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봅시다> 서예가 김영남 선생

 

영화 포스터에서 광고지, 스마트폰 문구 하나에도 캘리그래피가 유행이다. 캘리그래피의 본류는 서예지만 사람들은 서예가 인성의 철학이 깃든 예술이란 걸 알까. 만약 글자 하나에 수십 년의 인생 경험이 담겨 있음을 볼 줄 아는 안목을 가졌다면 좀 더 여유롭게 삶을 살 수 있을지 모른다. 한글 사랑에 유념이 없는 서예명인 ‘꽃실’ 김영남 선생의 이야기다.

 

▲ 서예가 김영남 선생

 

고백하자면 난 서예를 잘 모른다. 모든 예술가들이 선망하는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라는 그의 이름 앞에 붙은 권위적 수식어도, 내겐 그를 만나기 위한 허울에 불과했다. 김영남 선생의 작업실은 안양의 낡고 작은 아파트 상가 안에 있었다. 커다란 간판 대신 예스럽게 붓글씨로 적힌 상호와 마치 쇼윈도의 옷처럼 세로로 길게 진열된 선생의 작품을 보고, 여긴 흡사 박물관 같다고 생각했다.

64세. 슬하에 자녀를 무려 일곱이나 둔 어머니뻘 되는 여성이 곱게 차려 입고 방문객을 맞았다. 그는 주산을 해서 취업을 하던 시절, 회사에 다니며 틈틈이 서예를 접했고 지금은 그보다 나이가 많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명장이 되었다. 서예 하나로 인간을 논한다는 게 좀 거창해 보였지만 선생의 눈빛은 다정하면서도 진중했다.

“모든 건 트렌드죠. 단순한 취미활동은 요리나 운동처럼 그 시절이 지나면 남는 게 없어요. 저는 끝이 없는 것에 도전해보고 싶었어요. 그게 서예였죠.”

73년도에 서예를 처음 시작했으니 40년이 훌쩍 넘었다. 한문 세대가 아니었지만 사회적 통념은 서예라면 응당 한문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윗세대들이 한문을 가르쳤다. 하지만 김 선생은 ‘쓰고 싶은 걸 쓰겠다’며 한글 서예로 길을 텄다.

“한글이 우리글인데 왜 굳이 남의 글을 가져다 써요? 한문 서예를 고집하는 분들에게 저는 이렇게 물어요. 아니, 선생님은 어느 나라 사람이세요? 한국 사람이면 한글을 쓰셔야죠.”
 

한글로 사람과 소통하다

한문 서예를 좀 해봤다는 사람도, 한글로 글자를 써보라고 하면 머뭇거린다. 조금 장난스럽게 들리긴 하지만 나름의 이유가 있다. 한자는 획이 많고 서로 교차되니 얼핏 잘 쓴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한글은 자음과 모음 사이에 여백이 있어 밑천이 금방 드러난다. 한 치만 틀려도 실수가 눈에 훤하게 들어오는 것이 바로 한글 서예다.

한글 서예는 한문의 그것보다 사람들을 서로 소통하게 만든다. 김영남 선생은 서예가 사람을 만든다고 믿는 사람이다. 작품을 만들기 위해 좋은 글을 찾아서 쓰고, 쓰면서 암기가 되어 쓰는 이의 내면에 깃든다는 것. 필사보다 고상한 서예가 인성을 길러준다고 하는 말은 그런 이유에서 하는 얘기다.

“서예는 무조건 예쁘게만 쓰는 게 정답은 아니죠. 가치를 감싸고 있는 글은 격이 달라요. 사람이 심성이 곱고 화장까지 잘 하면 내면과 외면이 조화를 이루듯, 서예 또한 깊이와 모양이 두루 조화를 이룬 글이 작품인 거죠.”

서예를 하면서 심장 약을 끊는 사람이 그렇게 많다고. 그만큼 글을 쓰는 과정을 통해 내면의 조화로 몸이 길들여지는 것이다.

