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걸었을까. 낯익은 풍광이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숙인 채 앞서서 걷고 있는 남순의 뒤를 좇은지 30분 남짓은 지난 듯 했다. 차들이 거의 지나지 않는 횡단보도를 건넜고 나지막한 산동네 골목길을 이리 구불, 저리 구불 헤매다 경훈은 문득 의식을 차렸는데 그 앞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석제 계단이 가로 놓여 있는 것이다. 사방은 어두컴컴했고 그만그만한 나무들이 간혹 하나씩 희미하게 비춰지는 가로등 불빛을 피해 서 있었다.

'여기가 어디더라…'

남산이었다. 숨이 찼는지 계단을 느릿느릿 오르던 남순이 중간쯤에서 걸음을 멈추고 쪼그려 앉았다. 경훈은 말없이 그 옆에 자리를 잡았다. 어린아이 마냥 쌕,쌕 숨을 고르는 남순의 입김에서 진한 술냄새가 배어나왔다.

남산은 이미 경훈에겐 아주 낯익은 곳이 되어 있었다. 낮에는 장기나 바둑을 두는 사람, 그리고 길다란 벤치 위에 드러누워 낮잠을 청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던 그곳인데 사람들이 보이질 않았다.

머리 위를 가리고 있는 이름 모를 나무의 무성한 잎사귀 사이로 달빛이 소리 없이 스며들고 있다. 어디선가 이름 모를 새 울음소리가 들렸다.

바로 그때였다. 힐튼호텔 옆 고가도로 위를 간간히 달리는 차량들이 길게 드리우는 헤드라이트 불빛에 시선을 던져놓고 있던 남순의 입에서 분명 무슨 말인가가 나온 건. 경훈의 귀가 쫑긋하고 세워졌다.

남순의 입에서 다시 신음소리와도 같은 단말마가 이번엔 아까보다 훨씬 더 크고 분명하게 흘러나왔다.

"쳐죽일 놈의 새끼!!"

경훈은 화들짝 놀랐다. 물론 조금 전에도 못들은 건 아니었지만 반신반의했었는데. 놀라는 것도 잠시, 경훈의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뜬금없다'는 말이 이 상황보다 더 적합하게 쓰일 수는 없을 것이었다.

"……"

"경훈아!"

"……"

경훈은 차마 대답을 하지 못했다.

"우리 시골 가버리자. 이곳은 우리가 살 곳이 못돼."

갑작스런 혼돈이 술기운을 타고 전신으로 번져갔다. 경훈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벼락같은 소리를 들은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경훈의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남순은 무겁게 입을 떼었다. 그리고 경훈은 한참동안을 멍한 상태로 있어야만 했다. 귓속에서는 더 이상 고가도로를 질주하는 차들의 굉음이 울리지 않았다. 소라 껍질을 갖다대었을 때 들었던 허허로운 바람소리만이 고막을 찢고 뇌를 거쳐 가슴속으로 사무칠 뿐. 메아리가 울려댔다. 부정을 해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경훈은 대신 스스로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것 밖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내가 잘못 들은 게 분명해. 술 기운 때문일거야.

경훈이 그런 얼굴로 남순을 보았을 때 그녀는 다시 입을 열어 경훈의 마음속에 일던 일말의 희망을 갈갈이 찢어버렸다.

"나, 임신했어"

"임신이라면…."

경훈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갑자기 시골 마을을 떠돌던 한 미치광이 여자가 떠올랐다. 산발을 한 머리에는 항상 지푸라기 등이 붙어 있었고 사시사철을 견뎌낸 단벌 옷은 찢어지고 뜯겨져 군데군데 그나마 흰 속살이 드러나 보이곤 했다.

동네 아이들에게 그 여자는 대단한 존재였다. 경훈의 벙어리 삼촌조차도 하지 못하는 일을 그 여자는 해내고 있었다. 예고 없이 한 번씩 그 여자는 동네에 나타났다. 무슨 목적인지도 몰랐고, 또 어디를 가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녀의 이름 역시 아는 사람은 동네에 없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녀를 씹쟁이, 라고 불렀다. 경훈 역시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그 말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따라 부르고 있었다. 때론 아이들이 돌을 던져 쓰러트리는 사태도 있었으나 꼼짝하지 않는 그녀였다. 항상 무슨 일 있었냐는 듯 다시 슬금슬금 일어나 툭툭 옷을 털고, 역시 느릿느릿한 속도로 걸음을 옮기기만 할 뿐.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거나 씹쟁이, 라는 결코 유쾌하지 않을 것 같은 별칭을 불러대면 그녀는 아이들을 힐끗 쳐다보았다. 웃는 얼굴.

