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과 아름다움 격렬하게 뒤섞인 이 세계,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나?”
“폭력과 아름다움 격렬하게 뒤섞인 이 세계,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나?”
  • 최규재 기자
  • 승인 2016.05.18 10: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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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리뷰> ‘한국인 최초 맨부커상’ 소설가 한강-2회

<1회에서 이어집니다.>

▲ ‘한국인 최초 맨부커상’ 소설가 한강

 

- 작가로서 혹은 한 인간으로서 ‘왜 아직도 광주인가’ 하는 질문을 많이 받을 것 같다.

▲ 체르노빌의 피폭이 그 당시의 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수십년 동안 이어오는 것처럼, 광주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가까이 용산참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보통명사로서의 광주는 계속해서 얼굴을 바꿔 우리에게 돌아오고 있다. 더 끈질기게 애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당위로서가 아니라, 이것을 어떻게 잊을 수 있는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일 아닌가, 라는 질문을 되묻는 것이 맞는 방식이라고 느낀다.

 

 

- 광주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인 것 같다. 아직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세력들이 있다. 왜 이런 문제가 이어진다고 생각하나.

▲ 광주에서 있었던 일들이 당시 군부의 언론통제에 의해 오랫동안 극도로 왜곡돼 알려져 있었고, 그 결과 아직까지도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들이 일부 있다. 더 큰 문제는, 그 후 바로잡힌 광주에 대한 시각을 탐탁지 않게 여기며 국민들이 잘못 알기를 바라는 세력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배경 위에서 최근 몇 년 동안 심각한 수준의 왜곡이 일어나고 있다.

사실 광주를 왜곡하려는 사람들의 논리는 차분하게 대응하면 모두가 합리적으로 논박될 수 있는 것들이다. 역사적으로도 이미 증명된 부분이기도 하다. 다만 우려스러운 것은 청소년들이다. 왜곡된 정보로부터 그들을 보호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되고 있어서, 다음 세대를 이룰 어린 학생들이 자칫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다는 점이 걱정스럽다.

 

 

- 80년 광주. 점차 잊히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 ‘소년이 온다’를 쓰는 동안 몇 차례 망월동의 묘지에 갔다. 간절히 제가 바란 것은 그분들께 누가 되지 않는 것, 끝까지 힘을 다해 애도하는 것이었다. 진심으로 애도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고, 끈질기게 애도하는 일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끈질기게 응시하는 것.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그것뿐인지도 모르겠다.

 

 

- 소설이 독자들에게 어떻게 읽혔으면 싶나.

▲ 이 소설은 제가 쓴 것이지만, 동시에 제가 쓴 게 아닌 것 같다. 소설의 진행에 따라, 소년의 목소리를 이어받아 살아남은 사람이 말하고, 또 다음 사람이 이어 말한다. 그러니까 소년 동호는 1장에서만 말하고, 2장에서부터는 다른 이들이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는 가운데 동호를 기억하는 것이다. 독자들은 그 기억의 조각들을 맞춰 동호의 마지막 시간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게 된다. 그 과정에서 나는 어떤 통로로서 간절하게, 어떤 종교도 없지만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말을 받아 적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의 소년 동호는 용감하지도 강하지도 않은 평범한 아이, 상무관에서 시취를 없애기 위해 촛불을 켜고 주검들을 응시하며 혼들이 어디 있을까를 생각하는 예민한 아이다. 물론 고통스러운 소설이지만, 이 소년이 간절하게 말을 걸어오는 소설이라고 느껴주시면 좋겠다. 이 소년의 넋이 우리들의 삶으로 조용히 걸어 들어오는 소설이라고 느껴주시면 가장 좋겠다.

 

 

- 작품에서 이탤릭체는 어떻게 쓰이고 있나. 쓰임새에 있어 규칙이 있었는지.

▲ ‘채식주의자’에서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이탤릭체를 쓰기 시작해, 현재까지 소설에서 이탤릭체를 정체와 함께 쓰고 있다. 정체로 쓸 수 없는 어떤 말들을 이탤릭체로 쓴다. 때로는 과거의 기억이기도 하고, 꿈이기도 하고, 내면을 뚫고 나오는 어떤 말이기도 하다.

규칙이 있다기보다는 그때 그때 직관적으로 쓴다. 정체와 이탤릭체가 서로 싸우는 것 같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실제로 이탤릭체를 쓰면 글자들이 사선으로 기울어져서 정체와 곧 부딪칠 것처럼 보인다. 어떤 내적인 싸움을 담으려는 순간 이탤릭체를 쓰게 된다.

 

 

▲ 소설 '소년이온다'

- 시인이기도 하다. 앞으로 어떤 활동을 해나갈 예정인가.

▲ 시와 소설을 함께 쓰다가 시로 먼저 등단을 했고, 몇 달 뒤에 소설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단편소설과 장편소설들을 쓰는 일에 주력했지만, 1년에 적게는 2~3편, 많게는 7~8편 정도 시를 써왔다. 주로 이사를 한다거나 몸이 아프거나, 어떤 의미로 삶이 흔들리거나 할 때 시가 써졌다.

20년 동안 그렇게 조금씩 꾸준히 써온 시들을 모으고 추려서 작년에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를 냈다. 앞으로도 물론 시를 쓰겠지만, 일단 시집을 냈기 때문에 향후 20년 안에 시집을 다시 내지는 못할 것이다. 지금의 예감으로는 아마 이것이 유일한 시집이 될 것 같다. 결국 제가 온힘을 다해 써야 할 것은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은 선한 존재인가, 악한 존재인가’라는 질문은 수없이 되풀이돼 왔다.

