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겨울 코스모스' 40회
'소설-겨울 코스모스' 40회
  • 이율 작가
  • 승인 2015.11.23 09: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다.

집에 오자마자 준오는 마침 마시다 남은 냉장고 안의 독한 빼갈을 들이켰었다. 간신히 늦잠에서 깬 미희가 뭔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는지 부스스한 산발머리를 갈무리하고 이미 습기를 잔뜩 먹어버린 맛없는 김 몇 장을 꺼내온 뒤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는 암캉아지 마냥 두어뼘 떨어진 곁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족히 500cc 용량은 돼 보이는 술병이 바닥 날 즈음 준오는 문득 암캉아지에게 남아있는 페로몬 향을 맡았고 주인의 충실한 종처럼 모든 걸 내맡긴 그녀의 사지를 희롱했었다.

"세상에나…."

지는 해를 따라 시선을 옮기던 준오는 문득 석양빛에 벌겋게 물든 노을을 발견했다. 황사가 사라진 모양이었다.

"이런 엄청난 일이…."

준오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미희가 벌거벗은 몸을 가릴 생각도 안한 채 창문을 열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계속해서 손에 들고 있는 서류를 좇고 있었다.

몇 시간이나 잠에 들었던 것일까. 준오는 마치 꿈속인 마냥 몇 시간 전의 상황을 되짚어 보려 엉뚱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어떡하다 잠이 들었지?

바람이 차가웠는지 준오의 맞은 편에 털퍼덕 주저앉은 미희가 이불을 끌어다가 여전히 비정상적일 정도로 매끄러운 두 다리 사이의 거무튀튀한 계곡을 덮었다.

찬바람에 실린 밤 꽃 냄새가 준오의 코를 확, 하고 찔러왔다. 어디선가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릴 만도 한데….

웃기는 세상

경훈이 집을 나간 건 순전히 남순 때문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고향에 내려가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순순히 모든 상황, 아주 기가 막힌 모든 상황에 척척 적응해가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는 그런 모든 것을 오히려 즐기는 것으로도 보였다.

경훈이 그 엄청난 일의 진실을 알게 된 건 남순이 첫 번째 임신을 한 뒤 몇 달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다니던 전수학교도 다니는 둥 마는 둥 하고 있던 때였는데 어느 날 마땅히 갈 곳도 없고 해서 무심코 집에 들렀던 그는 정말 경악스런, 정말 보지 말아야 했던 현장을 보고 말았다.

버얼건 대낮이었다. 대문을 열면서부터 이상한 느낌은 시작되었다. 그 느낌은 현관문을 열고 경훈이 들어서면서 더욱 확연히 다가왔다. 하지만 그 실체는 파악할 수가 없었다. 집안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낯익은 신음소리. 경훈의 가슴이 덜커덩, 내려앉았다. 서둘러 신발을 벗던 그는 소리의 근원이 남순 방이 아님을 깨달았다. 안방. 문은 빼꼼히 열려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발길이 조심스러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전에 들었던 신음소리와도 분명 뭔가 다른 게 느껴졌다. 일정한 리듬을 타고 규칙적으로 전해져 오는 사이로 남자의 숨소리가 배어있었다. 경훈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마음속에서는 이미 소요가 일고 있었다.

설마…설마….

대낮인데도 다소 어두컴컴한 거실로 안방의 불빛이 삐죽 고개를 내밀고 있다. 그리고 몇 걸음도 채 떼기 전에 경훈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다리가 휘청거렸다. 소리나게 벽을 짚었고 숙여진 고개를 들어 다시 한번 현장을 확인해야 했다. 뒤엉켜 있는 남녀.

경훈은 눈을 질끈 감았다. 여자의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 도화색으로 들뜬 여자의 얼굴이 보였던 것이다. 너무나 낯익은…. 그건 봄손님이 아니었다. 남순이었다. 경훈의 누이 남순이었다. 남자는…?

쇳바람이 일었다. 가슴을 헤집었다. 귀에서 뱃고동 소리가 났다. 적막이었다. 열에 들뜬 남녀의 신음소리도 이제 들리지 않았다. 그저 아련한 뱃고동 소리만이 계속되고 있었다. 기괴한 모습으로 얽혀 있는 남녀는 문틈이 열려있는지, 그 문틈 사이로 누가 쳐다보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더욱 격한 몸짓으로, 서로를 탐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웃기는 일이었다. 여자의 얼굴. 남자의 몸짓에 더욱 격렬하게 반응하는 여자의 얼굴. 그건 경훈의 누이 남순의 얼굴이 아니었다. 쾌락에 미친 한 마리의 암캐였을 뿐. 웃기는 일이었다. 진짜 웃기는 일이었다.

"씨발…."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남녀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 뛰쳐들어가려는 경훈의 발길이 얼어붙은 것은 순전히 여자의 얼굴 탓이었다.

"씨발…."

이번엔 좀 더 큰소리였다. 얼핏 남순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리고 경훈이 있는 쪽을 보았다. 눈길이 마주쳤다. 경훈은 증오로 활활 타고 있을 것이 분명한 자신의 눈을 돌려야 했다. 그리고 뛰쳐나왔다.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주) 뉴텍미디어 그룹
  •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서울 다 07108 (등록일자 : 2005년 5월 6일)
  • 인터넷 : 서울, 아 52650 (등록일·발행일 : 2019-10-14)
  • 발행인 겸 편집인 : 김영필
  • 편집국장 : 선초롱
  • 발행소 : 서울특별시 양천구 신목로 72(신정동)
  • 전화 : 02-2232-1114
  • 팩스 : 02-2234-8114
  • 전무이사 : 황석용
  • 고문변호사 : 윤서용(법무법인 이안 대표변호사)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주리
  • 위클리서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05 위클리서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aster@weeklyseoul.net
저작권안심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