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인터뷰>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1

'노동(勞動)'은 인류가 태어나면서부터 짊어진 숙명이다. 구약성경 창세기(3:9)에 “너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먹으리라”고 기록됐을 정도로 노동은 고대농경사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간 활동의 중심이다. 고대문명은 노동을 기반으로 세워졌다. 권력을 가진 기득권자들은 노동력 확보를 위해 전쟁을 벌여 식민지 영역을 넓혔다. 그런 구조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피와 땀을 착취하며 부를 쌓는다. 1970년대 한국의 수출주력산업은 노동집약적인 봉제 산업이었다. 봉제공장들은 주로 청계천을 중심으로 약 3000개가 밀집해 있었다. 노동자는 대부분 지방에서 상경한 10~20대가 주축이었고, 학력이 낮은 이들은 근로기준법조차 모른 채 열악한 환경에서 중노동과 임금체불에 시달려야 했다. 그 시절 동생과 대구에서 상경한 전태일 열사는 온갖 굳은 일을 전전하다가 봉제공장에 들어가 5년 만에 재단사가 되었다. 하지만 동생들 같은 어린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과 노동법이 지켜지지 않는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의로운 투쟁에 나선다. 가슴에 노동법전을 안은 채 근로기준법을 준수할 것을 요구했고,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는 외침과 함께 분신자살했다. 노동의 개념조차 없던 그 시대에 그의 죽음으로 지식인층에서 새로운 각성과 반성을 이끌어 내는 계기가 됐다.

 

▲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렀고 80년대를 걸치며 민주화란 감동의 물결까지 경험했던 우리 사회는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전태일이 필요한 상황이다. 전태일재단 이수호 이사장을 만나본 이유다. 이 이사장은 별명이 ‘마른 막대기’다. 평생을 교사로 살아오면서 누가 가져다 쓰면 최선을 다할 뿐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이라고 했다. 교육운동과 노동운동의 선상에서 투옥까지 감내하며 전교조 위원장, 민주노총 위원장, 민주노동당 최고위원 등을 맡기도 했고, 서울시교육감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도 그를 필요로 하는 약자들이 있는 현장이라면 어느 곳을 마다 않고 달려갔다. 서그는 지금도 한국갈등해결센터 일을 겸하면서 약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 틈틈이 글도 썼다. 수필집 ‘일어서는 교실’, ‘달리는 자전거는 넘어지지 않는다’, ‘사랑의 교육 희망의 교육’, ‘다시 학교를 생각한다’와 동화집 ‘까치 가족’, 시집으로 ‘나의 배후는 너다’, ‘사람이 사랑이다’ 등이 있다.

그를 전태일 열사의 모친 이소선 여사가 세상을 뜨기 전까지 살았던 종로구 창신동 집 근처에 있는 전태일재단 사무실에서 만나 열사 이야기와 노동운동사, 한국의 노동문제 등에 대해 들어봤다. 다음은 심층인터뷰 전문이다. 3회로 나눠 게재된다.

 

 

- 전태일재단에 대한 소개부터 해달라.

▲ 당시는 유신시대 1970년대로 사회적 경제적으로 어려운 때였다. 전태일 열사가 순직한 후, 어머니 이소선 여사께서 그의 정신을 이어 고난과 역경의 삶을 사시면서 ‘전태일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유지를 받들어, 청계천의 3000여개 공장의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해서 청계피복노조를 만들었다. 이후에 전 열사를 기리기 위해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를 설립했으나 운영여건이 여의치 않아 ‘전태일기념사업회’로 명칭을 전환하면서, 전태일의 삶과 정신 등을 기리는 사업회로 발전해왔다. 사업회는 노동자들과 노동조합운동, 전태일 문학상, 전태일 평전읽기 사업 등을 했다. 당시 독일의 한 노동단체와 국내노동단체가 이 여사에게 후원금을 지원했는데, 그 돈으로 힘겨운 노동자들의 쉼터를 위해 사무실을 마련했다. 그러다가 고령이던 이 여사가 소유한 집 두 채를 팔아 공공명의로 지금의 ‘전태일재단’ 건물을 2008년에 매입했다. 이곳 창신동에는 아직도 열악한 환경의 봉제공장과 나염, 피혁공장들이 많다. 노동역사의 한이 서린 이곳을 서울시는 봉제특구로 지정할 예정이다. 전태일재단은 장학사업과 문화사업에 주력하고 600여명 되는 회원들과 100여개의 노동조합으로부터 후원금을 받아 운영을 하며 4명의 직원이 상주하고 있다.

 

 

- 전태일 열사가 세상을 뜬 뒤 숱한 세월이 흘렀지만 정작 달라진 건 없는 것 같다. 비정규직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고 노동자들의 삶은 한치 앞을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팍팍하기만 하다. 지금도 국회 앞에선 알바노조 소속 젊은이들이 최저임금 1만원 법 추진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을 하고 있다.

