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겨울 코스모스' 41회
'소설-겨울 코스모스' 41회
  • 이율 작가
  • 승인 2015.12.02 10: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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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경훈의 첫번째 가출이었다. 경훈은 그 길로 시골로 내려갈까 생각을 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신문 배달을 하는 일은 계속했다. 그래봤자 다 떨어진 소파나 한기가 드는 바닥이 전부였지만 그래도 유일하게 편한 잠을 청할 수 있는 곳이 신문보급소였던 것이다. 학교는 나가지 않았다.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경훈의 머릿속에 '암캐'라는 두 음절이 너무나도 또렷이 새겨져 있는 손님이 보급소로 찾아왔다. 경훈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암캐가 눈물을 흘렸다. 발정한 암캐의 희열에 들떴던 눈에서 액체가 흐르고 있었다. 경훈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렇게 돌아간 암캐는 며칠 후 다시 찾아왔다. 밖에 나갔다 들어오던 보급소의 경리가 쪽지를 전해주었다. 보지 말았어야 했다. 보지 않았으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경훈은 무심코 쪽지를 보았고 거기에 적힌 ' 마지막'이란 단어에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골목 저쪽에 암캐가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경훈이 나오는 걸 본 남순은 앞서서 걸었고 경훈은 언젠가처럼 그 뒤를 따랐다.

"어쩔 수가 없었어…."

'씨발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니까. 그럼 그 얼굴은 뭐고, 그 몸짓은 뭐였어.' 대답 대신 경훈은 침묵을 선택했다.

"많이 맞았어. 말을 듣지 않으면…."

남순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경훈의 눈에 핏발이 섰다.

"모두 다 죽여버린데…."

"뭐라고?"

"엄마, 나, 너 할 것 없이 모두 다 죽여버린데…."

"씨발, 언제부터 그런 것이여?"

일그러진 입에서 튀어나온 억눌린 음성. 경훈은 순간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럼 저번에 임신한 것도 그 개같은 새끼짓이여?"

"……"

"이런 씨발놈을…."

남순이 눈물을 훔쳤다. 이대로는 안될 일이었다. 경훈의 주먹이 부르르 하고 떨렸다. 남순이 미리 알고 저지를 하지 않았다면 그는 이미 그 자리에 없을 것이었다. 그녀는 말끝에 무슨 사고라도 친다면 진짜로 죽어버리겠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그녀의 눈에 핏발이 돋아있었다.

하지만 사고는 일어났다.

술잔이 자꾸 비워진다. 미희는 아까부터 계속 들떠 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씨부렁 거리며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 몸을 의식하는지 마는지 방안을 빙빙 돈다. 언제 샤워를 한 것인지 팽팽한 피부가 잔뜩 부풀어 올라있다. 길게 뻗은 다리는 적당히 살이 붙은 엉덩이가 무색할 정도로 움푹 패여 들어간 허리와 오묘한 조화를 이루었고 아담에게서 빼왔을 게 분명한 갈비뼈가 마치 실루엣처럼 은은히 투영돼 보이는 가슴 언저리에 고요스럽지만 묵직하게 얹혀져 있는 또 하나의 상징. 누가 봐도 소유하고 싶어할, 그녀의 몸이다.