그런 그녀가 어느 날부터인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몇 달이 지났는데도 얼굴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가뜩이나 놀이거리가 없어 심심한 시골 아이들에게 그건 꽤나 큰 일이었다. 아이들은 뜬금없이 '야, 그 씹쟁이 왜 안나타난다냐' 하고 은근히 소식을 궁금해했다. 또 어떤 아이들은 '지금도 씹하고 있는 것 아녀' 라고 빈정대며 자신들이 괴롭히다 사라져버린 상대에 대한 애정을 간접표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몇 개월 뒤 아이들은 물론 동네에 일대 잔치라 할 만한 큰 일이 벌어졌다. 여자에 관련된 것이었음은 물론이다.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차림새를 한 그녀였는데 뭔가 많이 달라진 모습으로 그녀가 느릿느릿 동네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소복하게 쌓였던 눈이 기억나는 걸로 보아 한겨울이었던 같다.

"어…씹쟁이 왔다."

동네 입구에 있는 마을회관의 처마 밑에 옹기종기 모여 따뜻하게 내리쬐이는 햇볕을 받고 있던 무료한 아이들. 그 누군가의 입에서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쪽으로 쏠렸다.

이미 아이들을 보았음인지 여자 역시 헤죽헤죽 반갑다는 듯 웃으며 녹은 눈으로 인해 진흙밭이 된 마당을 지나 처마 밑으로 기어 들어왔다. 역겨운 냄새가 확, 코를 찔렀다. 아이들에게 이미 익숙한 일. 그래도 두어 발치 앞에서 걸음을 멈춘 여자가 아까보다 더 큰 웃음을 얼굴 가득 지었다.

"많이 뚱뚱해진 것 같은디…."

그러고 보니 그랬다. 그녀는 몰라볼 정도로 살이 올라 있었다. 산발을 한 머리 모양이나 여전히 속이 드러나 보이는 옷이나 달라진 게 없었지만 뒤뚱뒤뚱 거린다 싶을 정도로 뚱뚱해진 몸. 이유는 금새 드러났다.

헤죽헤죽 웃는 것도 다 그 이유 때문이었나 보다. 바로 그녀의 손, 시커멓게 먹물이라도 묻혀놓은 듯한 두 손이 연신 배를 만지고 있었던 것이다.

동시에 미처 아이들이 그 이유를 궁금해하기도 전에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 '우리 애기'. 그녀는 반복해서 '우리 애기'를 중얼거렸다.

아이들의 눈이 그 볼록한 배만큼이나 휘둥그레졌다.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와, 하고 폭소가 터져 나왔다.

"씹쟁이가 임신을 했단다이." "씹쟁이가 애기를 배았디아."

소문은 삽시간에 온 마을로 번져나갔다. 해질 무렵이 돼 경훈이 집에 들어갔을 때 이미 할머니조차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후 다시 아이들은 여자를 볼 수 없었다. 어디선가 아이를 낳는 모양이라고만 막연히 생각했다. 그러나 들려오는 이런 저런 소식들은 그게 아니었다. 대부분 어른들의 입을 통해 마치 전설처럼 떠돌던 그 얘기는 꽤 많은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우선 임신을 시킨 주인공이 누구냐 하는 것인데, 그 유력한 대상으로 윗마을에 사는 뽕나무집 영감이 지목되었다. 뒤뜰에 유독 뽕나무가 많아 그렇게 불렸던 그 영감은 말이 영감이지 경훈의 기억으로 그때 쉰 중반이나 되었을까 한 나이였다. 물론 매일을 들에 나가 살림을 연명케 하는 부인이 있었지만 그는 그 일이 있기 훨씬 전부터 화냥꾼으로 통했다. 동네에도 자주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양반행세를 했지만 분을 팔러 집집마다 돌아다니는 아낙을 방안으로 끌어들여 거사를 벌이는 게 동네 사람의 눈에 띄었다든가 하는 얘기는 경훈 역시 이전부터 익히 들었던 처지였다.

임신의 주인공으로 그가 강력하게 거론됐던 것도 뽕나무집 안방으로 들어가는 씹쟁이를 봤다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목격담 때문이었다. 그리고 소문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그녀가 뽕나무집 건넌방에 들어앉았다는 얘기도 있었고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는 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그 소문의 진실에 대해선 그 누구도 확인할 길이 없었다. 가끔 그 집 앞을 지날 때마다 호기심에 담 너머로 넘어다 본 건넌방은 항상 굳게 닫혀 있는 채였고 혹시나 무슨 소리나 들리지 않을까 하는 경훈을 비롯한 아이들의 호기심은 채워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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