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그리고 생각> 류승연

같은 지역에 산다고 거의 다 비슷한 생활을 할 거란 생각은 오산이다. 아파트에 사느냐 빌라에 사느냐에 따라 엄연히 다른 생활권이 존재한다.

딸이 다니는 초등학교는 주택가 한 가운데에 위치해 있다. 고만고만한 크기와 비슷한 디자인의 대규모 빌라촌이 초등학교를 둘러싸고 있다.

지은 지 40년도 넘은 학교. 우리 남편과 시아주버님들이 줄줄이 졸업한 학교. 계단은 좁고 나 어릴 때나 봤던 쇠로 된 손잡이가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학교. 학생 수도 많고 학교도 크지만 강당이나 체육관, 식당 등의 부대시설은 없다. 교실을 꾸리기만도 벅찬 상태.

 

 

반면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아들의 초등학교는 뉴타운 내에 위치하고 있다. 사방이 아파트로 둘러싸인 아들 학교는 단지 안의 무성한 벚꽃이 자랑이다.

규모가 딸이 다니는 학교의 반 밖에 되지 않지만 인조잔디가 깔린 운동장도 갖추고 있고, 강당과 식당도 있다. 넓고 쾌적한 복도에는 예쁜 인테리어가 되어 있고 어항 속에선 갖가지 물고기들이 헤엄을 치고 있다.

두 학교의 차이. 그 사이에는 2~3억 가량의 주변 집값 차이가 있다. 빌라촌의 평균적인 매매가는 2~3억 대. 반면 같은 평수라도 뉴타운의 아파트는 4~5억 대에 매매되고 있다.

그 2~3억의 차이만큼 다른 생활권이 존재한다. 그 차이를 처음으로 느낀 건 아이들이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아이들 하굣길에 마중 나온 엄마들의 옷차림에서 뚜렷한 차이가 났던 것이다.

매일 아들만 데리러 가다가 딱 한 번 딸을 데리러 간 적이 있었는데 집에서 뒹굴다 점퍼만 하나 걸치고 나온 듯한 엄마들 모습을 보고 살짝 충격을 받았다. 번듯한 차림새로 마중 나온 아들 학교의 엄마들과 분위기가 달랐기 때문이다.

날이 더워지면서부터는 선글라스가 두 학교의 차이를 더욱 부각시켰다. 아들 학교에 마중 나온 엄마들의 상당수는 번쩍번쩍한 선글라스를 끼고 나타났다.

딸의 학교는 그렇지 않았다. 한 번은 단짝 아줌마 둘이서 나란히 선글라스를 끼고 교문에 나타난 적이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 다른 엄마들이 “오오~ 선글라스~”라며 놀려대자 그 다음부턴 맨 얼굴로 아이들을 데리러 나왔다.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차이만큼 내면적인 차이도 존재했다.

딸 학교의 엄마들과 만나면 일단 편했다. 서로 간의 벽을 허물고 친해지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너나 할 것 없이 집에서 뒹굴던 옷 그대로 입고 나오고 화장 안한 맨 얼굴을 매일 봤기 때문일까? 서로를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었고 나이를 확인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언니, 동생, 친구 호칭이 정해지고 말을 텄다.

아들 학교의 엄마들은 아무래도 좀 어려웠다. 5월에 공개수업이 진행되었고 자연스럽게 같은 반 엄마들끼리 모여 티타임을 가졌다.

엄마들을 처음 만나는 자리. ‘인간관계의 여왕’이라 불리던 나는 생애 처음으로 손을 덜덜덜 떨었다. 긴장을 해서. 장애아인 우리 아들이 반 아이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었기에 어찌 보면 나는 가해자 엄마의 신분으로 피해자 엄마들을 단체로 만나는 셈이었다.

시작부터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하는 상황. “반갑습니다”가 아닌 “죄송합니다”부터 말해야 하는 그런 관계. 물론 막상 티타임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주변에 앉은 엄마들과 얘기도 많이 나누고 잘 지내다 왔지만 나는 그 날 집에 와서 참 많이도 울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엄마들의 분위기가 달랐다. 내가 익히 아는 딸 친구 엄마들과 뉴타운 엄마들의 분위기는 확실한 차이가 났다. 옷차림과 액세서리, 가방 등의 차이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티타임이 끝날 때까지 서로 간에 말을 트지 않는 엄마들. 심지어 큰 소리로 깔깔 웃어대는 사람조차 없었다. 저마다의 방어벽이 훨씬 더 강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 달이 지나고 저녁 치맥(치킨과 맥주) 모임이 있어서 나갔는데 거기서도 마찬가지. 심지어 술자리였음에도 자정에 헤어지기까지 엄마들은 서로 존대를 했다. 동갑끼리도!