▲ 과거 정권과 재벌간 정경유착으로 노동자들은 너무나 소외당했다. 노동자는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으로 신체적 정신적 재해를 당해도 보상받기가 어렵다. 노동자를 위한 최대 단체로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있다. 하지만 조직도 탄탄한 이들 양대 노총이 기대한 만큼 2000만 노동자들의 아픈 곳을 어루만져 주지 못했다. 이제라도 최저 임금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고통을 줄여줘야 한다. 우리와 달리 서구사회는 주로 산업별노조가 많다. 한국은 기업별노조가 중심이다. 특히 한국의 산업별노조에는 젊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청년유니온’이 조직돼, 현재 ‘알바노조’와 함께 국회 앞에서 최저임금 1만원 실현을 위해 단식농성을 하고 있다. 하지만 봉제노동자들은 이보다 더 음지에 있고, 더 열악한 환경에서 소외당하고 있다.

 

 

▲ 재단 전경

- 1970년 청계천 봉제공장에서 일하던 전태일 열사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며 몸을 불살랐다.

▲ 1970년대 청계천 상가 지하에는 대부분 작고 영세한 봉제공장이 많았다. 청계시장과 평화시장 등지에서 일하던 노동자가 3만 여명에 공장만 3000여 개로 규모가 컸다. 대부분 다락방이나 지하여서 열악한 환경에 급여도 밀릴 때가 많았다. 전태일 열사는 지방에서 올라와 처음에 봉제 시다(조수)부터 하다가 5년 만에 재단사가 될 정도로 노력파였다. 중간관리자가 되면서 미싱사와 시다에게 봉급을 줄 정도로 성장했다. 그렇게 지속했다면 지금쯤은 거대한 섬유회사 회장이 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성공가도를 접고, 자기보다 못한 14~16세 여공들이 일하는 모습이 안타까워 노동환경과 노동악법 개선을 위해 분연히 나섰다. 전태일 열사가 보니 근로기준법은 완전하게 되어 있었지만, 아무도 지키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는 말을 외치며 의연히 분신했다. 그때는 산업사회초기여서 노동탄압이나 노동에 대한 개념이 없던 시절이다. 그럼에도 사회적으로 ‘이럴 수는 없다’는 각성이 대두되면서 지식인 그룹인 서울대, 연대, 고대, 이대 학생을 중심으로 대규모 노동운동이 일어났다. 이때부터 노동운동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커졌다.

 

 

-하지만 그로부터 45년이 훌쩍 지난 지금의 현실을 보면 아직도 최저임금조차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부지기수이고 비정규직만 늘어나고 있다. 뭉쳐서 한목소리를 내도 모자랄 노동계는 사분오열 된 채 뚜렷한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 전 열사는 평소 ‘나에게 대학생 친구 한 명만 있었어도 힘이 됐을 텐데…’라고 말하곤 했다. 왜냐면 당시의 법전이 모두 어려운 한문이다 보니, 읽을 수가 없어 친구의 도움을 원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근로감독관이 정확하게 법대로 처우하는 것도 아니었고, 대학생 친구에게 물어보려 했던 것이다. 지금은 많은 이들이 노동법을 알지만, 아직도 사회적 모순과 구조적인 문제로 인한 빈부격차의 상대적 인식은 여전하다. 최저임금도 못 받는 노동자들이 전체 노동자의 절반이 넘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고통을 당하는 건 하층노동자들이다. 이런 문제를 놓고 정치적으로 어떻게 싸울 것인가가 늘 고민이다. 초기의 노동조합은 모두 하나였다. 임금이 매우 열악한 금속노조나 자동차, 기계노조 등이 그랬다. 일부 임금지불능력이 있는 현대는 그나마 좀 나았다. 그런데 노동력에 의존하던 봉제 산업이 국가수출 주력산업이었다가 하향산업으로 바뀌면서, 거대 봉제회사들이 중국과 베트남 등으로 값싼 노동력을 찾아 빠져나갔다. 국내에는 가내수공업 형태의 공장과 틈새시장만 남아있으며, 아직도 노동자들의 노동환경은 별로 개선된 것이 없다.

 

 

- 5년 전 돌아가신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전태일 정신’을 계승, 평생을 가난하고 어려운 노동자를 위해 살다 간 여사의 정신은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 세계노동역사에서 참 드문 일이지만, 전태일 열사는 분신으로 죽어가면서 어머니에게 ‘어머니, 제가 못 다한 일을 이루어 주시지요’라고 말하며 뒷일을 부탁했다. 아들의 유지를 받들어온 이소선 여사는 세상의 모든 것은 세상에서 가장 많고,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노동자의 힘으로 만들어졌고 ‘세상의 주인이 노동자’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2016년 지금도 일 한만큼의 대가조차 받지 못하는 열악한 상황이다. 그것은 노동자들이 단결하지 않고 힘을 모으지 않기 때문이다. 선거를 통해서 정치적 역량을 얼마든지 발휘할 수 있지만, 단결이 안 되고 있다. 그래서 이 여사께서는 평소에도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에게 단합을 강조했다. <2회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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