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연꽃을 사랑함은 더러운 곳에 처하여도 맑고 깨끗하기 때문이로니...
내 연꽃을 사랑함은 더러운 곳에 처하여도 맑고 깨끗하기 때문이로니...
  • 김초록 기자
  • 승인 2015.05.22 16: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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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록의 여행스케치> 600여년 역사의 녹음 간직한 창덕궁을 가다

 

서울 도심에 오두마니 들어선 창덕궁. 현재 남아있는 조선의 궁궐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창덕궁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조선 왕조가 나라를 지배했던 먼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본다. 

 

▲ 창덕궁의 상징인 인정전

 

☞조선 왕조의 중심지
창덕궁은 1405년 태종 때 건립된 조선 왕조의 왕궁이다. 이웃한 경복궁과 함께 조선왕조의 파란만장한 역사가 곡진히 스며들어 있다. 경복궁에 머물며 국사를 돌보던 태종은 두 번에 걸친 ‘왕자의 난’을 겪게 되는데 이것이 경복궁의 자리가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게 된다. 창덕궁은 이렇게 탄생했다. 창덕궁을 이궁(離宮)이라 한 것도 이런 역사적 배경과 무관치 않다. 이궁이란 나라에 전쟁 같은 큰 재난이 일어나 중요한 나랏일을 다스리지 못할 때를 대비하여 지은 궁궐을 말한다.

 

▲ 나랏일을 논의했던 선정전

 

경복궁이 평탄한 곳에 인위적으로 세워졌다면 창덕궁은 자연과의 조화를 도모한 궁궐이다. 왕의 권위를 애써 감추고 각각의 건물들은 자연 지형에 어울리게 배치하였다. 아쉽게도 초창기에 세워진 일부 건축물은 전쟁과 화재로 없어지거나 원형을 잃어버렸지만 이후 세워진 건축물은 조선시대 궁궐 건축의 미학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그 당시 조선의 왕들은 주로 경복궁에서 나랏일을 보았는데 숲과 정원이 어우러진 창덕궁에도 자주 들락거렸다고 한다.

 

▲ 아름다운 연못을 둔 존덕정(후원)

 

☞자연 지형을 살려 만든 후원  
정문인 돈화문(敦化門, 보물 제383호)으로 들어선다. 돈화문은 1412(태종 12년)에 건립해 1609년(광해군 원년)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궁궐 정문으로는 가장 오래되었다. 돌로 된 금천교(錦川橋, 보물 제1762호)를 건너면 비로소 창덕궁이 본 모습을 드러낸다. ‘흐르는 물에 악한 마음을 씻어 맑게 한다’는 의미의 이 석교는 궁궐 안과 밖을 구분하는 다리로 600여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 한국 정자건축을 대표하는 부용정(후원)

 

먼저 후원부터 가본다. 창덕궁은 전각과 후원으로 나뉘어 있다. 후원(後苑)은 이른바 왕실의 정원이다. 나무, 연못, 정자, 오솔길, 나지막한 언덕, 물 흐르는 계곡, 화단 등이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어 언제 찾아도 친근하고 편안하게 다가온다. 창덕궁이 아름다운 것은 궁궐 전체의 60%를 차지하는 이 후원 때문이다. 후원은 궁궐 안에 있다 하여 내원(內苑), 일반인들이 출입할 수 없는 곳이라 하여 금원(禁苑)으로 불리다가 그 후 비원(秘苑)이란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는데 비원은 그 당시 궁 내부를 관리하던 일종의 관청이었다.

 

▲ 풍경이 아름다운 부용지와 주합루(후원)

 

후원으로 들어서면 짙푸른 숲을 거느린 널찍한 오솔길이 펼쳐진다. 오솔길 끝에는 후원의 첫 번째 정원인 부용지가 방문객들을 반긴다. 연못에는 커다란 소나무가 자라고 있는 둥근 섬이 있는데 네모난 연못은 땅을 의미하고 둥근 섬은 하늘을 뜻한다고 한다. 연못인 부용지 옆에는 과거시험을 치렀던 영화당과 공간 구성이 뛰어난 열십자 모양의 부용정(보물 제 1763호)이 멋스럽게 서 있다. 부용정은 왕과 왕족들이 휴식을 취하거나 독서를 즐기던 곳으로 한국 정자건축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영화당은 앞뒤에 툇마루를 둔 특이한 건축물로 그 앞의 연못(부용지)과 학문을 연마하던 주합루(宙合樓, 보물 제1769호), 그리고 주합루로 오르는 정문인 어수문(魚水門)과 생울타리인 취병이 서로 사이좋게 어우러진 모습이 볼만하다. 주합루는 정조가 즉위한 1776년에 창건한 2층 누각으로 왕실 직속 도서관인 규장각과 누마루를 두어 단아하고 단정한 느낌을 풍긴다.  