▲ 저는 인간의 존엄을 믿고, 삶의 아름다움을 믿는 사람이다. 하지만 동시에, 훼손되지 않아야 할 것들이 훼손되는 순간들이 이 세계에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소년이 온다’를 쓰면서 한나 아렌트를 다시 찾아 읽으며, 악이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아렌트를 다룬 다른 글에서 인간의 악에 대해, ‘인간의 존엄성과 자신의 주체성, 타인의 고통을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악’이라고 쓴 구절을 읽었다. 악은 우리들 가까이에 있고 도처에 있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끊임없이 인식하고 응시해야 한다. 그렇게 끊임없이 애쓰는 게 살아있는 사람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 전작들에선 어떤 주제로 인간에게 접근했나.

▲ 세 번째 장편소설인 ‘채식주의자’는 ‘인간은 결백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담은 소설이었다. 육식으로 상징되는 인간의 폭력성을 토해내기 위해 채식을 결행하는 여주인공이, 종내에는 자신이 아무것도 해치지 않는 식물이 되어가고 있다고 믿으며 모든 음식을 거부한다. 한 인간이 완전한 결백을 실현하려 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우리에게 구원은 가능한가, 폭력과 아름다움이 격렬하게 뒤섞인 이 세계를 우리는 과연 살아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다음 소설인 ‘바람이 분다, 가라’는 이 질문들의 연장선에서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었다. 친구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투쟁하던 여주인공이 진실을 위해, 살기 위해 불 속에서 기어 나오는 것이 마지막 장면이었다. 그 장면을 쓰면서, ‘살아야 한다’는 대답을 마침표로써 쓰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 다음 소설인 ‘희랍어 시간’은 그 장면에서 한발 더 나아가보았다. ‘우리가 이 삶을 살아내야 한다면, 인간의 어떤 지점을 들여다봄으로써 그것이 가능한가’ 하는 질문이다. 인간의 가장 연한 부분, 따뜻한 지점을 오랫동안 응시하고 싶었던 소설이다.

 

 

- 소설 혹은 예술작품 등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편인지. 작가들은 세상에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 작가들은 끊임없이 앓는 사람들, 앓아야 하는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삶과 세계를 몸으로 앓으면서, 그 앓는 방식으로서 쓴다. 자신의 내면으로 내려감으로써 타인에게, 세계에게 몸으로 다가갈 언어를 찾아낸다. 무척 이상하고 역설적인 행위인데, 오직 그 역설을 통해서 세계에 접근한다. 작가들은 세상을 바꾸기 위해 발언한다기보다는 예민하게 흔들리면서 자꾸 질문을 던지는 존재, 그 질문들로 이 세계의 단단한 표면에 상처와 균열을 내는 존재, 그 균열을 비집고 세계의 표면 아래로 들어가려 애쓰는 존재라고 믿는다.

 

 

- 작가로서의 삶, 만족스러운지. 후배 작가들에겐 어떤 조언을 할 수 있나.

▲ 제가 작가로서 선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일찍 등단을 하는 바람에 꽤 오랫동안 문단에서 가장 어린 작가로 생활을 해서, 그 기억이 강하게 남아 있다. 더구나 글을 쓰는 한 모두 동료이지 선후배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사실상 조언하고 싶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앞으로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새로운 소설을 시작할 때는 언제나 0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라서, 함께 길 위에 있는 사람들로서 서로 바라보고 가만히 지켜보는 게 전부일 것 같다. 스스로는, 질문들을 품고 서성거리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작업이 글쓰기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 세월호 참사, 여전히 진행형이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 세월호에서 아이들을 잃은 충격과 함께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이른바 ‘보수’라고 불리는 이들에게서 연이어 흘러나온 말들이었다. 망자와 유족들을 욕되게 하는,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한 그 언어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한시바삐 구해야 할 생명들을 배 안에 둔 채 이익을 헤아렸던 이들도 있었다. 공권력의 무능과 부패, 그것을 다루는 언론의 방식들을 지켜보는 일은 고통스러웠다. 거기에 더 해 망자들과 유족들을 모욕하는 수많은 발언들을 지켜보면서, 지난 이명박 정부로부터 현 정부까지 정권을 가진 이들의 근본적인 패러다임이 얼마나 잘못돼 있는지 명료하게 드러나는 것을 느꼈다.

잊을 수 없는 장면은, 한밤 유족들이 진도대교를 건너고자 할 때 막아서며 채증을 했던 경찰들의 모습이 다. KBS에 항의하던 유족들이 아이들의 사진을 안고 청와대 앞 청운동에서 새벽을 맞는 모습, 평화적으로 추모 집회를 하는 사람들을 강제연행 하는 모습을 보면서 국가의 의미를 묻게 되었다.

국가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우리는 민주화되기 전으로부터 얼마나 전진해왔는지, 그 자리로 급격하게 회귀하는 중요한 기점에 서 있지 않은지 하는 고민이 뒤따랐다. 사건 초기에 이민을 가고 싶다고 고백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냉소하고 포기하는 것이 가장 위험한 일이라고 이제 저는 느낀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더듬어 찾으려는 움직임이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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