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겨울 코스모스' 53회
'소설-겨울 코스모스' 53회
  • 이율 작가
  • 승인 2016.06.13 14: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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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것이었다. 1평 남짓한 감옥안. 삐그덕 거리는 나무로 된 침대 소리도 이젠 없어서는 안될 것이었다. 딱 한 뼘 반씩 되는 정사각형의 창문이 세상과의 끈을 연결시키는 비상구 아닌 비상구였지만 그것만으로도 극히 만족스러웠다.

나뭇가지의 흔들림으로 산들바람과 조우했고, 얼핏 스치는 초록의 싱그러움으로 한 여름의 뜨거움을 맛볼 수 있었다. 꽃이 피었을 것이었다. 꽃이 떨어졌을 것이었다. 부는 바람은 떨어진 꽃을 어디론가 실어갔을 것이었다. 녹음이 우거지고 또 그 녹음은 때이른 가을비에 고개를 떨구다 이내 색이 바랬을 것이었다. 떨어지는 낙엽을 본 적이 있었다. 근원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아주 잠깐 정사각형의 렌즈 안에 포착된 그것. 새삼 세월을 느낄 필요는 없었으나 그때 경훈은 느꼈다. 이제 그 혹독스러운 세상과의 조우가 다시 다가오고 있다는 걸.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이 내렸다.

하지만 경훈의 얼굴은 평안했다. 생애 내내 지워지지 않던 얼굴의 근심도 어느 순간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는 책을 읽었다. 방 한쪽 구석에는 이제 꽤 많은 책들이 쌓여가고 있었다.

재판이 열리던 날. 경훈은 전혀 예상치 않은 재판정안의 분위기에 놀라야 했다. 여기저기서 수근대는 모습이 보였고 자기를 구속 기소했던 검사와 판사들 역시 당혹스러운 빛을 감추지 못했다. 무슨 일일까.

하지만 원인은 금새 드러났다. 바로 준오가 쓴 기사였다. 준오가 선임한 것으로 보이는 변호사가 증거로 내놓은 신문. 이제 갓 40을 넘어섰을까 하는 변호사는, 하지만 머리는 온통 회색이어서 얼굴을 보지 않고서는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였다. 변호사는 마치 자신이 아주 큰 일이라도 해낸 양 의기양양하게 준오가 쓴 것으로 보이는 신문을 꺼내 펼쳤다. 약 5m는 떨어져 있던 경훈도 너무도 선명히 볼 수 있을 만큼 신문 1면의 거의 전체를 장식하고 있는 큰 활자. "뒤바뀐 희대의 패륜살인마"라는 타이틀이었다.

변호사는 태도만큼이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사건의 전체를 나열해갔다. 여기저기서 소요가 계속됐고 그때마다 판사는 분위기를 진정시키느라 애를 써야 했다.

검사가 휴정을 신청했다. 그리고 며칠 뒤 다시 재판이 열렸다. 역시 같은 내용이었고 사태는 경훈이 전혀 예상치 않았고 또 기대하지도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마지막 재판. 경훈은 마침내 자신조차 알 수 없는 미묘한 죄명으로 간신히 징역 1년만을 선고받았다.

'헛허허허.'

마음 저 깊은 곳으로부터 소리 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말 우스운 일이었다. 이런 코미디가 어디 있을까. 연출가는 물론 준오 한 사람이었을 것이고 경훈은 묵시적으로 거기에 동의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머지는 아무 것도 모르고 놀아나는 광대들일 뿐….

어찌되었건 경훈은 바로 서울 인근에 있는 감옥으로 이송, 수감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안가 교도소에선 일대 소란이 빚어졌다.

바로 경훈의 자살시도였다. 경훈이 입감하고 일주일 여쯤 지났을까. 비교적 형량이 적은 죄수들이 두 서넛씩 수감돼 있던 방. 사기죄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들어온 경훈의 룸메이트가 아직 동이 채 트지 않은 이른 새벽, 무심결에 눈을 떴다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경훈을 발견했다. 손 목에선 아직도 선분홍색의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그 바로 옆에는 손잡이 부분이 날카롭게 갈린 칫솔이 놓여 있었다. 의료담당 간수가 급히 뛰어들어왔다. 응급조치가 취해졌지만 경훈은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준오는 일단 인근에 있는 병원으로 옮겨졌다. 처음엔 담당의사들 조차 너무 피를 많이 흘렸다는 이유로 회생 가능성에 대해선 비관적이었다.

하지만 생명은, 언젠가 얘기했듯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만은 아니었다. 서울에 있는 한 국립병원으로 옮겨진 경훈은 며칠 뒤 의식을 찾았고 다시 그 '더러운' 세상과 인연을 이어가야 했다. 경훈은 사건 발생 한 달 여 뒤 다시 감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번엔 이전보다 몇 배는 감시가 더 강화된 방으로 수감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찾아온 면회객. 누구도 찾아올 사람이 없는 그였기에 다소 멀뚱한 표정으로 면회실에 나간 그를 맞은 이는 준오였다. 그는 몇 권의 책을 경훈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1년만 잘 참으라. 넌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는 말만을 남긴 채 떠나갔다. 홀로남은 경훈의 눈가에 눈물이 흘렀다. 무슨 이유인지는 그 자신조차 알 수 없었으나 폐부 깊은 곳으로부터 뜨거운 기운이 올라오더니 코끝을 찡그리게 하는 것이었다.

이후 그는 말 없이 창 밖만을 바라보기를 며칠, 그리고 어느 날 잊고 있었다는 듯 방 한쪽에 놓여있던 책을 집어들었고 그 속으로 빠져들었다. 잠을 자는 것과 밥을 먹는 것, 그리고 배설을 하는 것 이외에 그가 하는 일은 딱 두가지였다. 바로 책을 읽는 것과 창 밖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몇 시간 동안 책에서 눈을 떼지 않다가 이내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고 잠시 후 다시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얼마 뒤부터 우편으로 책이 날라져 왔다. 물론 준오가 보내는 것이었다. 특별한 내용을 담고 있거나 의미가 담겨 있는 책들은 아니었다. 그저 가볍게 읽을 수 있는 평범한 것들이었지만 경훈은 정말 무섭도록 그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날이 가면 갈수록 경훈의 경직된 표정도 몰라볼 정도로 풀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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