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잃을 게 없는 세상, 내 남은 생마저 가져가려나”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세상, 내 남은 생마저 가져가려나”
  • 구혜리 기자
  • 승인 2015.08.19 13: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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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사는 세상> 45년간 택시운전, 아내 잃고 외롭게 사는 이화영 할아버지

 

▲ 이화영 할아버지

매일 아침 방송되는 주부 프로그램에는 빠지지 않고 가족클리닉 코너가 들어가 있다. 십 년 넘게 같이 산 중년의 부부들이 풋풋했던 연애시절의 낭만은 지워진 채 애정 없이 지겨움으로 때로는 폭행과 폭언으로 서로에게 상처 입히고 ‘이혼해야 돼!’를 달고 사는 모습이 끊임없이 방송으로 생산되는 걸 보면 영원한 가정의 평안이나 사랑은 마치 허구가 섞인 동화 속에나 등장하는 해피엔딩으로만 생각될 때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마음 한편에 영원한 혹은 조금이라도 더 긴 사랑의 지속과 신뢰를 꿈꾸며 이를 함께 만들어줄 누군가를 기다리곤 한다. 올해 78세가 되시는 이화영 할아버지는 우리가 꿈꾸던 사랑을 보여준 그런 따뜻한 로맨티스트였다.

택시기사로 45년간 사람들의 발이 되어주신 할아버지에게 유일하게 남아있는 자랑거리는 무사고운전으로 받은 표창장이다. 1985년 전후로 국무총리상 2개와 도지사 경찰총장상, 시장상 등 자랑스레 꺼내 오신 빛바랜 상장에 할아버지의 지나온 세월이 묻어있다. 모범적이고 성실하게 살아온 45년, 그러나 세월은 야속하게도 할아버지에게 아내와 건강 등 많은 것을 빼앗아 갈 뿐이었다.

인생의 절반을 운전석 한 칸에 싣고 새벽부터 해가 떴다 사라져 다시금 새벽이 찾아 올 때까지 끊임없이 많은 손님들을 태웠지만 누구하나 깊은 말동무가 되어 주진 못했다. 그럼에도 집에 들어서면 왜 그리 드러눕기 바빴는지 아내와 눈 맞추고 대화를 나누기란 생계노동으로 지친 가장에게 너무 어려웠던 걸까. 하루 중 유일한 즐길 거리는 어쩌다 탑승한 외향적인 손님에게 와이프 자랑을 하는 것 그 뿐이었다. 손님이 뚝 끊기는 날에는 한적한 도로변에 차를 세워두고 가족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뱉고 나면 기운이 나는 듯 했다. 그러나 여느 부부처럼 평범한 그 날들도 오래가진 못했다.

“(아내가)많이 아팠어. 내가 힘들게 뭐 있었나. 그 때가 좋았지. 지금이 훨씬 힘들어. 마누라가 아파 죽겠어도 옆에 있으니까 보고 든든했잖아.”

3년 전 아내가 앓기 시작하고부터 세상을 뜨기 전까지 할아버지는 생전 해보지 않던 병수발을 들며 온갖 모진 일을 다 맡아 하셨지만 전혀 힘들지 않았다. 홀로 쓸쓸한 하루를 보내야하는 지금, 오히려 그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말하시는 할아버지다. 사랑하는 아내 곁에 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시절 힘든 게 있었다면 아내의 고통소리와 눈물을 처음으로 접하게 된 것이었다. 약해져가는 아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알아갈수록 할아버지는 무력함을 느꼈다.

 

 

사랑하는 아내를 떠나보내고 다시 마주한 현실은 더욱 가혹하기만 했다. 평생 모은 돈을 아내의 치료비로 써버려 당장의 끼니부터 걱정해야 할 판에 할아버지의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 것이다. 백내장 등의 병환으로 매 월 세 가지씩 타오는 약값 8만3000원은 왜 이리 부담스러운지. 방광과 혈압약, 후두약까지 사다보니 약값도 비싸다. 게다가 암으로 발전될 것 같다는 이상 부위의 엑스레이 소견이 있었음에도 당장 크게 불편한 증상이 없으니 자연스레 할아버지의 관심사 밖이 되었다. 국가에서 월 8만원의 연금이 나오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터무니없이 부족한 금액이다.

