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거리가 어두워졌다. 기차 지나가는 소리만이 귀청을 울리고 사람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간혹 눈에 띄는 빌딩들도 전부 시커먼 자태만을 드리우고 있을 뿐.

갑자기 남순이 멈추어 섰다. 인위적으로 심어진 듯한 몇 그루의 이름 모를 나무숲 곁 조그만 돌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는 그녀의 새하얀 얼굴.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햇볕에 그을려 가무잡잡한 구릿빛이었던 얼굴색이 경훈도 새삼 놀랄 정도로 하얗게 변해있었다. 마치 야광페인트라도 칠한 듯 하이얀 색은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빛났다. 경훈이 부러워하던 서울 아이들의 그것. 그녀가 갑자기 웃었다. 아니 웃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그녀는 여전히 침잠 상태였다. 얼굴에 칠해진 야광페인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경훈은 어색한 침묵을 깨트리기라도 하려는 듯 남순의 바로 옆 풀 섶에 털퍼덕, 소리가 나게 주저앉았다. 하지만 남순은 여전히 미동도 않는 채 그저 시선을 땅으로만 향하게 하고 있었다. 전철인지 기차인지 지나가는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한밤중 귀가를 재촉하는 차량들의 클락션 소리도 간간히 들려왔다. 그래도 그런 소리라도 있으니 다행이다 싶었다.

시간이 흘렀다. 몇 번이고 무슨 말인가를 꺼내려던 경훈도 금새 노력을 포기하고 말았다. 오히려 더 어색해 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얼마나 밤이 깊었을까, 경훈의 인내력이 한계에 달할 무렵 남순이 입을 열었다.

"너…술 마셔 본 적 있지?"

새삼스런 질문.

"……"

"우리 고기 먹으러 갈래?"

그러고 보니 서울 생활 몇 개월만에 남순의 말투는 꽤 세련되어져 있었다. 공장 사람들 사이에 파묻혀 지내다 보니 그런가 보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술과 고기라니…. 나름대로 사태를 분석해보려고 경훈이 노력하고 있을 때는 이미 남순은 자리를 털고 일어난 뒤였다. 남순은 왔던 길을 거슬러서 발걸음을 옮겼다.

최대포네 집은 아까보단 사람들이 훨씬 빠져나가 한가로와진 상태였다. 다행이다 싶었다. 남순이나 경훈이나 실제 나이에 비해서는 꽤 조숙해보이는 외모였지만 그래도 사람들 앞에서 술을 시키고 고기를 먹는다는 건 아무래도 꺼림칙했기 때문이었다.

문닫을 준비를 하는지 한쪽에서부터 플라스틱 빗자루로 음식쓰레기 등을 쓸어내면서 바깥쪽으로 나오고 있던 주인이 힐끗 둘을 쳐다보더니 별로 반갑지 않다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이미 늦은 시간이었고 게다가 두 손님의 면면도 신통치 않은 탓이리라.

"문닫을 시간이 지나서 서둘러 주셔야 하겠는데…."

벽에 붙은 메뉴를 살펴보던 남순이 대답 대신 아까와는 전혀 딴판인 목소리로 경쾌하게 주문을 했다.

주인장의 급한 심경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시뻘겋게 달아오른 숯불이 화로그릇에 한가득 담긴 채 날라져왔다. 남순이 식탁에서 한 발짝이나 의자를 뒤로 밀고서야 앉아야 할 만큼 불은 뜨거웠다. 채를 썬 파를 비롯 몇가지 밑반찬이 뒤따랐다. 시골에서나 먹어봤던 갓김치가 경훈의 입안에 침이 고이게 했다. 그런 심경을 아는지 남순이 다시 아까의 그 경쾌한 목소리로 주인을 부르더니 밥 한공기를 더 주문했다. 불 위에 주먹만하게 올려놓은 시뻘건 생고기가 오그라들고 있었다. 기름이 뚝뚝 숯불 위에 떨어지면서 불길이 치솟았다.

