 성인이 되니 멀리 날아가지 못한다고 한심해한다. 그제야 깨닫는다. 날지 못하는 새는 새로서 가치가 없구나. 날개 끝이 잘린 새들은 열심히 짧은 날개를 퍼덕 퍼덕거린다. 그나마 가장 많이 퍼덕거리고, 가장 멀리까지 추락하지 않는 새만이 보통의 삶을 살 수 있다. 그래봐야 여기에 하늘을 나는 새는 없다. 잘린 날개로는 하늘까지 닿지 못한다. 불쌍한 새들. 우리는 하늘이 뭔지도 모른다. 하늘을 꿈꾸는 새가 하나도 없다. 누가 더 오래 퍼덕일 수 있는지만 고민할 뿐이다.

새가 날지 못하게 된 건, 새의 탓이 아니다. 날개를 가진 새로 태어났는데, 날지 못하는 것이 어찌 새의 탓이겠는가. 청춘은 하늘을 날아야 하는데, 청춘을 아프게만 보내고 있는 우리들이 눈물겹다. 바보같이 모두 내 탓이라며 자책하고 있는 우리들을 보듬고 싶다. 사실, 네 탓이 아니야.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법학전문대학원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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