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우리말 달인’ 엄민용의 ‘우리말 나들이’

 

말과 글은 생명체입니다. 필요에 따라 태어나고, 쓰이는 과정에서 변화·성장하고, 더러는 세월 속에 사라지기도 합니다. ‘아빠’라는 말을 보면 그러한 ‘말의 생명성’을 어렴풋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말에서 ‘아빠’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30년대이고, 표준어로 대접받은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의 일입니다. ‘아빠’는 표준어가 된 후에도 ‘아이들이나 쓰는 말로, 성인이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게 우리말 표준화법의 원칙이었습니다. 그러다 지난해 처음으로 ‘표준 언어 예절’을 정하면서 어른들도 ‘아빠’를 쓸 수 있도록 허용했습니다.

 

 

‘형’도 비슷합니다. “가족 간의 호칭에서 윗사람에게 쓰는 ‘형’을 직장에서 쓰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게 예부터 내려온 언어 예절입니다.

그러나 국립국어원이 지난해 정한 ‘표준 언어 예절’은 자기와 직급이 같은 동료를 부르거나 가리킬 때는 ‘형’을 쓸 수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직급이 아래인 사람에게도 ‘형’을 쓸 수 있다고 했습니다.

다만 직함이 없는 선배, 또는 직급이 같지만 나이가 많은 선배에게 ‘김형’ ‘이형’ 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덧붙였습니다. 가정에서는 ‘형’이 윗사람을 지칭하지만, 사회에서는 ‘형’이 주로 동년배나 아랫사람에게 쓰이기 때문이지요.

‘언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자 직원이 여자 선배를 ‘언니’ 또는 ‘○○ 언니’로 부르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직장에서 ‘형’이니 ‘언니’니 하고 부르는 것이 귀에 거슬리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국립국어원이 정한 ‘표준 언어 예절’에 벗어난 호칭은 아닙니다. 다만 ‘○ 언니’ ‘미스 ○ 언니’로는 쓰지 않는 것이 좋다고 ‘표준 언어 예절’은 밝히고 있습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듯이 호칭도 사람들이 많이 쓰는 사례를 좇아갑니다. 세월을 이기는 장사가 없듯이 말도 세월을 못 이기는 것이지요.

자, 그건 그렇고요. 직장에서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나누는 대화에서 종종 이런 장면을 보게 됩니다.
 

김 사장 : 엄 대리, 이 부장 어디 갔어?
엄 대리 : 이 부장님, 잠깐 외출하셨나 봅니다.
김 사장 : 엄 대리, 군대 안 갔다 왔어. 이 부장님이라니? 내가 이 부장 밑이야!

 

어떠세요? 이런 상황을 보거나 직접 겪은 적 있지 않나요? 그러나 이때 엄 대리가 ‘이 부장님’이라고 한 것은 옳은 표현입니다. 직장 내 압존법(문장의 주체가 말하는 사람보다는 높지만 듣는 사람보다는 낮아, 주체를 높이지 못하는 어법)은 일본식 언어 습관입니다. 우리말에도 압존법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가정에서만 제한적으로 쓰일 뿐입니다. 학교와 직장에서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제가 회장님께 말씀드리며 “김 사장이 그러는데요”라고 하는 것을 김 사장님이 우연히 들으셨다면 저를 그냥 두겠습니까? 나중에 불러서 호통을 치시겠죠. 그래서 우리말법은 말하는 사람의 처지에서 자기보다 높은 사람에게는 모두 존칭어를 쓸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높여야 할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 높여야 하는 거지요. <경향신문 엔터비즈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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