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겨울 코스모스' 39회
'소설-겨울 코스모스' 39회
  • 이율 작가
  • 승인 2015.11.18 09: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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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순은, 그리곤 입을 다물어 버렸다. 누구의 아이냐는 말에도 그저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는 목메인 질문은 한번 수그러든 고개를 들게 하지 못했다. 아직도 채 사그라들지 않고 스며들어가는 귓속의 허허로운 바람이 가슴속을 헤집더니 마침내 이슬방울이 되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벌려진 가랑이 사이로 뚝뚝 무겁게 떨어져 내리는 이슬이 돌계단과 부딪쳐 파문을 일으켰다. 이슬이 번졌다. 희끄무레한 먼지가 수분을 받더니 반짝하고 빛을 발했다. 코끝이 아려왔다.

그리고 며칠 후 남순은 다니던 공장을 그만두었다. 경훈은, 몇 번이고 어머니에게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으나 끝내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눈치를 봐선 어머니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남순은 며칠간 자기 방에 틀어박혀 꼼짝을 않고 있었다. 식구들과 함께 식사도 하지 않았다. 경훈이 신문배달을 마치고 돌아오면 어쩌다 설거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 뿐. 남순이 집에 틀어박힌 이후로 시끄러웠던 집안도 웬일인지 조금은 조용해지는 분위기였다. 또 며칠 후 남순은 다른 공장에 서둘러 취직을 했다. 아이는…경훈으로선 모를 일이었다. 새삼 그 일을 남순에게 물어본다는 것 자체가 좀 그랬고 그저 남순의 태도를 살피는게 경훈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었다. 어머니의 남자는 이젠 경훈과 남순에게 아예 말조차 붙이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 밖에 나갔고 그리고 내키는 대로 집에 들어왔다.
 

만남

준오가 현장에 도착한 것은 상오 11시. 간수로부터 전화를 받은 지 정확히 25분 뒤였다. 간밤의 피곤을 달래느라 늘어지게 단잠에 빠져있던 미희는 짜증을 냈다.

남순의 할머니를 만나고 올라온 지 10여 일이 지났을까. 그동안 한 번의 재판이 열렸다. 물론 재판진행은 순조로웠다. 유일한 목격자이면서 사건의 당사자인 경훈이 아무런 얘기를 할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법정에서 혹시나 했던 준오의 기대는, 여지없이 깨어지고 말았다. 검찰은 현장에 있었던 모든 증거들로 옴짝달싹 할 수 없는 경훈을 더욱 옭아매었다. 누가 봐도 살인자는 유죄였다. 경훈은 긴장하지도 않은 모습이었다. 그저 오랏줄에 온 몸이 얽혀 툭 치기만 해도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연약한 어깨를 하고서는 쏟아지는 화살들을 고스란히 받고 있을 뿐. 머리가 희끗한 재판장 역시 글로써라도 입장을 밝혀줄 것을 경훈에게 요구했으나 그는 시선을 바꾸지 않았다. 며칠 간을 계속 토해내다 그저 아래로만 아래로만 침몰하는, '파브'에 걸린 한마리의 개에 다를 바 아니었다. 그저 죽음의 신이 한시라도 서둘러 자신의 마지막 남은 몸뚱아리를 거둬주길 바랄 뿐인 비너스의 그것과 다를 바 아니었다.

이제 사태는 모두 종결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준오는 재판이 끝난 뒤 한차례 더 경훈을 찾아갔다. 그리고 망설이던 끝에 남순의 소식을, 이번엔 비교적 소상히 알렸다. 그녀가 임신을 했었고, 그런 끝에 죽은 것이라는. 물론 뭔가 변화가 있을 거라는, 아니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 끝의 결단이었다. 잘린 비너스의 팔과 다리를 붙여주고픈 마음도 있었으나 그보다는 그를 처음 만난 뒤부터 느껴졌던 오묘한 기분이 우선이었던 것 같았다. 우수를 간직한 헤르게네스의 그것처럼 그의 눈엔 무거운 자물통이 채워져 있었고, 입은 사랑의 밀어를 나누다 들켜 두꺼운 아교가 발라진 아르메니우스의 그것처럼 열려지질 않았지만 그 안에는 분명 판도라의 상자 속보다 더한 색다른 세상이 들어 있는 게 분명했다. 자물통을 풀어야 했다. 이미 딱딱하게 굳어버려 섭씨 1800도의 용광로가 아니고서는 녹을 것 같지 않은 아교를 녹여내야 했다.

눈이 움찔했다. 남순의 죽음 부분이었을 게다. 유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곤 끝이었다. 곁에 있던 간수가 애절해할 정도로 간청을 하고 윽박을 지르고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준오는 그의 입에 물려보려던 담배를 대신 자신의 입에 끼워놓고 말없이 자리를 물러나야 했다. 그 철옹성이 준오를 보겠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한 겨울의 서울 거리는 마치 늦여름을 연상케 했다. 택시 운전사는 안개라고 했지만 준오는 그게 황사인 걸 알고 있었다. 한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지독했다. 희끄무레한 구치소 뒤의 산이 쪽배를 뒤덮으려는 검은 파도처럼 무시무시하게 보였다.

간수가 기다렸다는 듯 문을 열어주었다. 준오는 인사도 하기 전, 대뜸 '뭐라고 하던가요?' 라고 묻고서는 이전에도 결코 유쾌하지 못한 기분으로 몇 차례 경험했던 쾌쾌한 감방 복도를 앞장서 걸었다. 뜸직한 간수가 뒤에서 허리께를 콕콕 찔러왔다.

쪽지였다. 큼지막한 글씨로 쓰여진.

"김기자님 불러달라는 거요."

간수의 설명이 없어도 그랬다. 쪽지엔 준오의 이름이 선명하게도 쓰여져 있었다.

"참, 신기한 일이지. 단 한마디도 않던 놈이…"

간수가 서둘러 문을 열었다. 이전 같았으면 미동도 않을 경훈이 고개를 들었다. 많은 변화였다. 자물쇠를 갖다 댄 것도 아닌데 헤르게네스의 눈은 벌어져 있었고 용광로를 들이붓지 않아도 아르메니우스의 입은 열릴 게 분명했다.

하지만 경훈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준오의 목소리에 대답 대신 곁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불쑥 내밀었다. 허름한 A4 용지는 10여 장은 족히 되는 것 같았다. 표지도 없이 시작된 글은 깨알처럼 빼곡히 지면을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첫 문장을 읽는 준오의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갑자기 황달에라도 걸린 사람의 그것처럼 눈이 아릿해왔다. 걸음을 서두른 탓일까. 잠잠했던 호흡이 폐부를 벗어나 목 밑에까지 차 올랐다. 가빠진 숨을 타고 코를 찔러오는 누린내. 어젯밤 마신 술 탓일 게다. 준오는 얼른 고개를 들어 주먹으로 가려질 만한 자그마한 크기의 창 밖을 보았다. 무채색 하늘이 녹슨 세 개의 쇠창살과 어우러져 있을 뿐 새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아까 보니 저쯤에 분명 산이 있었는데. 그 꼭대기에 걸린 나뭇가지라도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녹황색 야채가 그리워졌다. 녹색으로 성숙돼 가는 연두색 잎파리의 신비가 간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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