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겨울 코스모스' 36회
'소설-겨울 코스모스' 36회
  • 이율 작가
  • 승인 2015.10.30 1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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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세상

그렇게 몇 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경훈은 학교에 들어갔다. 서울역 뒤편 산동네에 위치한, 학교랄 수도 없는 전수학교였다. 저녁에만 수업이 있어서 낮에는 일을 할 수도 있었지만 일자리가 잡히질 않았다. 경훈은 대신 신문배달을 선택했다. 그마저 동네 지리를 잘 모르는 탓에 남들이 배달하는 양의 3분의 1정도 수준에 그치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경훈은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남순은 봉제공장에 들어가 있었다. 그건 본인이 원한 것이었다. 그저 경훈이라도 학교에 다닐 수 있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루에 2교대하는 봉제공장은 어쩌면 남순에게는 천혜의 안식처라고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건 밤에 학교에 나가는 경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경훈은 새벽에 일어나 신문을 돌리고 낮에는 서울 곳곳을 돌아다녔다. 남자, 그러니까 새아버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다. 때로는 한강변까지 족히 한시간은 되는 거리를 걸어갔다가 돌아오기도 했으며 뜬금없이 남순의 봉제공장이 있는 왕십리 일대를 빙빙 돌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남순은 어김없이 싸온 도시락을 들고 나와 경훈과 함께 점심을 먹곤 했다.

경훈은 전수학교의 아이들과는 어울릴 생각조차도 못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가정이 어려워 낮에는 일을 하는 탓에 시간이 없었던 이유도 있지만 경훈이 스스로 그들과 어울리는 걸 꺼려하는 것도 있었다. 그건 경훈의 타고난 성격이었다. 워낙 말이 없던 덕분에 시골에서조차 그는 아이들과 잘 어울리질 못했다.

학교에서 밤늦은 시간에 돌아온 그는 밥 먹을 생각도 하지 않고 조심스레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조용히 잠을 청할 뿐이었다. 남순이 행여라도 집에 있을 량이면 그럴 때마다 밥 먹을 것을 종용했지만 경훈의 의지가 워낙 완고하다는 걸 안 이후로는 그 짓도 그만 두어 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이른 새벽, 신문을 배달하고 집으로 돌아온 경훈은 남순이 집 안에 있는 걸 발견했다. 남순은 분명 낮근무를 하고 있는 기간이어서 경훈이 신문배달을 끝내고 돌아올 시간이면 집에 없어야 했다. 남순은 방에 누워 있었다. 경훈이 돌아온 것조차도 몰랐다. 대신 시름시름 앓는 소리를 냈다. 무슨 일일까. 단 한번도 앓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던 남순이었다. 여태까지 병이라곤 겨울철에 걸린 감기 한 두 번이 전부였을 정도니. 그런 남순이, 다니던 공장에도 나가지 못할 정도로 앓고 있는 것이었다.

방으로 들어선 경훈은 남순의 얼굴에 흐르는 땀방울을 보았다. 뭔가 심각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이마를 짚어보니 불덩이 같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전혀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남순을 보자 더럭 겁이 났다. 이대로 있어선 안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욕실로 들어갔다. 찬물에 수건을 담궜다. 물이 차갑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날씨 탓이었다. 하지만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방으로 돌아온 경훈은 그렇게 연신 남순의 머리 위에 젖은 수건을 올려놓고 다시 물에 적시는 일을 반복했다.

그로부터 한참이 흐르자 남순의 열이 조금씩 내리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남순은 신음소리를 멈추고 가는 숨소리를 내며 죽은 듯 깊은 잠 속으로 떨어졌다. 경훈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솟고 있었다. 욕실로 들어간 경훈은 이번엔 자신의 얼굴을 양은 세수대야에 처박았다. 한 여름에 감기라도 걸린 걸까. 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기침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날 하루종일 남순은 약 두시간 정도 간격으로 신음소리를 내며 고열에 시달리다가 다시 잠 속으로 빠졌다가 하기를 반복했다. 불의 신이 끊임없이 그녀를 괴롭히는 듯 했다. 치료법은 경훈이 미지근한 물에 적셔주는 수건찜질이 유일했다. 경훈은 남순의 옆에 앉아서 하루를 꼬박 보냈다. 밤이 되자 간신히 남순이 의식을 차리는 걸 느꼈다.