준오는 입안에 침이 고이는 걸 느끼고 다시 술잔에 술을 따랐다. 거무스레한 액체가 요란한 파동을 일으킨다. 어느새 밖은 어두워져 있었다. 문득 술잔을 입에 대려던 준오가 방안의 차가운 공기를 느끼고 일어나 창문을 닫으려는 순간 부드러운 살결이 등에 와 닿았다. 오싹해진다. 찬바람을 오랫동안 맞고 있던 탓인가 보다. 부드러움 사이로 전해져 오는 딱딱하고 차가운 유두의 감촉이 준오의 말초신경을 자극하고 있다. 준오는 미희의 감긴 손을 가볍게 풀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술잔을 들었다. 글은 엉망이었다. 조그마한 글씨체로 정성을 들인 흔적은 역력했지만 준오가 또 그만큼 정성을 들여야지 만이 간신히 읽을 수 있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남순의 두 번째 방문으로 경훈이 더욱 힘들어하고 있던 무렵이었다. 무서운 것은 증오보다 더한 자괴심이었다. 무기력을 앞세운 그 괴물은 어느 장소에건, 어느 시간에건 나타나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마음속에 일었던 쇳바람은 날이갈수록 심해졌다. 그대로 있다간 미쳐 버릴 거라는 생각이 불화산처럼 솟구쳐 오르던 어느날 그는 보급소를 뛰쳐나왔다. 그리고 며칠인지도 모를 기간동안 서울역과 한강과 남산 등지를 전전하며 자신을 학대했다. 몇 번의 싸움이 있었다. 처음 여자를 접한 것도 그때였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그의 눈에 클로즈업 돼 들어온 한 여자의 씰룩거리는 엉덩이. 경훈은 설사 그 자리가 서울역 앞 대광장이었어도, 사람들이 운집한 한낮의 남산공원이었어도, 그날 그녀를 탐했을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어딘지 모를 골목길. 역시 술을 마신 듯 여자는 다소 비틀대는 모습이었다. 경훈의 앞을 스쳐 지나가는 여자에게서 '암캐'가 느껴졌다. 여자가 힐끗 남자를 쳐다보았고 남자는 여자의 눈빛에서 강렬한 욕망을 읽었다. 나머지는 모를 일이었다. 주변에 누가 있었는지, 그래서 그들의 요란한, 그러면서도 서투른 범행현장을 목격했는지는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여자는 어설프게 반항했다. 하지만 경훈의 행동이 격해지는 것과 함께 이내 촉촉히 젖은 몸을 그에게 내맡기고 말았다. 신음소리를 내던 남순의 얼굴, 뒤엉켜진 남녀의 몸이 머릿속을 헤집을수록 그의 행동은 야수처럼 더욱 격렬해져갔다.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분명 쌀쌀한 날씨였는데도 아랫도리를 훤히 드러낸 둘이 채 그런 날씨를 느끼기도 전에 일은 끝났다. 여자는 주섬주섬 옷을 챙기더니 화끈 달아오른 얼굴이 부끄러운지 황급히 자리를 떴다. 경훈은 한참 동안을 그 자리에 더 있었다. 그리고 그걸로 끝이었다.

며칠 뒤 경훈은 보급소에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사고 소식을 들었다. 남순의 자살이었다.

"씨발 잘 된 것인지도 몰러."

가슴이 쓰려왔다.

"살아서 뭐해."

목이 메어왔다.

패러독스한 용어들을 차가운 입안에 담으며 스스로를 위안하려 했으나 말짱 헛일이었다. 발걸음은 이미 병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튕겨 나오는 말들과는 달리 가슴에선 화산이 폭발했다. 몇천도는 족히 넘을 용암이 흘렀고 그 용암보다 훨씬 더 뜨겁고 붉은 색의 불방망이가 심장 가운데에 작렬했다. 병원에 어떻게 왔는지, 정문을 어떻게 통과했는지 그리고 남순이 있다는, 어쩌면 싸늘히 식은 몸뚱이를 하고 있을 지도 모르는 그 공간의 문을 어떻게 열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생명은 그처럼 손쉽게 처분할 수 있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의 눈에 비친 남순의 얼굴. 그녀는 살아있었다. 그제서야 옆 침대에 붕대를 싸 맨 채 누워있는 한 노인네의 얼굴이 들어왔고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노인네의 세파에 찌든 눈이 잔뜩 더 찌그러 들었다. 반대로 남순의 눈이 보름달 만하게 커졌다. 그리고 금새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가득 차 올랐다.

노인네가 뭔가를 알고 있다는 듯 쯧쯧쯧, 혀를 차댔다.

'병신, 뒈지지도 못하고….'

가까이 다가간 경훈의 입에서 개같은 소리가 흘러나올 뻔했다.

"……"

파리한 팔뚝 위 오목한 곳에 꼽힌 주사기를 타고 링거주사액이 방울방울 몸 안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생명수.

'저것 땜시 산 것인가 벼'

액체가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질 때마다 그녀의 얼굴에 붉은 색 화기가 번졌다.

"좀 괜찮은 것이여?"

대답 대신 남순은 고개를 끄덕였다.

"병신같이 이게 뭔 짓이여?"

의지와는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링거액이 너무 많이 들어갔나 보다. 생명수가 그녀의 한 가운데 쾡하니 뚫린 구멍을 통해 넘쳐 나오는 것 같다. 메마른 입술의 선을 따라 맴돌더니 이내 급격하게 떨어진 절벽으로 산화한다.

"쯧쯧쯧…."

노인네의 혀 차는 소리가 아까보다 크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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