선생은 서예를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걸까.

“2평 남짓한 한글학교에서 사사받았어요. 저는 스승을 열심히 찾아다녔어요. 어떤 분들은 이름도 빛도 없이 숨어서 글씨를 하는 분도 계셨죠. 그런데 재능은 사회에 환원함으로써 내 존재를 인정받는 게 중요하고 생각해요.”

이름을 알리고 싶어 하는 이들은 대개 ‘공헌의 가치’를 안다. 내 작품이, 나라는 사람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걸 깨달은 순간, 자신의 가치가 한층 격상되고 삶에 보람을 느낄 수 있다는 건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한글 서예의 대부 ‘갈물’ 이철경 선생에게 사사하고 난 이후 김 선생은 본격적인 작가의 길을 걷게 된다. 서예가들의 국가대표격 단체인 한국미술협회 회원으로 등재되었고, 매년 정기적으로 작품 전시회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칠남매를 키우면서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잠자는 시간을 쪼개어서 작품을 만들어왔다.

서예 전문가들은 김영남 선생의 작품을 남성적인 힘이 느껴진다며 높이 평가한다. 많은 서예가들이 여성적 필체로는 한글에 힘을 싣기 어려워하는 반면, 김영남 선생은 굵직굵직한 선으로 자신만의 작품을 다듬어나갔다. 인터뷰 도중 써내려간 선생의 필체는 과감한 남성의 그것이었다. 칠남매를 키우는 동안 만들어지고 응축된 힘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짐작했다.


 

 

 

죽어서도 배우는 인간이 되어라

선생은 명예보다 가치를 통해 존중받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등단 작가라고 여기저기 나서는 것보다 지역사회를 위한 서예 강좌로 봉사를 하는 것으로 만족한다는 그. 선생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자신보다 10년, 20년 더 산 학생들을 앉혀 놓고 모든 걸 깨우친 듯 행세하는 건 허세라고 여기는 듯했다.

안양에 오래 머물렀던 터라 문화센터와 복지관을 통해서 고령의 학생들을 가르치다보면 선생 역시 학생이 된다. 천재화가 미켈란젤로가 그랬듯, 죽어서도 배우는 게 공부라는 생각에 가르치면서 배우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게 바로 ‘이 나이에 뭘 배운다고?’ 하면서 자포자기 하는 거예요. 저는 마음이 학생인 사람은 절대 늙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제가 서예 가르치는 분들에게 그래요. 여기서는 100살부터 나이를 거꾸로 매기는 거라고요. 그럼 제가 나이가 제일 많잖아요. 나이가 어린 사람일수록 배우려는 자세가 필요한 거예요.”

선생은 작품과 함께 사람을 남기고 있다. 깨우친 사람은 그런 것이다. 세대에 정신을 전수해주는 것. 작품 하나로 유명세를 떨치기보다, 사람을 키워내는 일이 더 중요하다. 반드시 정자세를 하고 앉아서 먹을 갈아 붓을 드는 것만이 서예가 아니다. 글씨를 쓰고 싶다면 장소는 관계가 없다.

“허공에다 글을 쓸 수도 있는 거죠. 제 수강생 중 90살이 넘은 어떤 할머니는 자기 전에 할아버지 배에다 손가락으로 글씨 연습을 한대요. 그럼 할아버지가 허허허, 하고 웃으신다는데 저는 그 말이 그렇게 듣기 좋았어요.”

틈틈이 작품을 만들고 수강생들과 만나며, 선생은 일주일을 하루 같이 바쁘게 사는 듯했다. 그 서예로 연을 맺은 수강생들과 ‘꽃실서우회’라는 동아리를 조직, 방과 후 교실과 복지단체 등을 찾아다니며 소외된 계층을 보듬는 따듯한 마음씨를 가졌다. 서예를 아는 사람이라면 선생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작품에 경의를 표할지 모르나, 나 같은 문외한은 그저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그의 맑고 청량한 정신에 잠시 기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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