남순은 실눈을 뜨고 경훈을 보더니 시간부터 물었다. 밤이 되었다고 하자 경훈이 왜 학교에 가질 않았느냐고 대뜸 나무라기까지 했다.

그리고 또 며칠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밤늦은 시간 학교를 마치고 어두컴컴한 산동네 골목길을 걸어 내려오는 경훈을 기다리는 낯익은 손님이 있었다. 바로 남순이었다.

"공장 안갔냐? 왠 일이디야?"

나이가 들면서 한편으론 미안한 마음도 느끼고 있었지만 습관 때문에 어찌할 수 없는 경훈의 투박한 반말. 그런데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경훈은 평소와 많이 다른 분위기를 남순에게서 느껴야 했다. 가로등 불빛에 반쯤 가려진 얼굴은 푹 숙여진 채였고 경훈의 질문을 들었음이 분명함에도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고 있었다. 경훈이 다가가서 옷깃을 잡아당길 때에야 그녀는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눈가에 이슬이 어려있었다. 가로등 불빛을 받아 시골 하늘의 촘촘한 별마냥 반짝거렸다. 가슴이 덜커덩 내려앉았다. 그러고 보니 비단 오늘 뿐인 것은 아니었다. 어딘가 모르게 많이 달라진 남순의 요즘. 경훈 앞에서만은 비교적 시골에서의 밝은 표정을 잃지 않았던 그녀였는데 요즘은 통 그런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었다.

"뭔일인디…."

"……"

"어째서 그러는 것이냔 말여?"

대답 대신 남순은 고개를 돌리더니 앞장서 소소로이 발걸음을 떼었다. 어깨가 축 처져있었다. 그렇게 크게 보이던 누이였건만 그녀는 무척 작아져 있었다. 몸도 예전보다 훨씬 더 말라 있었다.

저 깊은 곳으로부터 울컥하고 주먹막한 불덩어리가 치밀어 올랐다. 가슴을 거쳐 목까지 올라온 그 뜨거운 놈은 새삼 경훈이 마른침을 삼키느라 컥컥, 거리는 고통을 안겨주더니 결국 눈에 물방울이 맺히게까지 했다. 독한 식초를 마신 듯 코끝이 아려왔다. 아직 뜨거운 서울의 밤거리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간혹 어두운 밤길을 지나는 사람들의 모습이 실루엣으로 다가왔다. 그놈의 눈물 때문이었다. 아지랑이도…실루엣도….

한참을 앞서 걷던 남순이 서울역에서 남영동 쪽 대로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녀는 그저 땅만 쳐다보며 걷고 있었다. 경훈은 그저 그렇게 멀찌감치 떨어져 그녀의 그림자만을 좇고 있었다. 최대포집이라고 쓰여있는 입간판이 준오의 어깨를 건드렸다. 최대포? 마악 궁금증이 들려는 경훈의 눈에 금새 해답이 들어왔다. 덥고 비좁은 실내는 연기가 자욱했고 사람들은 연신 부채질을 하면서도 그렇게 고기를 구워대고 있었다. 바깥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차들이 다니는 한길 한 쪽까지를 가득 채운 사람들. 저마다 입가에 술 기름인지, 고기 기름인지 모를 번지르르한 전리품들을 남기며 빌딩의 불빛을 고스란히 담은 액체를 마셔대거나 시커멓게 타, 독이 올라 보이는 고깃덩어리들을 씹고 있었다. 문득 시장기가 확 들었다. 침을 꿀꺽 삼켰다. 남순은 이리저리 인도를 가득 메우고 있는 고기를 굽는 식탁과 사람들을 피해 용케도 자리를 벗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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