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훈이 폭주족들과 어울리게 된 것도, 남의 집 담을 넘어 집안에 있던 여자를 강간하다 경찰에 붙잡힌 것도, 떼거지로 패싸움을 벌인 것도 모두 그 이후의 일이었다.

처음 그는 고향엘 내려갔다. 하지만 먼발치에서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남루한 초가집을 쳐다보기만 했을 뿐 차마 싸립문 안으로 발길이 떨어지진 않았다. 결국 할머니와 벙어리 삼촌을 만나는 걸 포기한 그는 그 길로 읍내로 나와 하룻밤을 그곳의 허름한 여인숙에서 보냈다. 혹 다음날이라도 찾아가 볼까 하는 생각을 염두한 것이었지만 거의 뜬 눈으로 날밤을 새운 이튿날 그는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려야했다.

지리한 부랑아 생활. 단 한번도 가보지 않은 세상이 그 앞에 펼쳐진다는 게 유일한 낙이었으나 그마저도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부담으로만 다가왔을 뿐. 주머니에 돈이 떨어지자 그는 여느 부랑아들과 똑같은 생활로 접어들어야 했다. 옷은 남루해졌고 백옥 같던 그의 얼굴엔 언젠가부터 자리한 시커먼 땟국물이 날이 갈수록 번져가고 있었다.

궁하면 구하고, 구하면 얻으리라. 그때 그는 아주 단순한 세상살이의 법을 배웠다. 배가 고프면 구걸을 했다. 그도 안되면 남의 집 담을 넘기도 했다. 처음엔 물론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한 목적 이외에는 어떤 다른 이유도 개입되지 않았으나 날이 가면서 욕구는 전혀 엉뚱한 곳에서도 꼬리를 드러냈다. 배설욕과 탐욕이었다.

아녀자가 홀로 있는 집들은 그런 면에서 아주 좋은 기회였다. 그는 주위를 살피거나 상황을 고려치도 않고 해가 중천에 떠있는 대낮, 담을 뛰어넘곤 했다. 그리고 잠겨있지 않은 시골집의 방문이나 현관문을 열었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은 채 일단 일을 저지르고 보는 것이었다. 처음에 반항하던 아낙들은 경훈의 무지막지한 주먹 아래서 고분고분한 양이 되었다. 어쩌면 시뻘겋게 핏줄이 선 경훈의 눈이 더 무서웠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경훈의 배설은 세상에 대한 포효였다. 난 이 세상을 정복했다, 는. 아낙들은 아무 소리 없이 경훈에게 밥을 내왔고 또 금품과 돈도 집어주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정복자에 대한 예우로서는.

발길이 어디로 닿는지, 자신의 그림자가 머물고 있는 곳이 어딘지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는 그저 정처 없이 헤매 다녔다. 마치 모든 세상을 자신의 손아귀에 다 넣기라도 하려는 듯. 눈에 거치는 놈들은 두들겨 패면 되는 것이었다. 힘이 부치면 무기를 들면 됐다. 아주 간단한 생존의 법칙이었다. 간혹 시비가 일었고 그래서 경찰서에 끌려간 적도 여러 차례 있었지만 그의 남루한 차림새는 아주 좋은 보호막이 되어주었다. 단순히 더 이상 갈 데가 없어서 올라온 서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지방에서처럼 함부로 행동을 하진 못했지만 이미 물들대로 물든 그의 생활습관은 도무지 바뀌질 않았다.

