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그리고 삶, 생각> 강진수

가격이 저렴한 PB상품을 사자고 하자, 그래도 이름 있는 제품들이 이름값을 한다면서 옥시 제품을 집던 어머니가 달라졌다. 때가 덜 져도 옥시는 믿을 수 없다고, 락스며 욕실세정제며 세탁기 세제까지 다른 제품들로 바꿨다. 누가 목숨을 걸면서 이런 제품을 쓰겠냐며, 분노한 사람들은 마트로 우르르 몰려가 진열대에 놓인 옥시 물건들을 모조리 끌어냈다. 이제 옥시는 믿을 수 없어, 사람들은 화를 내며 옥시를 욕한다. 욕하는 것이 마땅하다. 화를 내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옥시 다음으론 무엇을 믿지? 무엇을 믿고 사야하지?

 

 

아무도 이것에 대한 답을 내놓으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안일한 생각 뿐, 한 번 이렇게 난리가 났는데 또 이런 일이 나겠어? 하지만 생각보다 문제의 재발은 흔하고 쉽다. 무엇보다도 이윤의 극대화라는 입장 앞에 선 기업들이 또 다시 누군가의 희생을 필요로 할 가능성은 높다. 사람이 죽더라도 그 죽음을 덮을 수 있는 돈과 힘이 있다. 그렇다면 기업들이 사람을 택할 이유는 전혀 없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다. 모르는 척, 애써 아닌 척 하지만 기업들의 선택은 절대로 순진하지 않다. 사람들은 잊어먹고 있다가 문제가 다시 불거지면 그때서야 소리를 높일 것이다. 그때서야 살고 싶어서 몸부림치는 것이다. 몸부림을 받아주는 것 같이 보이는 세상은 실상 그렇지 않고, 죽음에 대해 주판을 열심히 튕긴다, 조금은 죽어도 아무도 모르겠지.

이번 문제가 크게 다루어진 것은, 모두가 믿었던 브랜드가 철저히 모두를 배반하고 있었다는 점 때문이다. 이 정도 브랜드라면 우리가 믿어도 되겠지 하던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그만큼 이름값에 의존하고 믿음을 주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가 확연해졌다. 이름은 단순한 글자의 조합일 뿐인데, 그냥 일종의 기호일 뿐인데 우리는 그것을 소비하면서 신뢰를 주었다. 사실 이런 배반은 그런 우리의 안일함 속에서 당연히 일어날만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왜 잘못인지 모르고, 사과를 해야 할 때에는 온갖 거짓과 가장들이 판을 친다. 미안해할 줄 모르는 냉혈함과 뻔뻔함을 옥시에게 가져다 준 것은 옥시의 소유주인가, 아니면 그런 것을 보고도 손가락질 한 번 하지 않고 잘 넘어가주던 우리 사회일까. 부끄러운 것은 그렇게 여전히 우리의 몫으로도 남아 있다.

그 어떤 어머니도 자식을 죽일 마음으로 옥시를 구매하지 않았다. 자식에게 더 좋은 것을 해주고 싶어서, 이렇게 하면 내 아들과 딸이 더 건강하게 살아갈 것만 같아서 선택했던 순간이 어머니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죽음에 대한 슬픔과 애도보다도, 미안함과 죄책감에 몸서리치는 유가족들이 분노하는 이유가 그렇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희생을 강요당해야만 했다. 살인자는 물론 따로 있겠지만, 그들을 아무것도 모르게끔 한 사람들, 그들이 목소리를 내고 호소해도 귀 담아 듣지 않아준 사람들, 누군가의 목숨을 값으로 매길 줄만 아는 사람들, 그 사람들 모두가 어떻게 살인자가 아닐 수 있을까. 자식을 제 손으로 죽였다고 어머니 역시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기고 평생 죄책감을 떠안고 살아가야하는데, 세상을 살아가는 타인들은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은 반응이다. 비로소 옥시가 자신들의 목숨까지도 위협할 수 있다는 것에, 타인들은 분노한다. 그 분노는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한 분노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옥시가 영국에 본사를 두고 있어서 그렇다며 해외 기업을 이 땅에서 쫓아내야 한다는 멍청한 주장들이 난무하는 것 역시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지 꼬집을 필요가 있다. 어느 지점에서부터 이 문제가 발생하고 만연해왔는가에 대한 아무런 고민이 없는 일차적 인간들이다. 우리나라에 뿌리를 두고 있는 기업들은 어떻게 믿는단 말일까. 그만큼 믿음을 둘만한 곳이 아예 사라져버렸는데 그것을 다시 나라와 나라 간의 파벌 싸움으로 변질시켜 버린다. 우리나라 기업들은 우리나라 국민들을 더 생각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또 얼마나 많은 배신과 죽음을 낳을 것인지 고민해봐야 할 시점에 우리는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시도를 가만둬서는 안 된다. 다시, 주목해야할 문제는 이름값의 배신이다. 이름에는 믿음을 둘만한 그 어떤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믿음을 쌓아야 한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진열대에 놓인 옥시의 물건들을 바닥에 내던지고 불태우며, 보상금이 얼만지, 기업은 어떤 처벌을 받을지, 옥시가 어떤 의사를 표명했는지 따위에 대한 표면적인 뉴스에 귀를 기울일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쇼윈도적인 대처와 관심은 희생을 잊혀야 할 죽음 정도로 격하시킨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믿음을 붕괴시켰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이름값이 어디서부터 소비자들의 등을 공격하기 시작했는지에 대해서 고민해야 한다. 결국 그 믿음은 애초에 세워질 기반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았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돈 위가 아닌 곳에서 믿음을 다시 쌓아야 한다. 그래야 희생이 희생다워진다.