이내 숯내음이 진하게 밴 고깃살이 가뜩이나 시장기에 지친 경훈의 오감을 열어놓고 있었다. 경훈은 남순이 따라 주는 맑은 색의 소주잔을 엉거주춤 받아 탁자 위에 내려놓고는 은회색의 빛바랜 젓가락을 집어들었다. 남순이 겸연쩍게 웃더니 잔을 들었다. 단발에 퍼머기가 있는 앞 머리카락의 일부가 인중선을 따라 한쪽으로 삐끗하고 올라간 웃음자국을 살짝 덮고 있다. 경훈은 역시 엉거주춤 잔을 들어 남순의 파리한 손끝에 매달려 있는 기름기 묻은 잔 끝에 갖다대었다. 쨍…. 경훈이 웃었다. 마치 물을 마시듯, 조그맣게 벌려진 입술 사이로 잔을 갖다 댄 남순의 코가 찡긋하고 주름을 잡는 듯 하더니 이내 멀건 액체는 잔뜩 벌려진 채 한껏 무언가를 갈구하는 남순의 목구멍을 타고 사라져버렸다. 탁자 위에 힘있게 내려진 잔은 완벽히 비워져 있었다. 시골에서 여러 차례 막걸리 마시는 걸 구경한 적이 있던 경훈에게 남순의 그런 모습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알코올 도수가 높다는 소주는 처음이었다. 남순이 웃었다. 젓가락을 들어 불 위에서 마악 물들어가는 노을빛의 고깃덩어리를 집으려다 말고는 경훈에게 눈짓을 보냈다. 경훈은 용기를 냈다. 아니 웬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눈을 꼭 감은 채 남순처럼 한 잔을 단숨에 비워냈다. 입에서 절로 의성어가 튀어나왔다. 크~윽. 남순이 여전히 웃는 채로 커다란 상추 잎에 주먹만하게 싼 고깃덩어리를 디밀었다.

주인이 힐끗힐끗 눈치를 보고 있었다. 머리에 잉크도 안 마른 놈들이 하는 꼴이라니….아마도 그렇게 생각하는 듯 했다. 고기가 없어지고 있었다. 남순은 그동안에도 몇 잔인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연신 술잔을 들이붓고 있었다. 그건 경훈도 마찬가지였다. 또 다른 술이 날라져 왔다.

"너…괜찮냐? 그렇게 술 마셔도…."

대뜸 용하게 버티는 자신이 대견스럽다고 생각하며 경훈은 남순에게 으시대듯 물었다.

"……"

그런데 말 끝에 바라본 그녀는 술기운 때문인지 다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시커멓게 생명을 다한 살점들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

"뭔 일 있지야. 오늘 당체 왜 그러는 것이디야?"

"……"

좀체로 말이 없던 경훈이지만 입이 터지고 있었다. 술기운인 모양이었다. 얼굴이 화끈, 하고 달아올랐다. 이마에 연신 땀방울이 맺혔다.

"공장에서 뭔 일 있었던 것이여?"

"……"

경훈이 다시 반쯤 남은 소주를 목안으로 털어 넣은 뒤 탁자 위에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고 나서야 남순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그녀는 소주병을 들어 다시 경훈의 잔을 채웠다.

"경훈아…."

대답 대신 경훈이 남순의 시선을 응시했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아래쪽으로 떨구며 말을 이었다.

"너, 저번에 얘기한 것 있지야."

"뭐?"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는 얘기였다.

"시골가서 살자고 한 것 말이여."

"근디, 어째서?"

"우리 진짜로 시골로 다시 내려가 버릴까?"

"……"

난데없는 얘기에 경훈은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생각을 하다가 이내 무언가를 떠올린 듯 입을 열었다.

"왜… 그것 땜시 그러는 것이여?"

"……"

"둘이 싸우는 것 땜시 그러느냔 말이여?"

그녀는 대답 대신, 채 덜 비워진 잔에 술을 채우더니 이내 꿀꺽, 소리가 나게 들이켰다. 양쪽 볼이 발그스레 달아오르는 게 눈에 띄였다. 파르르 떨리던 눈썹이 잠시 움직임을 멈추는 듯 하더니 그 끝에 조그만 이슬방울이 살포시 얹혔다. 그걸 감추기라도 하려는 듯 남순의 고개가 가뜩이나 얄팍해진 어깨 사이로 파묻혔다.

남순은 술에 취해 널부러진 사람처럼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경훈이 자신의 의자를 끌어다가 옆에 놓고 어깨를 흔들었을 때에야 고개를 들었다. 온통 눈물 범벅이 된 얼굴. 눈썹에 바른 마스카라가 흘러내린 것인지, 아니면 탁자 위에 떨어진 숯가루가 묻은 것인지 군데군데 시커먼 얼룩이 남아있었다.

"도대체 어째 이러는 것이여…사람 미치게 만드네이, 거 참"

경훈은 혀를 끌끌 찰 수밖에 없었다.

"아…이제 문을 닫아야 하겠는데."

어느 새 주인이 다가와 있었다. 얼굴을 한 번 힐끗 쳐다본 경훈이 대답을 않자 주인이 대뜸 따지듯이 빨리 나갈 것을 종용했다.

경훈이 그 상황에서 "이런 씨팔…."하고 욕을 한 것은 순전히 술기운이었다. 주인이 다음 말을 잇기도 전에 남순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기증이 나는 듯 잠깐 비틀거렸던 그녀는 금새 정신을 차린 듯 경훈의 옷깃을 잡아끌고 있었다. 주인을 노려보던 경훈은 퉤, 하고 침을 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남순의 뒤를 따라야만 했다.

뒤에서 주인의 욕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나이도 어린 것들이, 술이나 처먹고…에이 개같은 놈들아."

뜨거운 바람이 목덜미를 타고 등으로 스며들었다. 멀리 기차 가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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