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 것 빼고 다 해본 지난 10년 묻어둔 채 앞으로 10년 더 싸워야할 지도”
“죽는 것 빼고 다 해본 지난 10년 묻어둔 채 앞으로 10년 더 싸워야할 지도”
  • 최규재 기자
  • 승인 2014.11.15 11: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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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획: ‘해지지 않는’ 해고노동자들 농성장을 찾아서-1> ‘10년 투쟁 끝 또 다시 단식 돌입’ 코오롱 정투위 최일배 위원장


2005~2006년 2년간 코오롱노조의 극한투쟁은 한국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다. 최일배 코오롱노조 정리해고투쟁위원회(정투위) 위원장은 2006년 당시 정리해고에 반발, 서울 성북동 이웅렬 회장 자택 앞에서 농성을 벌이다 구속되기도 했다. 이후에도 투쟁은 계속되었다. 철탑농성, 단식농성, 불매운동 등 10년간 안 해본 투쟁이 없다. 투쟁 10년, 최일배 위원장은 경기도 과천에 위치한 코오롱 본사 앞에서 또 다시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힐 만큼 긴 시간이고, 지칠 대로 지쳤지만 이대로 멈출 수는 없다. 생계문제, 개인사유 등으로 10년 전 50명이었던 정투위는 12명으로 줄었지만 아직 포기할 수 없다. 2년 전 쳐놓은 천막에서 ‘단식’이란 극한의 투쟁을 이어가고 있는 최일배 위원장을 만나봤다.






무기한 단식 들어갔지만…

“10년, 참 긴 시간이다. 이렇게 버티고 있는 건 가족들 덕이다. 고등학생인 큰 딸과 중학생인 아들은 여전히 아버지를 지지한다. 아내는 하루 15시간의 노동을 하면서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 그동안 함께 투쟁해오다 떠나간 이들도 많았다. 10년이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각자의 삶이 있지 않은가.”

10년간 길거리를 배회해야만 했던 해고노동자들의 심정은 당사자가 아니고선 알 수 없을 터. 최일배 위원장의 얼굴에선 사측에 대한 분노나 사회에 대한 불만은 찾아볼 수는 없었다. 너무 기나긴 시간을 버텨온 덕일까. 10년간 투쟁해온 노동자의 얼굴이라고 하기엔 너무 평온하게 보였다. 지난 5일부터 또 다시 단식농성에 들어갔지만, 단식이 무슨 대수냐며 멋쩍게 웃었다. 그는 10년 전 그날을 떠올렸다.

코오롱은 2005년 2월 78명의 노동자를 정리해고 했다. ‘경영부실로 인한 적자’가 구조조정의 이유였지만 78명의 노동자 해고로 적자를 메우겠다는, 거대기업 코오롱의 행위는 누가 봐도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78명 해고해서 회사를 살리겠다?(웃음) 이웅렬 회장은 삼성의 무노조 경영을 옹호하는 입장이었다. 당시 노조는 민주노총에 가입돼 있었고, 구조조정을 단행해야 하는 회사 입장에선 노조라는 싹을 잘라내야 했다. 그래서 78명의 핵심 활동가들을 해고시킨 것이다.”

앞서 노조는 정리해고만은 막아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1인당 700만원이 넘는 연봉을 반납하겠다는 입장을 사측에 전달했다. 사측 역시 그 방법 밖에 없다며 합의했고, 정리해고는 없던 일이 되는 듯했다. 그러나 당시 노조 지도부와 사측이 밀월 관계에 있었다는 게 정투위의 주장이다.





“앞에서는 투쟁하는 척하면서 뒤에선 사측과 거래를 했다. 말이 민주노조지 어용노조와 다름없었다. 여기에 반발하는 노조 핵심 활동가들을 우선 잘라낸 것이다.”

이후 구미공장에서만 400여명, 총 1000명에 이르는 노동자가 정리해고 됐다. 정작 경영부실의 핵심 원인인 계열사 정리는 없었다. 그리고 사측은 강제퇴직자 중 400여 명을 비정규직으로 재고용해 똑같은 업무를 시켰다.

코오롱노조는 1988년에 설립됐다. 최일배 위원장은 1992년 입사와 동시에 조합원 자격이 주어졌지만, 노조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지내다가 1999년 7대 집행부 부위원장이 되고 나서야 뒤늦게 노동운동에 눈을 뜨게 됐다.

“97년은 코오롱노조가 민주노총에 가입한 해다. 당시만 해도 사측은 노조에 대해 적개심이 없었다. 하지만 2004년 막상 경영 위기가 오니 노조가 그렇게 껄끄러울 수 없었을 것이다. 저는 해고당할 때까지 열심히 활동했다. 후회는 없다. 안타까운 점은 대량 해고 이후 코오롱노조가 민주노총을 탈퇴했고, 지금은 완전히 어용노조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지금 공장의 노동자들에게 물어보면 많이 답답해들 한다. 노조가 제 역할을 못하니, 사측이 시키는 대로 쥐죽은 듯 일만 한단다. 과거엔 회사 일이 곧 자기 일이라고 생각하며 일을 했는데, 지금은 그저 안 잘리고 월급만 받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출퇴근한다는 얘기다. 제품 생산이 제대로 될 리 있겠는가.”   

