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겨울 코스모스' 52회
'소설-겨울 코스모스' 52회
  • 이율 작가
  • 승인 2016.05.12 13: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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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몇 개월 전 수감되어 있다가 풀려난 김경훈은 출옥 후 마음을 바로 잡고 신문보급소에 취직, 일을 하고 있던 처지. 그는 구정이 되자 그간 자신의 누이였던 김남순에 대한 김기춘의 만행과 김미자의 거기에 대한 방관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래도 가정이라는 생각에 소고기를 사들고 집으로 들어가던 찰라였다.

그가 막 집 대문 앞에 이르렀을 때 사건은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김경훈이 본지에 전한 바에 따르면 집 앞에 막 이르렀을 때 남녀의 비명소리가 들렸으며 잠시 후 집안으로부터 온몸이 엉망이 된 김남순이 튀어나왔다. 그녀는 이미 이성을 상실한 상태였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적으로 느낀 김경훈은 우선 집안으로 들어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들어갔을 때 사건은 이미 모두 끝난 상태였다. 김기춘과 김미자는 이미 칼에 여러 곳을 찔린 채 죽어 있었고 사방은 온통 살육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김경훈은 그때 충격으로 말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그는 자신의 누이인 김남순을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을 본능적으로 했다.

경훈은 성큼성큼 다가섰다. 뭔가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으나 가슴속에서만 맴돌 뿐 입 밖으로는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마악 안방문을 넘어 설려는 찰라 여자가 무슨 낌새인가를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시뻘건 눈동자가 칼을 쥐고 다가서는 경훈을 발견하고선 찢어질 듯 부풀어올랐다. 동시에 수화기가 땅에 떨어졌다. 경훈은 칼을 높이 쳐들었다. 조금 전 여자가 나무 도마 위의 고기를 자를 때 그랬듯. 그리고 힘있게 내리쳐진 칼날은 정확히 여자의 정수리 가운데 꽂혔다. 짧게 터진 외마디 신음소리가 조용히 사그라 들었다. 여자가 눈을 뜬 채로 푹, 하고 경훈 쪽으로 고꾸라졌다. 발에 채인 전화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방바닥으로 떨어져 굴렀다. 고꾸라진 여자의 몸이 부르르 하고 요동을 쳐댔다. 정수리에선 꽂힌 칼의 좌우로 시커먼 피가 콸콸콸 쏟아져 나왔다. 바닥에 흐르는 피의 양이 많아질수록 여자의 몸이 잠잠해지고 있었다.

경훈의 이후 행동은 정해진 듯 보였다. 그는 이미 축 늘어져버린 여자의 몸에서 칼을 빼들었다. 그리고 한손으로는 시체의 뒷덜미를 잡았다. 쏟아져 나오던 피도 어느새 굵기가 가늘어지고 있었다. 피를 쏟은 탓인지 생각보다 가볍게 느껴졌다. 경훈은 시체를 끌고 다시 거실로 나왔다. 마치 하얀색 백지 위에 굵은 붓으로 붓글씨를 쓰듯 바닥에 피가 묻어났다. 경훈의 숨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경훈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버린 남자의 곁, 약 1m 쯤 떨어진 곳에 여자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잠시 그 사이에 주저앉은 채로 가쁜 숨을 골랐다. 스며든 피로 두툼한 건빵바지 차림의 엉덩이가 축축해지고 있었다. 그는 잠시 후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아까보다 훨씬 차분해진 모습으로 다음 작업을 이어나갔다.

김경훈은 자신의 누이가 살육에 이용했던 칼을 찾았다. 다행히 칼은 현장에 있었다. 그는 그 칼로 이미 죽어있는 김기춘과 김미자의 시체에 난도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온 몸에 묻은 피를 거실과 방안 등에 묻히고 다녔다. 물론 철저히 김남순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잠시 후 비명소리를 들은 옆집 사람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했고 김경훈은 현장범으로 체포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같은 시간 집을 나온 김남순은 정신을 잃은 채 거리를 배회하다가 거기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불량배들로부터 폭행과 함께 윤간을 당했다. 이는 본지가 면밀한 조사 끝에 직접 확인한 사실로 당시 김남순은 임신을 한 상태였다. 윤간을 당한 채 길거리에 쓰러져 있던 김남순은 길을 가던 행인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치료를 받던 중 유산한 사실까지도 알게 된다.