사실 이렇게 줄줄 분노에 가득 찬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그럼에도 믿음을 어디 한 구석에라도 쌓을 수 없게끔 만든 이 사회에 대한 더 큰 분노에 있다. 옥시에 대한 부끄러움이 여전히 우리의 몫인 이유 역시 같다. 기껏 돈 잘 벌어온다고, 일자리 만들어온다고, 이윤에 미친 기업을 만드는 것에 최선을 다한 우리 사회의 어른들이, 이제 와서, 믿음이 없는 사회에 대한 두려움을 호소해봤자 그 누구도 들어줄 사람이 없는 것이다. 희생을 강요한 것은 어른, 자신이면서도 시치미 떼는 어른들이 얼마나 많은가.

예전에 철학과라는 학과에 대해서 실용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다고 중얼거렸던 친구한테, 너는 어른이 돼서 부끄럽지도 않냐고 따져 묻고 싶다. 그래서 실용으로 가득한 사회에서 우리는 대체 무엇을 믿으며 살아갈 수 있는데? 최근에 교육부에서 대학들을 상대로 하겠다는 프라임 사업이 기가 막힐 노릇인 것도 마찬가지다. 인문학부를 모조리 취업에 유리한 실용학부에 편입시켜 버리겠다는 정부의 발상은, 얼마나 지금의 옥시를 같잖게 터져버린 여드름 정도로만 생각하는지를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믿음을 다시 쌓으려는 사회적 노력에는 모두들 외면하고 만다. 그냥 또 다른 이름값의 출현과 그것에 대한 신뢰가 만들어지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바람 속에서 누군가의 강요된 죽음이 또 나타나지 않기만을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기적과 요행을 바라는 사회는 정부가 다시 악수(惡手)를 두게끔 내버려두고 있다. 철학과 문학, 적어도 사람에 대해 고민하는 학문의 부재는, 아예 믿음을 둘 주춧돌마저 뽑아서 바다에 던져버리는 것과 같다. 믿음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실용성 속에서 그 친구가 실컷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대신 기도나 해줘야지.

수업에서 교수님이 뮌헨에서 일어난 사건을 이야기 해준 적이 있었다. 난민을 반드시 수용하게 법적으로 정해져 있는 독일에서는 난민들에게 쉘터와 음식 등을 무료로 제공한다고 한다. 일부 극우 집단이 이에 지속적인 불만을 가져오다가 뮌헨에 있는 난민 쉘터에 테러를 가했고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러자 소식을 전해들은 뮌헨 시민 이십만 명이 모두 난민 쉘터로 뛰쳐나와 서로 손에 손을 잡고 인간 울타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더 이상의 희생을 막겠다는 의지와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겠다는 믿음의 바탕이 그곳에는 있었을 것이다. 선진국이고 아니고를 따지지 않고, 좌파인지 우파인지에 매달리지 않고, 그것은 온전히 사람에 대한 믿음의 문제였기에 그들은 믿음을 새로 쌓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우리는 무엇을 믿으며 살아야 하는가. 선택권도 없이 죽어나가야만 했던 희생자들에 대한 안타까움 앞에서 우리는 어떤 믿음을 다시 쌓아갈 수 있는가. 그 고민이 실용적이지 못하다고, 또는 피곤할 따름이라고 무시당하는 사회에서는 옥시의 횡포 역시 잠깐 지나가는 이벤트에 불과하다.

다시 믿음을 쌓아야 한다. 다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위해서라도 다시 믿음을 쌓아야 한다.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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