격을 갖추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 인간관계, 특히 말 많은 아줌마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아주 현명한 방법론이라 할 수 있지만 아무래도 정감은 없는 게 사실이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글을 읽은 적 있다. 두 학교 엄마들한테 느끼는 집단의 차이는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 엄마들의 차이가 드러난 것이었다.

딸 친구 아빠들 중엔 자영업을 하는 사람이 가장 많았다. 조심스럽게 물어보면 ‘작은 사업’을 한다고 말하는 엄마들. 고만고만한 살림살이들이었기에 처음 만남부터 아이들 학원비를 걱정하며 아르바이트 정보를 교환하곤 했다. 아이들 재워놓고 머리핀 만드는 바느질 부업을 한다고 말하는 엄마도 있었다.

뉴타운 아빠들은 일반 직장인이 대다수인 것 같았다. 아직 그 정도로 친하진 않아서 구체적인 직업과 직장명은 모르지만 SNS를 통해 들여다보니 가끔씩 동남아권 해외에 놀러 나가고, 계절마다 펜션이나 콘도를 빌려 국내 여행을 다니는 그런 생활을 하고 있었다.

경제적 여유가 삶의 모습은 물론 아이들의 교육도 바꾼다.

초등학교 1학년의 영어 공부. 딸 친구들은 학교 방과후 수업으로 영어 공부를 하는 아이들 이 가장 많다. 아예 영어공부를 시작하지 않은 친구들(우리 딸 포함)이 그 다음이고, 학원을 다니는 아이들은 몇 명 되지 않는다.

아들 친구들은 반 이상이 영어 학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가격이 우리 집 근처 학원의 두 배를 넘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많지 않은 엄마들은 영어 공부를 위해 학교 방과후를 이용하는 게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고, 경제적 여유가 충분한 엄마들은 비싸더라도 이왕이면 더 좋은 학원을 보내는 게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아이들 운동도 마찬가지. 태권도나 수영 등 10만원 정도 하는 단일 학원을 다니는 딸 친구들. 반면 스포츠단이라는 곳에 소속이 돼 여러 스포츠를 체계적으로 배우는 아들 친구들.

그들은 모두 각자 사는 대로, 각자 형편에 맞춰, 각자에게 자연스러운 선택을 하며 살고들 있다.

그럼 나는 어떨까? 두 학교를 모두 오가며 양 발을 하나씩 담그고 있는 나. 경제적으로는 빌라촌 생활권에 속해 있으면서 정신적으로는 뉴타운 엄마들과 더 공통점이 많다.

딸 친구 엄마들 중에는 대학을 안 나온 사람들도 꽤 있어서 가끔 나는 그들에게 ‘가장 똑똑한 사람’이 되거나 ‘엄청나게 고상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반면 아들 친구 엄마들 사이에서는 비슷한 교육을 받고 비슷한 직장생활을 경험한 평범한 일원이 된다.

하지만 아들 친구 엄마들이 좋은 여행지의 정보를 교환하고 값비싼 학원을 잘 가르친다며 추천할 때 나는 입을 다물고 할 말이 없어진다. 딸 친구 엄마들의 소박함이 그리워진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나는 이제 완연한 빌라촌 아줌마가 돼 버린 걸까? 아니면 형편이 안 되면서도 생각하는 대로 살려고 발버둥치는 초라한 이상주의자가 되어 가는 걸까?

두 학교를 오가며 두 개의 정체성을 모두 경험하고 있는 난 아직도 좀 혼란스럽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적응이 되겠지. 그것이 무엇이든 시간은 약이니까.

그리고 여기서 아무리 아파트는 잘 살고 빌라는 못 살고를 나눠봐야 서울 변두리일 뿐이다.

“엄마들하고 낮에 만나면 실내 골프장에서 시간 보내다 와인 한두 잔 마시러 가지”라고 말하는 대치동 친구에게는, “반 아이들의 절반 정도는 아빠 직업이 의사”라고 말하는 반포 친구에게는, 우리 동네 뉴타운 엄마들 역시 명함도 못 내밀게 되는 것이다. 그런 것이다. 인생이란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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