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봅시다> 전방위 예술가 김형희 작가

 

소망의 가능성에 대해 한참을 생각해본다. 어떤 사람은 소망을 이루지 못한 게 노력이나 끈기가 부족해서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모든 건 그저 운이 잘 맞아야 한다고 한다. 나는 그 모든 걸 덮는 운명 같은 게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에게 신념과 끈기와 의지를 주는 건, 본능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운명의 힘이 작용하지 않을까.

 

▲ 전방위 예술가 김형희 작가

 

내 삶이 불운을 통과했다

김형희 작가는 교통사고 이후 척추마비가 된 상태로 붓을 잡았다. 그는 무용수를 그렸고 전시회를 열었으며, 이제는 자신과 같은 척추마비 장애인을 상대로 미술치료를 한다. 보통 사람은 두 다리로 뛰면서도 감당하기 힘든 일을 휠체어를 타고 종횡무진 누비며 소화하고 있다. 그를 움직이는 힘은 인간의 의지와 끈기의 영역일까.

김형희 작가는 원래 예고를 졸업하고 발레리나를 꿈꾸는 예술학도였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예술의 꿈을 안고 무용학과에 진학했지만 그의 작은 꿈은 23살 때 산산조각 났다. 친구의 차를 타고 남태령을 넘어서 귀가하던 늦은 밤, 친구가 실수를 하는 바람에 차는 중앙분리대 나무를 들이받았고, 뒷좌석에 앉아 있던 김형희 작가는 목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친구의 옆 좌석에는 친구의 남자친구가 타고 있었고, 안전벨트를 하지 않은 건 형희 씨 뿐이었다. 게다가 그 차는 친구의 남자친구 명의로 된 보험조차 들지 않은 차였다. 남들에게 이 정도 불운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눈을 뜨니 병원이었다. 목에 깁스를 한 채 꼼짝달싹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불구자가 되었다. 죽고 싶었지만 자력으로 죽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끊임없이 온몸에 항생제를 투입해야 하는 처지에서 피부는 극렬하게 부작용이 일었고, 살갗이 벗겨지는 상황에서 식욕촉진제로 버텨야 했다. 이렇게 항생제가 받지 않는 체질도 꽤 드물다고 하니, 이것도 불운이라면 불운인 셈이었다.

흉측한 얼굴로 퇴원한 형희 씨에게 낯선 삶이 들이닥쳤다. 두 발로 걸어 나갔던 집을 휠체어를 타고 6개월 만에 돌아왔지만 더 이상 예전 무용학도의 삶을 살 순 없었다. 그는 처음에 집에 안 들어가겠다고 버텼다. 그건 스스로를 위로하는 한 방법이었다. 아버지는 그런 딸을 위해 집안에 나무를 깎아서 만든 작은 재활치료 공간을 꾸렸다. 아버지는 형희 씨의 재활치료를 위해 직장까지 그만둔 터였다.

그렇게 척추마비 장애인으로서 제2의 삶이 시작되었다. 절대로 함부로 죽지 못하는 신세, 누가 절벽에서 휠체어를 밀어주지도 않고, 칼로 스스로를 자해할 힘도 없었던 그는 냉철한 머리로 차라리 사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고도 스스로 독해지진 않았다. 다만 열심히,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을 뿐.

 

누구의 삶도 모방하지 않는다

그림을 그리게 된 건 작업치료의 일환이었다. 처음에는 타이어에 줄을 매달아 손목에 묶어서 팔 힘을 기르는 연습을 했다. 그렇게 20대 무용수를 캔버스에 그리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결과물이 만족스러웠다. 10평 남짓한 작은 방에서,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 행복해질 수 있는 시간이 바로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었다.

그림을 통해서 무용수로서의 꿈을 그리는 과정을 느껴보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혼자만의 세계를 만들고 싶었던 것일 수도. 독학으로 홈페이지 만드는 원리까지 깨우쳤다고 하니 그는 유난히 표현의 욕구가 강한 사람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혼자서 그림만 그리는 생활을, 무려 10년 동안이나 했다.

