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우리말 달인’ 엄민용의 ‘우리말 나들이’

 

“극중 이신영은 일에서는 엄청난 승부욕을 보이는 반면 사랑 앞에서는 쑥맥도 이런 쑥맥이 없다는 점이 무척 재미있어요.”
“예능에서 가수로 돌아온 김종국 ‘발라드 잘 불러도 연애는 쑥맥’.”

위의 문장은 일간지들에 실린 표현입니다. 언뜻 봐서는 아무 문제가 없는 듯합니다. 하지만 이들 문장 중의 ‘쑥맥’은 바른말이 아닙니다.

“사리 분별을 못 하는 어리석은 사람을 일컫는 말”은 ‘숙맥’으로 써야 합니다. ‘숙맥’은 ‘숙맥불변(菽麥不辨)’에서 온 말인데요. 숙맥불변은 글자 그대로 “콩[菽]과 보리[麥]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콩인지 보리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과 ‘숙맥’을 ‘쑥맥’으로 쓰는 사람 중 누가 더 어리석을까요? 이럴 때 흔히 쓰는 말이 ‘도찐개찐’입니다.

하지만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와 비슷한 뜻으로 쓰이는 ‘도찐개찐’이나 ‘도낀개낀’ 역시 바른말이 아니랍니다. ‘도긴개긴’으로 써야 하는 말이죠.

국립국어원은 오랫동안 ‘도 긴 개 긴’만 표준어로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띄어쓰기를 하지 않은 ‘도긴개긴’도 표준어로 인정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동안 자주 쓰였던 ‘도찐개찐’은 ‘도긴개긴’으로 순화하도록 권했습니다. ‘도낀개낀’은 아예 다루지도 않았지요.

‘도긴개긴’은 윷놀이에서 도로 남의 말을 잡을 수 있는 거리나 개로 남의 말을 잡을 수 있는 거리는 별반 차이가 없다는 뜻으로, 조금 낫고 못한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비슷비슷해 견줘 볼 필요가 없음을 이르는 말로도 쓰입니다.

‘숙맥불변’을 ‘숙맥’으로 쓰는 예에서 보듯이, 넉 자의 한자성어를 두 자로 줄여 쓰는 말이 더러 있습니다. “어떤 일의 가능성이 매우 높음을 이르는 말”인 ‘십상’도 그중 하나입니다. “그렇게 놀다가는 시험에 떨어지기 십상이다”라고 할 때의 ‘십상’ 말입니다.

이 ‘십상(十常)’은 십중팔구(十中八九)와 같은 뜻의 말 ‘십상팔구(十常八九)’의 준말입니다. 그런데 이 십상을 ‘쉽상’으로 쓰는 사람이 더러 있더군요. 아마 우리말 ‘쉽다’에서 온 말로 잘못 알고 그리 쓰는 듯합니다. 그러나 ‘십상’은 한자말입니다.

우리말 중에서 순우리말은 3할 정도밖에 안 됩니다. 7할은 한자말입니다. 따라서 한자를 모르면 우리말도 잘못 쓰기 쉽습니다. 은근히 화가 나는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언어 현실입니다.
‘삼수갑산’도 한자를 몰라 열에 아홉은 틀리는 말입니다. “어떤 결심을 단단히 하는 문맥에서, 무릅쓰거나 각오해야 할 최악의 상황을 강조하며 이르는 말”로 흔히들 ‘산수갑산’을 씁니다.

‘산수갑산’이 널리 쓰이는 것은 우리의 생활과 관련이 있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었다’거나 ‘산 넘고 물 건너 죽을 고생하며 이곳에 왔다’ 등의 표현에서처럼 우리 생활에서 산(山)과 물[水]은 고생을 나타내는 의미로 쓰이곤 합니다. ‘산과 물=고생’이 뇌리에 박힌 까닭에 ‘산수갑산’을 별 의심 없이 바른말로 여기고, 그리 쓰는 것이죠.

그러나 ‘산수갑산’은 ‘삼수갑산(三水甲山)’으로 써야 합니다. 여기서 ‘삼수’와 ‘갑산’은 함경남도의 땅이름입니다. 이들 두 지방은 조선시대 귀양지 중 하나로, 사람이 살기에 아주 척박한 곳이라고 합니다. 길이 험해 사람이 드나들기 어렵고, 풍토병이 극성을 부리는 곳이라고 하네요. <경향신문 엔터비즈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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