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며칠뒤 경훈은 남순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물론 아니었지만, 또 그래서도 안되는 것이었지만 어찌할 수 없이 그에게는 남순이 있었다.

남자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천연덕스럽게 행동했다. 경훈으로선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한 번이라도 얼굴을 마주치면 욕설과 주먹은 물론이고 살인이라도 저지를 것 같았다.

행여 그의 목소리라도 들릴라치면 벌써 마음속에선 불덩이가 솟아올랐다. 온 몸의 세포가 일제히 깨어나 소요를 일으켰다.

자신의 무력함이 한탄스러울 뿐이었다.

중요한 건 어머니의 태도였다. 분명 모든 사실을 알고 있을 터인데. 남자와 짜기라도 한 듯 태연했다. 경훈이 어찌 행동을 하건 그녀는 안중에도 두지 않는 것 같았다. 몇 번이고 무슨 말인가를 해야겠다는 경훈의 생각은 항상 망설임으로 그치고 말았다. 경훈은 가급적이면 밖에 나가지 않았다. 그 역시 이유는 단 한가지였다. 바로 남순이 집에 있는 탓이었다. 그리고 이미 내려진 결론대로 경훈은 한 마리의 짐승과 또 이를 묵과하는 다른 짐승으로부터 남순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한달 여 뒤 경훈이 다시 집을 나설 때까지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최소한 겉으로는. 마치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인 양 적막만이 온 집안을 감쌌다.

두 번째 가출은, 경훈의 입에서 나오던 한숨소리가 마악 방문 틈을 삐져 나가려고 할 때 이루어졌다. 의도된 것은 아니었다. 별 일도 없었고 그럴만한 이유를 찾는 건 더더욱 힘들었지만 그래서 경훈은 나올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남순이 다시 공장에 나간 것도 하나의 이유라면 이유였다. 그녀는 거의 한 달만에 집을 나온 경훈이 찾아가자 조만간 공장 기숙사에 들어갈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얘기까지 해주었다.

다행이었다.

사실 의도된 가출은 아니었지만 그렇지 않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남순이 그런 경훈의 속마음을 알아 차렸는지 얼마간의 돈을 쥐어주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이미 익숙해져 있는 경훈의 부랑아 생활이 시작되고 있었다.

바닷가. 은가루를 뿌려놓은 듯 하얗게 빛나는 해변가. 파도에 닳을대로 닳은 조개껍질들의 반짝임. 언젠가 보았던 휴전선 비무장지대의 그것 마냥 녹을 잔뜩 뒤집어 쓴 채 널부러져 있는 생명을 다한 철조망. 이름 모를 바다 풀들이 무성한 둔덕은 어머니의 것인 마냥 아늑했다. 그리고 그 위에 다소곳이 피어있는 한 그루의 코스모스. 어쩌다 저런 곳에 피었을까. 바닷바람을 맞으며…. 어찌 홀로이 피었을까. 금방이라도 꺾여 버릴 듯 애처로운 모습을 하고….

그 코스모스는 그 다음해에도, 또 그 다음해에도 그렇게 피었다. 갯물이 질질 흐르는 무거운 조개 보따리를 등에 매거나 머리에 이고 그 곁을 스치는 사람들. 그들은 코스모스를 보았다. 그러나 감히 꺾을 생각을 하진 않았다. 그 안에 깃들어 있을 사연을 짐작했기에.

씨는 날아가고 또 다른 코스모스가 피어날 법도 했건만….

바다가 그리웠나 보다

님이 떠난 바다

백수광부의 처처럼

바위로 굳지도 못하고

침몰하는 정염을

온 몸으로 받아내며

물드는 핏빛 노을로

짠 바람을 게워내는

......

넌 왜 그곳에

그리도 서럽게 피어 있드냐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제부터 어떻게 할 것인가. 사회부 캡은 연신 호출기를 때려댄다. 휴가가 끝났는데 왜 신문사에 나오지 않느냐는 것일 게다. 전화 한 통은 해주어야 할 터인데. 생각도 못하고 있다. 미희가 유일한 끈이었다. 그녀는 준오가 서류를 받아온 날 저간의 사정을 알 수 있었다. 왜 준오가 그 사건에 그리도 집착하는지. 이미 끝난 일이었는데도 왜 그렇게 매달렸는지. 데스크에 어느 정도 암시는 준 모양이었다. 하지만 호출기는 그치질 않았다.

전화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래도 임마, 무슨 일인가는 얘기를 해주어야 할 것 아냐?"

얘기를 해야 하나. 못할 것도 없었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이런 황당한 새끼를 봤나."

지당한 얘기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데스크는 꼬리를 내렸다. 기십년의 사회부 경력이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게 한 모양이다.

 

 

 

 

키워드
#N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