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겨울 코스모스' 47회
'소설-겨울 코스모스' 47회
  • 이율 작가
  • 승인 2016.01.22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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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순의 궤적을 좇던 경훈에게 갑자기 한가지 의문이 떠오른 건 고아원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였다. 그건 경훈과 자신의 괴리 때문이기도 했는데 바로 살인사건이 일어난 다음 며칠간 남순의 행적이었다. 준오가 휴가차 고향집에 머물던 중 남순이 내려왔다는 소식을 들은 것과 경훈이 전하는 남순이 행방불명된 시점 사이에 며칠의 공동이 파여 있는 것이었다.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고 그동안 남순은 어디에 가 있었던 걸까. 물론 아무 일이 없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준오에게 다가오는 직감은 그런 게 아니었다. 분명 그동안에도 무슨 중대한 일이 벌어진 게 틀림없다는 확신이 자꾸 드는 것이었다.

준오는 사건을 원점부터 다시 추적해보기로 했다. 경훈의 고백대로라면 준오가 지금껏 밝혀낸 것 외에도 경찰 조사와는 분명 다른 어떤 일들이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준오는 그로부터 단 하루 뒤 자신의 궁금증을 오히려 탓하고 말았다. 더러운 세상. 질퍽질퍽한 땅위에 뒤집어져 거품을 내뿜는 간질병 환자를 짓밟는 세상. 남순이 살았고, 경훈이 살고 있고, 준오가 역시 살고 있는 세상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가 갈렸다. 입안에 갈려진 이의 부스러기가 느껴질 정도로. 피눈물이 나왔다. 이건 정말 해도해도 너무한 세상이었다. 어쩜 이럴 수가 있는 것일까. 울음이 아니고 웃음이 쏟아져 나왔다. 허파에서 발현된 것이 분명한 웃음소리는 그렇기에 지극히도 공허했다.

의외로 쉽게 드러나 버린 남순의 행적 중 일부. 나머지는 굳이 몰라도 되는 것이었다. 고작 몇시간 잠을 부친 다음날 오전 궁금증은 간단하게 풀렸다.

세상에 그런 인생도 있을 수 있는 것인가.

집에서 나온 남순의 머리 위로 진눈깨비가 날렸다. 진눈깨비라기보다 빗물에 가까웠지만 남순의 눈엔 꽃이었다. 죽음을 부르는 사화(死花). 비틀거리는 발걸음이 그걸 증명했다. 찢어진 채로 풀어 헤쳐진 옷, 파고드는 차가운 바람이 그걸 예고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마치 마약을 한 듯 완전히 풀려버린 눈동자. 사람들은 못 볼 것을 보기라도 한 듯 슬금슬금 그녀를 피해 지나갈 뿐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어디쯤 왔을까. 남순의 시선은 그저 내리는 꽃들만을 좇고 있을 뿐. 찢어져 나풀거리는 얇은 옷은 젖을 대로 젖어 담아두었던 수분을 한방울 두방울 밖으로 토해내고 있다.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끊임없이 날리는 화사들은 어느새 그녀를 음습한 뒷골목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죽음만이 존재하는 그곳.

꽃은 여전히 춤을 추었다. 남순의 눈 속에서, 입 언저리에서, 찢어진 저 깊은 곳에서도. 봉긋 솟아오른 가슴 언저리를 희롱하던 꽃 한송이가 찢어져 갈라진 틈 사이로 쑤욱 하고 들어왔다. 남순의 가슴에 돌기가 솟았다. 꽃은 결코 가녀리지 않은 자신의 잎으로 남순의 젖꼭지를 어루었다. 몸이 가냘프게 떨렸다. 입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또 다른 꽃 한송이가 치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이미 시뻘건 피를 한껏 머금은 그곳에 다다르자 다른 꽃들을 불렀다. 기다렸다는 듯 연이어지는 꽃들의 행렬. 희미하던 신음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환락에 들뜬 죽음의 소리. 그 소리는 마치 지옥에서 들려오는 듯 했다.

남순의 몸이 어느 순간 한껏 뒤로 제쳐지는가 싶더니 그대로 길바닥에 나뒹굴어졌다. 바닥 역시 꽃들의 천지였다. 고통이 느껴져야 했을 테지만 그렇지 않았다. 어느 새 옷꺼풀은 전부 풀어헤쳐져 있었다. 젖꼭지를 희롱하던 꽃들은 이제 한껏 피를 머금은 은밀한 그곳을 어루던 꽃들과 합세했다. 순식간에 남순의 몸은 발가벗겨졌다. 완벽할 정도로 하이얀 속살. 찢어진 옷은 더 이상 필요가 없는 것들이었다. 꽃들이 웃고 있었다. 그 입에서 탐욕에 젖은 애액이 흘러나와 남순의 그곳에 떨어져 내렸다. 음침한 골목길은, 내리는 비와, 꽃들의 애액과, 남순의 은밀한 곳에서 흘러나오는 시뻘건 피로 온통 젖어들고 있었다.