 

▲ 화성 행차를 준비하던 농산정(후원)

 

부용지 일원이 단아한 멋을 풍긴다면 바로 옆의 애련지(愛蓮池) 일대는 은근한 아름다움으로 방문객들을 반긴다. 숙종은 연못 옆의 애련정을 만들면서 ‘내 연꽃을 사랑함은 더러운 곳에 처하여도 맑고 깨끗하여 은연히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니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 때의 심사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듯하다. 1827년(순조 27년) 효명세자는 애련지 남쪽에 불로문과 의두합이란 건물을 짓고 경치를 즐겼다. 불로문은 통돌을 깎아 세운 문으로 임금이 무병장수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기오헌(奇傲軒)이란 현판이 붙은 의두합은 8칸의 단출한 서재로 단청을 칠하지 않아 소박함이 물씬하다.

 

▲ 과거시험을 치렀던 영화당(후원)

 

애련지 서쪽엔 사대부 살림집을 본떠 지은 연경당(演慶堂, 보물 제1770호)이 있다. 연경당은 1828년(순조 28년)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에게 의례를 행하기 위해 지은 일종의 접견실이다. ㄷ자형 건물 한 채로 남쪽 앞이 터지고 동쪽에 긴 ㅡ자형 부속건물 두 채가 붙어 있는데 대문인 장락문(흥선대원군이 현판을 썼다고 한다)을 들어서면 단청을 하지 않은 사랑채와 안채가 보이고 오른쪽에 청나라풍 벽돌로 지은 선향재(善香齋)란 서재가 있다. 선향재는 언뜻 보기에도 특이하다는 인상을 풍기는데 동판을 씌운 지붕에 도르래식 차양을 설치해 이국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선향재 위쪽에 올라앉은 농수정은 마치 매가 날개를 편 듯한 모습이다.

애련지에서 오솔길을 따라가면 연못과 석조 건축물을 둔 존덕정 구역이 나온다. 이 구역은 창덕궁에서 마지막으로 지어진 곳으로 자연친화적인 공간이다. 아름다운 연못을 두고 있는 존덕정(尊德亭)은 육각 정자 형태로 2층 겹지붕이 눈길을 끈다. 내부에는 정조의 글이 새겨진 현판이 걸려있고 청룡과 황룡의 그림이 장식되어 있다. 다리 옆의 관람정은 부채꼴 형태로 존덕정 일원을 시원스레 바라볼 수 있다. 폄우사는 효명세자가 독서하던 곳이고 승재정은 지붕 모양이 날렵하다.

▲ 중국풍 차양을 설치한 선향재(후원)

 

후원 마지막 코스인 옥류천으로 간다. 후원 북쪽 깊숙한 곳에 있는 옥류천은 흐르는 개울을 가리킨다. 인조 14년(1636년)에 커다란 바위인 소요암을 깎아내고 그 위에 둥근 홈을 파서 휘도는 물길을 끌어들여 폭포처럼 떨어지게 했다. 바위(소요암)에 새겨진 ‘玉流川’이란 세 글자는 인조의 친필이고 오언절구 시는 이 일대의 경치를 읊은 숙종의 작품이라고 한다.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이라 했다. 임금과 신하들이 곡선형의 수로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지은 심사를 알만하다. 이곳 또한 다양한 정자를 사이좋게 세워놓았다. 소요정, 태극정, 청의정, 농산정, 취한정 등이 그것들이다. 맨 끝 쪽에 있는 청의정은 궁궐 안의 유일한 초가이고 농산정은 화성 행차를 준비하던 곳이다.

 

▲ 낙선재 뒤뜰의 아름다운 모습
▲ 여러 건축물로 이루어진 낙선재

 

☞아름답게 배치된 건물들
후원에서 나오면 오른쪽으로 낙선재(樂善齋, 보물 제1764호)가 자리하고 있다. ‘임금이 선행을 베풀면 세상이 즐거워진다.’는 의미가 숨어 있는 낙선재는 석복헌, 수강재와 하나로 이어져 있는데 이를 통칭하여 낙선재라 부른다. 낙선재는 1847년(헌종 13년) 조선의 제24대 임금인 헌종이 서재 겸 사랑채로 쓰기 위해 세운 건물로 마지막 왕인 영친왕과 그의 아내 이방자 여사, 그리고 고종의 고명딸인 덕혜옹주 등이 기거했다. 헌종은 순조의 손자로 1834년 8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아버지인 효명세자가 22살에 요절하면서 왕위를 물려받았다.

