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보다 저잣거리 사람들과 함께 하며 더 많은 것 배워”
“학교에서보다 저잣거리 사람들과 함께 하며 더 많은 것 배워”
  • 김은영 기자
  • 승인 2016.03.15 10: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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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인터뷰> ‘리얼리즘 한국 미술’의 아버지, 임옥상 화백-2회

 

▲ 임옥상 화백은 새로 옮긴 고양시의 새 작업실에서 소소한 행복을 만끽하고 있다.

 

-사람들 곁에서 웃고, 울고, 고통을 함께 하고. 그렇게 예술가의 세계에서 대중들의 삶으로 내려와 함께 호흡하기 시작했어요. 대표적인 것이 ‘창신동 공작소’ 아닐까 싶은데요. 그 이야기를 좀 들어보죠.

▲공공미술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작품을 해나가니까 여러 제안이 들어왔어요. 그 중 하나가 ‘창신동 프로젝트’였죠. 처음에는 벽화도 그리고 작품도 가져다 놓고, 그런 박물관 같은 개념, 전시관 같은 개념을 생각했어요. 근데 가만 보니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보여요. 이런 식으로 해서는 안되겠다, 마을에 들어왔으니 지속발전가능하고 주민들이 여기서 끝까지 삶을 영위케 하는 ‘마을 재생 프로그램’에서 이런 전시관으로는 미흡하다, 그렇게 생각이 들었어요. 이게 사실 공모전에 낸 프로젝트인데 그런 생각이 드니까 2차 심사를 할 때 1차 심사 자료랑은 전혀 다른 걸 내게 된 거에요. 미술관, 전시관이 아니라 공작소다, 공작소로 가야 한다. ‘공작’이 무엇이냐? 단순히 만들어 낸다는 공작(工作)에 머물지 않는다. 비울 공(空)이다. 비워서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같이 공(公)이다. 공동체다. 같이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工作’· ‘空作’· ‘公作’ 이다. 이렇게 설명하고 설득해냈죠.

 

 

-저도 얼마 전 창신동에 가본 적이 있어요. 한 평도 안 되는 공간에서 아직도 재봉틀을 밟고 있는 모습, 쌀가게, 세탁소 등 30여 년 전 옛 모습이 살아있어 반갑더라고요. 뿐만 아니라 이런 상점들이 매우 정갈하고 깔끔하게 정리돼있다는 인상을 받았는데요. 곳곳에 사회적 기업들이 들어와 동네 자체를 매우 조화롭게 만들어가고 있었어요. 400여m 가량 내려오면 만나는 정신없는 동대문 거리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어요. 참 보기 좋고 평화로운 마을 모습이더라고요.

▲네, 맞아요. 아랫동네와는 정말 다른 모습이죠. 지금 창신동에는 10개의 사회적 기업과 공작소들이 있어요. 이곳은 1970년대 재봉질 하던 봉제사들이 남아있는 곳이에요. 이런 공간을 살려야 합니다.

제가 꿈꾸는 창신동 공작소는 한 개가 아니에요. 이 공작소가 한두 개가 아니라 ‘창신동’ 하면 ‘공작소’ 이렇게 불릴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이곳에 재봉틀 공작소, 인형 공작소 등 누구나 와서 무엇인가를 만들 수 있는, 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을 만들고 싶고 무엇보다 저는 창신동을 ‘단위면적당 최대 고용이 되는 동네’로 만들고 싶어요. 터를 닦고 멋있게 만드는 미술관이 아니라 단위면적당 고용이 엄청난, 작지만 단위고용이 최고인 그런 마을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 정도 가지고는 안 되니까 여기에 ‘창의’라는 옷을 입히자, 지속 가능한 마을을 만드는데 있어 여기서 인큐베이팅 제대로 한번 해보자, 그렇게 생각하고 작업하고 있어요.

요즘 ‘젠트리피케이션’이 문제이지 않습니까. 가격 저렴한 땅에, 마을에 예술가들이 들어오고 사회적 기업이 들어와서 사람들이 몰리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뭐에요. 건물 주인들이 임대료 올리는 거예요. 그럼 또 예술가들은 다시 위로, 달동네로, 변두리로 쫓겨 갈 수밖에 없거든요. 저는 창신동이 그러한 젠트리피케이션의 피해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동네, 가장 잘 저항할 수 있는 동네로 만들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노력해야죠.

 

 

▲ 농민의 분노를 표현한 '보리밭'(1983)

 

 

-옛날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90년대 당시 화단에서 호평 받는 흔히 ‘팔리는’, ‘잘 나가는’ 스타 화가였는데요. ‘전속 작가’이기도 했고 대학 강단에도 섰습니다.