이미 삶에 대한 모든 의욕을 상실하고 있던 김남순은 병원을 몰래 빠져나와 고향으로 향했다. 그리고 또다른 만행의 흔적이자 자신의 분신이기도 한 아이가 있는 고아원에 들러 잠시 얼굴을 본 후 할머니와 삼촌이 사는 고향집으로 갔다. 이미 그녀는 세상을 등질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녀의 뱃속에는 죽어버린 아이의 시체가 들어있었다. 며칠동안 시름시름 앓던 그녀는 결국 뱃속의 아이를 따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본지의 끈질긴 취재 끝에 전말이 드러난 이 사건은….

경훈은 칼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남자의 몸에선 이미 피조차 흐르지 않았다. 그는 마치 정육점 주인이 고기를, 육중한 돼지고기 덩어리를 뒤척이듯 엎어져 있는 시체를 뒤집었다. 비릿한 살육의 냄새가 다시 코 속으로 강하게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는 얼굴에 주름살 하나 짓지 않았다. 입적을 앞둔 해탈승의 모습처럼 침착했다. 그리고 그런 채로 칼을 놀리기 시작했다. 이미 식어버린 남자의 살덩어리들이 그의 칼춤에 산산조각이 나고 있었다. 도마 위의 쇠고기들이 그랬듯 떨어져나간 살점들은 터진 수류탄의 파편들처럼 저마다의 방향으로 날아가 자리를 잡았다. 이미 잃어버린 주인을 대신하려는 듯 쇠고기를 썰던 나무 도마의 움푹 패인 그곳에도, 기능을 상실한 채 재충전만을 기다리는 길다란 모양의 벽시계 위에도, 격렬한 손의 움직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경훈의 얼굴 위에도 그렇게 내려앉았다. 경훈은 시뻘건 살육의 덩어리들을 떼어내기 조차 귀찮다는 듯 내버려둔 채 자신의 임무에만 충실했다. 칼날이 가 닿은 부위에선 채 밖으로 흘러내리지 못한 핏물들이 배어 나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경훈의 이마에 피가 뒤범벅이 된 땀이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경훈의 칼춤은 멈추어졌다. 얼굴엔 흡족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아직 더 할 일이 있었다. 일단 또 하나의 살덩어리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뒤처리도 해야 할 일이었다. 아주 깔끔하게.

어디선가 경찰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경훈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한번 칼춤에 몰두했고 사이렌 소리가 아주 크게 들려서야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 묻은 피를 손으로 정성스럽게 닦아내더니 거실과 방안을 돌며 이곳저곳을 열심히 어루었다. 자신의 지문을 남기는 것이었다.

경찰이 들이닥친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이미 현관 문 밖으로 흘러내린 핏줄기로 사태의 심각성을 알았는지 시커먼 얼굴의 경찰 한 명이 총을 빼고 잔뜩 얼어붙은 모습으로 뛰어들어왔다. 그리고 바로 그 뒤를 이어 약간은 젊어보이는 또 다른 경찰이 같은 모양을 하고 들어왔다.

어찌 보면 그렇게 우스꽝스러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너무도 태연한 희대의 살인마, 그와는 정반대로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며 마치 자신들이 죄를 짓기라도 한 것 같이 허둥대는 경찰들. 그들은 안방 문턱에 걸터 앉아서 공중을 응시하고 있을 뿐인 김경훈에게 족히 너댓발자국은 떨어진 채로 그렇게 총구를 들이대고 있었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그들이 얼마나 많은 사건 현장을 가보았고, 또 얼마나 많은 시체들과, 또 그들을 살해한 범인들을 접해 보았는지 모를 일이나 그날, 그 상황 만큼은 아닐 것이었다. 감히 사람의 언어로는 표현조차 하기 힘든 잔혹한 살육. 그리고 그 끔찍한 드라마의 주인공이 거기 있었으니. 온 몸은 떨어져 나온 살점과 땀, 그리고 피가 뒤범벅이 된 채 손에는 시뻘겋게 날을 세운 칼까지 쥐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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