정투위는 정리해고 문제뿐만 아니라 이 같은 노동현실을 알리기 위해 10년을 달려왔다. 코오롱공장이 있는 경북 구미에서 2년 전 이곳 코오롱 본사로 올라온 데는 이제 이 긴 싸움을 끝내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다.

“우리가 여전히 싸우고 있다는 걸 모르는 경우가 많아서 알려야겠다는 개인적인 욕심도 사실 있었다. 구미에서 계속 투쟁하는 게 사측에 제대로 전달도 안 되더라. 본사 앞에 천막을 치는 게 우리 투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지 않겠는가. 그리고 서울에서 투쟁하는 이들과 공조하면서 이 국면이 개별사업장의 싸움만으로는 절대 돌파할 수 없다는 걸 또 다시 느끼고 깨달은 것도 있다. 저만이 아니라 현장의 많은 노동자들도 느꼈을 것이다. 공동투쟁의 의미에 대한 공감이 있었기에 수도권에 자리를 잡았다.”




‘불매운동’ 한때 반짝했지만…

오랜 시간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모르쇠로 일관하는 사측의 태도에 정투위는 지난해 ‘코오롱 불매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주로 산에 오르는 등산객들을 상대로 ‘불매운동’을 알리는 현수막과 함께 유인물과 삶은 계란을 나눠줬다. 코오롱을 대표하는 아웃도어 제품이기에 산을 선택했던 것. 효과는 적중했다.

“‘불매운동’ 문구가 적힌 조끼를 단체로 입고 등반하면 등산객들이 궁금해 했다. 등산하면서 이야기를 하다보면 대부분의 등산객들은 수긍했고 코오롱 제품은 사지 않겠다며 불매선언을 하는 등산객들도 있었다.”

길거리에서 유인물을 돌릴 때와는 환연히 달라진 반응. 코오롱 사측의 반응도 기존과 차이가 있었다. 지난해 3월 코오롱 측은 정투위를 상대로 전국 242개 매장과 설악산·북한산·지리산·한라산 등 국립공원 15곳, 무등산·칠갑산·태백산 등 도립공원 16곳, 명지산·천마산 등 군립공원 9곳 등 전국의 유명한 102곳을 지정, 가처분 신청을 냈다. 이와 함께 정투위가 매장을 비롯해 전국의 유명 국립공원에서 플래카드를 설치하고 피켓시위를 한다거나 유인물을 불특정 다수에 나눠주는 행위를 할 경우 하루 100만원을 법원에 내도록 청구하기도 했다. 당시 사측은 불매운동으로 인해 기업 신용과 명예에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어 가처분신청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오히려 이 같은 가처분신청 사실이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을 통해 알려지면서 정투위의 불매운동에 다시 불씨를 지피는 촉매제가 됐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불씨는 다시 꺼지고 만다. 

“기아차의 도움으로 코오롱은 다시 회생할 수 있었다. 수백억원에 달하는 코오롱 제품을 기아차가 사들인 것이다. 기업은 기업끼리 그렇게 서로 돕는가 보다. 거대 기업 앞에서 서민과 노동자들은 이처럼 나약할 수밖에 없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10년이 지나면서 정투위의 투쟁 목표에도 변화가 생겼다. ‘전원복직’이 승리인지조차 불분명해진 것도 사실이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고 마지막 마무리를 하는 것이 승리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싸움에서 승리라는 결과는 중요하다. 그런데 어떤 게 승리인지 되돌아볼 시간을 가졌다. 지금까지의 과정들이 소중하고, 남은 조합원들과 함께 마무리할 수 있다는 것이 의미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도 든다. 복직에 대해 집착하거나 연연하지 말자는 것이다. 무차별적으로 자행되고 있는 정리해고의 부당함을 알리고 이를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전원 복직을 목표로 투쟁을 시작했을 때만해도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속에서 작은 가능성과 희망이 보였다. 물론 절망적인 순간도 있었다. ‘그만하자, 답이 보이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결론은 늘 ‘조금만 더 해보자’였다.

“조그만 냇가를 건널 때도 돌다리가 필요하다. 우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해서 돌다리를 완공하면 좋겠지만 실력이 부족하면 그중 몇 개의 돌이라도 놓아야 하는 게 우리 의무다. 최종 완성은 우리 뒤에 다른 누군가가 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 아무도 시작하지 않는다면 돌다리는 아예 생기지도 않을 것이다. 언젠가 마지막 순간이 오겠지만 그때까지 최선을 다하고, 후회하거나 자책하지 않기로 했다.”

2012년 끝장투쟁을 결의할 때 15명이었던 정투위. 그 중 한 명은 생계를 위해 대리운전을 하다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지난해 8월에는 두 사람이 활동을 정리했다. 이제 12명만 남았다. 그야말로 희로애락을 함께했을 이들이 하나씩 떠날 때 남은 이가 느끼는 마음은 어떤 것일지 쉽게 짐작할 수 없다. 죽는 것 빼고는 다 해봤다는 최 위원장. 하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단 전망 없는 싸움의 날들이 때로는 견딜 수 없는 고문이 된다.

“앞으로 10년을 더 싸울지도 모른다. 안타까움과 쓸쓸함을 묻어둔 채 투쟁을 이어가기 위해서 우리 자신과 외로운 싸움을 벌여야 할는지도 모른다.” 


최규재 기자 visconti0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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