▲그 때가 92년이었을 거예요. 당시 호암갤러리였죠. 그 때 제 개인전이 호암갤러리에서 열리면서 저도 소위 ‘메인 스트림’이라는 ‘주류 작가’에 턱걸이 한 거예요. 중앙일보, 삼성에서는 나름대로 ‘모험’을 했던 거죠. 그 때 제가 마흔 한 살이었어요. 젊은 나이였죠. 메인 등극에 일약 ‘스타’로 불러주더군요. 당시에 전주대학교 교수였는데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내 그림 작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여기저기서 러브콜이 들어오고, 가나화랑에선 전속작가를 하자고 하더라고요. 전속작가가 얼마나 편하냐면 그림이 안 팔려도 돈이 나와요. 그런데 그러다 보니 심적 부담이 커지는 거예요. 콜렉터들은 관심을 가지는데 돈은 안 되고 돈은 받고…좌불안석이었죠.

그러다 보니 그들이 원하는 그림을 그려줘야 하는 게 아니냐는 압박감이 들더라고요. 돈 있는 자들이 원하는 스타일로, 그들만의 ‘예술 세계’에 내가 맞춰줘야 하는가? 견디기가 힘들었어요. 어떻게 보면 정신적으로 도망치듯 미술관을 박차고 나가고 싶었어요. 마침 그 때가 97년 IMF 때였어요. 자연스럽게 계약이 해지될 수밖에 없게 되었죠. 뭐 다 줄도산 하던 시기였잖아요. 나라가 부도난 것이나 진배없었으니깐.

그런데 아무튼 화랑을 나와 보니 저축한 돈은 없고 그림은 안 그릴 수 없고, 그렇다면? 평상시에 꼭 하고 싶었던 것을 하자, 그렇게 마음먹었죠. 그리고는 그 다음부터 매주 일요일이 되면 인사동의 차 없는 거리로 나갔어요.

 

 

-인사동 시절부터 ‘거리의 작가’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죠. 그 때가 ‘공공예술가’로서 대중과 호흡하게 된 첫 시작인 셈이지요?

▲그런 셈이었죠. IMF 시절, 얼마나 고달팠어요?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굴지의 대기업들이 매일 도산하고 수많은 실직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지요. 일가족들이 차를 타고 가다 강에 처박히고 아파트에서 뛰어 내리고…. 불특정 다수들이 불행했고 절망하는 시간이었죠.

그런 이들에게 작지만 제가 가진 재주를 좀 나누어주어 조금이나마 그런 절망의 시간에서 꺼내주고 싶다고 생각한 거예요. 거기서 일반시민들과 만나서 매일 놀았어요.(웃음) 같이 놀면서, 예술을 공유하고 힘을 나누어주고 싶었죠. 이렇게 한 시절을 건너가 보자, 같이 극복해보자….

 

 

▲ 창신소통공작소

 

 

-‘당신도 예술가’라는 타이틀로 시작했는데, 반응이 대단히 뜨거웠습니다.

▲누구나 예술가의 혼을 가지고 있어요. 예술이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특별한 재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때부터 4년간 시민들과 함께 했어요. 함께 예술을 한 거죠. 수제 자장면 만드는 사람 10명을 찾아냈어요. 그들과 같이 수타면을 뽑기도 하고, 이게 소문이 나니까 일본에서도 찾아와요. 일본 공연가가 와서 같이 공연도 하고 정말 신명나게 놀았지요.

 

 

-당시 어디에 소속된 것도 아니고 무료봉사한 셈인데요. 그런 에너지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합니다.

▲나는 봉사한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시간들이 제게 오롯이 배움의 시간이 되었더라고요, 돌아보니. 대학 때 뭘 배웠겠어요. 전 대학이나 학교에서 배우는 것보다 그 거리에서 더 많은 것을 배웠어요. 거리에서, 현장에서, 사람들에게서요. 실제 대중과 다양하게 함께 하면서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어요. 의사로 따지면 그 때가 저의 인턴 과정이요, 레지던트 과정이었어요. 공공미술의 논리와 중요성을 그 때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 자신이 그동안 화랑을 중심으로 한 콜렉터 중심의 미술을 했구나, 돌아보게 되었죠. 당시 미술은 닫힌 ‘그들만의 리그’였어요. 과연 미술이, 예술이 ‘있는 자’들의 것인가? 그건 우리가 생각하는 문화예술의 방향, 진정한 방향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죠. 미술이 부자들끼리의 고급 취미로 전락해버렸어요. 미술에, 예술에 자본의 논리가 강화되면서 소수의 엘리트와 콜렉터가 공생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온 것이죠.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 것 인가, 이건 아니다, 나는 저잣거리에서 사람들이랑 같이 동고동락 하는 것이 좋다…그렇게 제가 가는 방향이 정해진 거죠.

 

 

-그러다 보면 ‘생활’이 어려웠을 텐데요. 당시 그냥 가만히만 있었어도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었는데 어떻게 보면 한쪽에선 비난하고 생활 측면에서는 어려움도 있는, 한 마디로 쉽지 않은 선택이었습니다.

▲생활고요? 그랬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날 부러워 합니다.(웃음) 내가 하고 싶은 걸 한다고요. 이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이고 가고 싶은 길이죠. 요즘에는 뜻을 가진 예술가, 전문가들을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제 후학을 양성하고 싶어요. <3회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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