“눈을 뜨면 그림을 그리고 홈페이지에 글을 쓰는 거죠. 거기에 재미를 붙여서 즐거움을 찾으려고 했죠. 그 시절이 금방 지나갔어요. 전혀 지루하지 않았죠.”

김형희 씨는 올해로 장애인이 된 지 꼭 23년이 되었다. 23살 때 다쳐서 46살이 되었으니 인생의 절반을 장애인으로 산 셈이다. 장애인이 되지 않았다면, 그는 소망대로 무용수가 되었을까. 끼가 많아 패션모델로도 활동하고, 무대를 기획까지 했던 그가 집밖으로 두문불출 했던 건 자존감이 떨어져서였다. 장애인이 된 이후 사람 눈을 똑바로 마주치는데 3년이나 걸렸다. 누군가는 그에게 눈동자가 풀렸다고 말하기도 했다.

 

 

“제 스스로에게 또 다른 생활권을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그런데 장애인이 되고 10년이 지나니까. 이게 한계가 있는 거예요. 그림이 늘지도 않고 저 혼자만을 위한 작품이니까. 그림을 그만둘까 진지하게 고민했죠.”

누군가는 그의 작품을 보며 천경자 화백의 그림을 닮았다 했지만 그는 누구도 모방하지 않았다. 다만 김형희 씨는 자신이 그린 작품이 하나의 의미를 갖기를 바랐다. 김형희 씨를 세상 밖으로 끌어낸 건 당시 인터넷 동호회인 나우누리에서 활동하던 한 남자였다. 김형희 씨를 데리고 다니며 그림에 대해 조언을 해주고, 세상 밖의 모습을 구경시켜주었던 남자는 ‘세계테마여행’ 프로그램의 작가이면서 사진작가도 하고 있는 유별남 작가다.

그는 그림을 통해 먼저 스스로 행복해져야만 다른 사람이 자신의 작품을 보며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걸 배웠다. 형희 씨가 좁은 방안을 벗어나 차의과대학원에서 임상치료를 공부하기 시작했던 이유다. 그는 전 세계 최초로 척추장애인의 미술치료와 관련된 논문을 썼다. 그리고 졸업 이후에는 국립재활원에서 척추환자를 상대로 미술치료사로 활동을 하게 된다.

“장애인 교사는 비장애인 교사보다 장애인의 마음을 잘 알 수 있죠. 처음 장애를 입게 되면 어떻게 살지 막막한 상태로 고민을 하게 되는데, 저를 보면서 마음을 빨리 다잡더라고요. 처음엔 자신처럼 치료를 받으러 온 사람인 줄 알았다가 제가 미술치료를 한다고 하니까 다들 굉장히 놀라요.”

 

이제는 남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

작업치료전공으로 대학을 졸업한 사람만 응시할 수 있는 작업치료사 자격증을 그는 휠체어를 탄 상태로 취득했다. 복지관이나 장애인센터를 찾아다니면서 미술치료 작업을 하고, 장애인표현연대라는 단체를 만들어 공연을 올리기도 한다. 연극과 무용, 음악이 결합된 움직이는 그림콘서트는 두 번째 열었다. 이 사람의 끝은 어디인가, 싶을 정도로 왕성한 창작욕에 남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열망으로 가득 찬 김형희 작가.

“그림을 함으로써 제 마음이 평온해지고 자존감이 높아진 거잖아요. 저는 저와 같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찾아주는 일이야말로 제 사명이라고 생각해요. 장애인이 된 사람에게는 소망이 필요해요. 그렇게 살 소망을 만들어주는 것을 미술치료가 할 수 있는 거죠.”

통계에 따르면 1년에 사고로 척추장애인이 되는 사람이 평균 2500여 명에 달한다. 적지 않은 수다. 그들 모두가 처음 형희 씨처럼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방황하는 암흑 같은 시절을 거쳐야 한다. 그들은 모두 김형희 씨 같은 존재가 필요하다. 2500명에게 꼭 필요한 인생이라면 그 삶, 살아볼만 하지 않을까. 그 영역에서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는 어느새 지워지고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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