문제는 경훈 자신이었다. 피폐해진 의식의 잿덩이 위에 자신도 모르는 순간부터 다시 새로운 생명의 꽃이 피어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 생명의 꽃의 정체에 대해 경훈은 알지 못하고 있다. 장막 같은 습속 속에 철저한 어두움으로 가려진 그것은 비록 안에서는 꽃을 피웠는지 모르나 경훈의 몸밖으로, 그리고 세상 밖으로 고개를 들이밀진 못했다. 의식을 지배해버린 몸뚱아리. 생각이야 어찌됐든 오욕에 찌든 육체는 전혀 엉뚱한 세계를 헤맸고 그건 세월이 흘러가도 변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단지 그런 몸뚱아리조차도 어쩌지 못하는 한가지는 있었다. 바로 그리움이었다. 채 성인이 되기 전에도, 몸은 왠만한 어른들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지만, 그래서 그 누구도 그를 미성년으로 보길 꺼려했지만 정작 그의 내면엔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키워져 온 처절한 외로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나마 위안이 됐던 건 남순 뿐이었다. 하지만 부랑아 경훈에게 남순의 존재는 없었다. 아니 그럴줄 알았다. 여자들과 관계를 갖을 때마다 떠오르던, 알몸뚱이로 어머니의 남자를 부둥켜 안고 도리질을 쳐대던 남순의 모습은, 어느 순간 사라져버렸다. 대신 그 자리에 외로움이란 놈이 뛰어들었고, 그리움이란 놈이 채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놈들은 경훈이 특히 감옥에 가 있는 동안은 정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불쑥불쑥 튀어나와 한바탕씩 가슴을 쥐어뜯게 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준오는 겁이 났다. 캡에게 모든 얘기를 하고 상의를 하는 게 나을 것인가. 그렇다면 좋은 방책이 세워질 수도 있을 것인데. 하지만 거기에도 문제는 있었다. 캡이야, 이런 저런 사정 고려치 않고 무조건 기사화하려고 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렇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건 없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어차피 기사화는 되어야 하는 것이었지만 준오로서는 그 전에 확인해야 될 몇 가지 아주 중요한 일들이 있었다.

새삼 어깨가 무거워짐을 느끼며 준오는 머릿속에서 하나하나 해야 될 행동들을 정리해보았다. 두 번째 재판 날짜는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었다. 서둘러야 했다.

꽃이 피었다. 꽃이 졌다. 잎이 피어났다. 무성해진 잎사귀를 타고 빗물이 침입했다. 반가운 손님이었다. 이제 코스모스가 필 때도 되었는데. 하지만 코스모스의 자취를 기대하는 건 비좁은 감방에서 무리였다. 엄지손톱으로 가려질 만한 조그마한 구멍. 준오는 유일하게 세상과 닿아있는 그 구멍을 통해 세월의 흐름을 읽을 수 있었다.

코스모스 대신 어느 날부터 누렇게 탈색되어 가는 나무의 잎파리가 쇠창살 사이로 비치더니 긴긴 한숨을 내쉬며 하룻밤을 꼬박 뜬눈으로 지새우다 간수들의 불호령 같은 기상 소리에 몸을 일으킨 새벽, 자취를 감춰버리고 말았다.

'이제 나갈 때가 된 모양이구나.'

경훈은 짐을 챙겼고 얼마 안 있어 간수의 퇴소 소식을 들었다. 철커덩, 하는 교도소의 육중한 철문이 열리고 다시 더러운 세상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마악 한발을 내딛을려는 찰라였다. 자신이 서있는 곳으로부터 십여 발자국 떨어진 곳의 소나무숲. 낯익은, 무척이나 낯익은 한 그림자가 흔들림 없이 서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언뜻 스쳐버리려던 경훈의 고개가 다시 그쪽으로 돌려졌다. 이미 동공은 확대돼 있었다. 등골을 타고 오싹, 전율이 치밀어 올랐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그래서 가슴을 쥐어뜯어야만 했던 그녀, 남순이었다. 아니 자신의 누이였다.

그녀가 살짜기 웃어 보였다. 눈가에 빛이 반짝하고 어렸다. 초췌해진 모습, 퍼머를 해서인지 곱슬거리는 머릿결이 소나무 잎파리를 거친 싸늘한 바람에 하늘거렸다. 그런 채로 잠시 서있던 경훈의 눈에서 왈칵하고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경훈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철문 양쪽으로 군청색의 옷을 입고 소총을 든 채 서있는 교도관들의 삐죽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비련의 연인이라도 상봉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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