불같은 뜨거운 기운이 남순의 그곳을 파고들었다. 순간 눈앞이 환해졌다. 그리고 꽃들의 정체가 보였다. 내리는 비 때문에 그것들은 마치 실루엣처럼 건들거리며 다가왔다.

하나가 무어라 얘기를 했다.

"하…고것 참 실하네."

남순의 눈이 지그시 감겨졌다. 딱딱하면서 뜨거운 기운은 몇 차례 남순의 아랫도리에서 도리질을 쳐대더니 헉, 하고 남순의 몸 위에 포개졌다. 이내 다른 놈이 똑같은 짓을 반복했다. 여전히 남순의 입에선 신음소리가 계속되고 있었다. 시간이 가고 있었다. 놈들은 연신 차례를 번갈아 가며 몇 번인가 남순의 몸을 들락거렸다. 남순의 눈에 떨어져 내린 빗물은 애욕의 그것과 합류하여 다시 세상 밖으로 흘러나왔다. 잔뜩 일그러진 입술에선 복숭아 냄새가 났다. 일을 마친 놈들은 남순의 찢어진 옷을 주워 자신의 아랫도리를 훔쳤다. 그곳에서 흘러나온 피가 빗물과 어우러져 검은 색의 아스팔트 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희미해지는 의식. 희미해지는 신음. 희미해지는 사이렌 소리. 어느새 남순은 깊은 죽음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의식을 잃은 사실을 알고도 놈들은 몇 번인가 더 남순의 몸을 탐했다. 그리고 이제 됐다는 듯 포효를 지르더니 문지르던 옷을 남순의 벌거벗은 몸 위에 던지는 아량을 베풀고는 정복자의 여유있는 발걸음 소리를 남기며 사라져갔다.

온통 어둠이었다. 몸은 끝이 어딘지 모르게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뭔가를 잡아야겠다고 생각을 했으나 어떤 것도 잡히는 건 없었다. 손을 저어봤다. 그저 매캐한 공기만이 손끝에 닿을 뿐. 한껏 벌려진 가랑이 사이로 무언가가 끊임없이 사무쳐 들어오고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것들은 자궁 안을 한바퀴 돌더니 창자를 거쳐 허파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이내 식도를 타고 입안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구역질이 났다. 뱉어내야 한다고, 그 모든 것을 토해버려야 한다고 의식은 외치고 있었으나 뭔가 알 수 없는 또 다른 것이 그것을 방해했다. 숨이 막혔다. 몸이 뒤틀렸다. 그리고 남순은 생각했다. 이제 죽음과 대면을 하는 모양이구나.

그 순간이었다. 남순은 갑자기 몸이 가벼워지며 붕 뜨는 것을 느꼈다. 어떤 강렬한 힘이 그녀의 몸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눈에 비치는 환한 빛. 무얼까. 눈을 떠야 한다. 그런데 이번엔 몸이 의식을 따랐다. 하얀색의 하늘. 그 가운데 매달려 있는 태양. 그것은 백열등이었다.

"의식이 들었나보네."

낯선 여자의 목소리. 눈꺼풀이 무거웠다. 간신히 지탱하면서 남순은 고개를 돌려보았다. 병원이었다. 몇 개의 침대가 놓여있었지만 다른 침대들은 전부 비어있다. 소리의 근원을 찾아 헤매는 남순의 눈동자를 의식했음인지 하얀 가운을 입은 여자가 남순의 아래쪽에 서 있다가 한발짝 다가왔다. 간호사였다.

"괜찮아요?"

"……"

살았구나.

생명은 그렇게 호락호락 버려지는 게 아닌가보다. 남순은 문득 이렇게 생각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됐을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요?"

"……"

카랑카랑한 목소리 끝에 통증이 묻어 나왔다.

"임신까지 한 몸으로 어쩌다 그런 봉변을…."

그랬구나. 임신이었어. 하긴 전혀 못 느낀 건 아니었다. 이미 몇 차례 경험이 있던 터였는지라 증세가 나타날 때 의심은 했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했던 것이었다.

"아이는 유산되었어요."

"……"

"수술을 하려고 했는데…."

워낙 상태가 좋지 않아 조금이라도 건강을 회복해야 하고, 그러기까지 하루 이틀은 걸릴 것이라고, 그녀는 묻지 않은 얘기까지도 해주었다.

간호사는 아울러 병원에 실려온 지 꼬박 하루가 지났다는 얘기와 얼마가 될지는 모르는데 당분간은 병원에 입원해 있어야 하니 보호자를 불러야 할 것이라는 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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