“백내장이 와서…짝짝이지. 한 쪽은 잘 보이고 한 쪽은 잘 안보이고. 염증이 있는데 그게 암이라고 하더라고. 치료 받을 형편이 못되어서 약만 타다 먹고 있어요.”

얼마 전에는 약을 가지러 방에서 거실로 나오다가 쓰러져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볼 일을 보는 것도 일이다. 화장실이 밖에 있어 오가는 길에 쓰러지기도 했다. 작은 방 한 면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내와의 결혼사진.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많이 힘들었던 날들이 떠올랐는지 아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결국 얼굴을 붉히며 눈물을 보이셨다.

매해 5월 21일은 ‘푸른 5월에 2(둘)이 1(하나)가 된다’는 뜻의 부부의 날이다. 부부관계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화목한 가정을 만들자는 취지로 제정된 부부의 날. 5월의 따사로운 햇살이 세상 많은 부부들의 사랑을 축복해준다. 그러나 이화영 할아버지에게 많은 부부들이 행복을 나누는 부부의 날은 그저 슬픔과 외로움이 배가 되는 날일뿐이다. 직접 머리를 감겨주고 바지 밑을 닦아주던 그 시절이 할아버지에게는 아직도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다. 어떠한 어려움도 나의 아내가 있었기에 그리고 사랑이 있었기에 웃고 이겨낼 수 있었다.

 

 

마당에 나와 손수 가꾸신 나무에 물을 주신다. 열악한 집안 환경이지만 생전 아내는 화분 키우기에 늘 정성을 기울였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얼마 동안은 방치해두던 화분이 말라버리기도 하고 거미줄도 쳐지곤 했다. 그러다 문득 시작한 물주기만으로 어느새 나무는 다시 꽃을 피우고 푸른 생기를 되찾았다. 빨갛게 진분홍색을 띈 꽃이 활짝 피었다. 그 옆엔 연보랏빛을 띤 꽃이 탐스럽게 피었다. 활짝 핀 꽃 한 송이에 아내 얼굴이 피어 오른다. 살랑이며 흔들리는 몸짓은 늘 미소를 띤 채 반갑게 반겨주던 품만 같다.

아내를 향한 할아버지의 그리움과 사랑은 요 근래 키워왔던 사랑에 대한 회의와 불신을 녹여주었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은, 특히 평생을 약속했던 배우자를 먼저 떠나보낸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슬프고 외로운 일일테다. 그러나 그러한 슬픔을 채 추스르기도 전에 꼬리표처럼 따라와 마주해야만 했던 현실적 문제들은 그를 더욱 고통스럽게 한다. 할아버지는 외롭다. 하고 싶던 많은 얘기들을 미처 다 나누지 못하고 먼저 떠나버린 아내는 이제 꼬깃꼬깃한 사진 속에서만 말동무로 남아있다.

두 손을 맞잡고 연신 허리를 굽히며 잘 가라고 마중을 하시는 이화영 할아버지의 표정은 처음 마주할 때보다 어딘지 밝아진 얼굴이셨다.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들에 반가움과 설렘을 안고 잘 입지 않으셨던 남방셔츠는 무더운 날씨에 땀으로 젖어버렸다. 잘 보이고 싶어 고른 옷인데 하의는 추리닝 바지를 입으셨다. 바지는 두 벌 뿐인데 입고 계신 추리닝이 그나마 제일 멀끔한 바지다. 원체 붉은 피부가 조금 더 붉어졌다. 떠날 때가 되니 짧게나마 정든 방문객에게 친근함과 아쉬움 띤 미소가 번져 얼굴이 더 붉어진 것이다. 초점을 잃어가는 눈이지만 빛바랜 눈으로 떠나는 우리를 바라보며 시야 속에 사라져가는 손님들에게 손 인사를 해주는 이화영 할아버지셨다.

<이화영 할아버지는 현재 네이버 해피빈 구세군자선냄비본부에서 기부금을 모집받고 있습니다. http://happybean.naver.com/donations/H000000118796?redirectYN=N 기부금은 암 정밀검사 및 치료비, 식비를 포함한 생계비, 약제비, 백내장 치료비로 사용될 계획입니다. 현재 목표치 모금액에 5%의 모금율이 달성되었을 뿐입니다. 이웃에게 내미는 작은 도움의 손길이 누군가에게는 삶의 버팀목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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