 

▲ 경빈 김씨가 살았던 석복헌

 

 ‘복을 내려주는 집’이라는 석복헌(錫福軒)은 경빈 김씨(헌종의 후궁)를 위한 처소이고 수강재(壽康齋)는 순원왕후(헌종의 할머니)가 기거한 곳이다. 두 건물은 담으로 나뉘어 있지만 복도가 놓여 있어 막힌 느낌이 들지 않는다. 낙선재와 석복헌 사이의 담에는 거북의 껍데기 문양을 닮은 귀갑문이 있다. 십장생 중 하나인 거북처럼 왕이 장수하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낙선재가 돋보이는 것은 단청이 없어 수수한 느낌이 드는데다 화계(花階, 꽃계단)와 꽃담, 다채로운 창살무늬가 눈길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보름달을 표현한 만월문은 우아함과 기품이 느껴지고, 뒤뜰 꼭대기에 있는 상량정(上凉亭)은 이름처럼 전망이 으뜸이다. 이런 사연이 깃든 낙선재는 훗날 조선 왕실을 상징하는 장소가 됐다. 고종이 갑신정변 직후 집무소로 사용했고, 국권을 빼앗긴 순종이 1912년부터 머물렀으며 계비인 순정효왕후는 석복헌에서 숨을 거뒀다.

 

▲ 화려한 모습의 인정전 내부

 

☞조선 왕조의 권위가 느껴지는 건축물
낙선재를 보고 조선을 대표하는 정치 공간이었던 인정전(仁政殿, 국보 제225호)을 보러간다. 인정문을 들어서면 만날 수 있는 인정전은 창덕궁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인정문 앞마당에서 인정전을 바라본다. 한마디로 우람하다. 왕들의 즉위식과 외국 사신을 맞이했던 인정전은 2층으로 돼 있다. 개방감이 시원한 실내는 규모는 작지만 소박한 옥좌를 위시해 일월오봉병(병풍)과 아름다운 문양의 천장이 조선 왕조의 위엄과 예술성을 느끼게 해준다. 인정전은 태종 때 처음 지어진 뒤 임진왜란과 화재로 세 번이나 잿더미로 변했던 가슴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현재의 인정전은 1804년에 다시 지어진 네 번째 건축물이다.

희정당(熙政堂, 보물 제815호)은 국왕이 평소에 거처하던 곳이다. 이 건물도 갖가지 난리로 세 차례나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거니와 현재의 건물은 네 번째로 지은 것이다. 희정당은 원래 연못을 둔 우아하고 멋스러운 공간이었지만 그 후 일본인들이 복원에 참여하면서 규모와 형태가 크게 바뀌었다. 일본인들은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파괴하기 위해 갖은 술수를 썼던 것이다. 내부에서 볼 수 있는 서양 문물도 예사롭지 않다. 양탄자와 유리 창문, 서양식 의자, 해강 김규진이 1920년경에 그린 산수화 2점 등이 그것들이다.  

나랏일을 논의하던 선정전도 옆에 붙어 있다. 조선의 왕들은 신하들과 수시로 만나 나랏일을 논의했는데, 이곳을 편전이라고 했다. 지붕이 청색 기와로 되어 있는 것도 선정전의 특징이다. 그 당시에 값이 매우 비싼 청색 기와를 덮은 건 왕이 나랏일을 보던 중요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 위엄 넘치는 대조전

 

☞역사의 편린이 스민 곳 
희정당 뒤편에 있는 대조전으로 가본다. 대조전은 외부와 철저하게 단절되었던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왕과 왕비의 침실이자 왕자와 공주의 탄생지였고, 어린 왕자와 공주를 교육시키던 아주 중요한 장소였다. 중앙 마루를 중심으로 왕은 왼쪽 방을, 왕비는 오른쪽 방을 사용했다. 수차례나 불이 나서 소실되었던 건물로 1910년엔 마지막 어전 회의가 열렸던 곳이기도 하다. 이 어전 회의에서 주권을 일본에 빼앗긴 ‘한일병합’이 결정되었고, 519년이란 긴 역사를 자랑했던 조선 왕조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창덕궁에는 이 밖에도 눈길을 끄는 건축물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성정각은 왕세자가 머물던 2층 누각으로 조선 궁궐 건축의 특징 중 하나인 비대칭 원리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성정각 건너편에는 왕세자가 서고와 도서실로 썼던 승화루가 있다. 인정전과 궐내각사 사이에 있는 선원전도 볼만하다. 역대 왕들의 초상화를 모셔 두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궐내각사는 궁궐 안에 있는 일종의 관청으로 왕과 왕족의 의료를 담당했던 약방을 비롯하여 사적을 관리했던 옥당(홍문관), 정조 개혁정치의 산실인 규장각을 두고 있다. <수필가/ 여행작가>

<참고자료: 교과서에 나오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시공주니어), 창덕궁 홍보 책자-(재)아름지기>

 

*가는 길=지하철 안국역(3호선, 3번 출구)에서 도보로 5분, 종로3가역(1, 3, 5호선, 6번 출구)에서 10분 거리에 있다. 관람시간: 오전 9시-오후 6시 30분, 관람요금: 어른 3000원, 어린이, 경로(65세 이상) 무료, 매주 월요일은 휴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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