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초록 에세이> 온돌방과 화로가 그리운 까닭

내 어릴 적의 겨울은 다음 몇 가지 기억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눈썰매타기, 연날리기, 눈사람 만들기, 군불 때기, 벙어리장갑에 방울 모자를 눌러 쓰고 산토끼를 쫓던 일, 아랫목에 누워 동화책 읽기, 질화로에 군고구마 구워 먹기 들이 그것이다.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은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에도 그때의 기억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는 점이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세월의 더께는 나의 유년 시절을 놀라울 정도로 복원하고 있다.

 

 

겨울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즈음, 나의 뇌리에서 유독 떠나지 않는 기억이 있으니 바로 온돌방에 얽힌 이야기다. 저녁나절, 아버지는 아궁이에 군불을 땠다. 가으내 뒷산에서 거둬들인 생나무와 마른 솔잎 한줌을 아궁이에 넣고 성냥을 당기면 매운 연기와 함께 탁, 탁 불길이 피어올랐다.

구들 골을 타고 들어간 열기는 안방과 건넌방을 가로질러 곧바로 굴뚝으로 빠져나갔다. 흙과 돌로 지은 집이다 보니 쥐가 뚫어놓은 구멍으로 매캐한 연기가 솟아오르기 일쑤였다. 그러노라면 집 안팎이 온통 매운 연기로 가득 차서 눈물이 질금거렸다. 바람이 불면 연기가 흩어져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바람 한 점 없는 눅눅한 날에는 눈, 코로 달려드는 연기를 피해 다니느라 한바탕 난리법석을 떨어야 했다. 그렇게 한 시간쯤 군불을 때고 나면 온돌방이 서서히 달아올랐는데, 뜨끈한 아랫목에 누우면 차가운 몸이 금세 따뜻해졌다.

한파가 매섭게 몰아치면 아침, 점심, 저녁 이렇게 세 번 군불을 지폈다. 저녁에는 화력이 오래가는 생나무나 장작을 충분히 때야 했다. 그래야만 추운 겨울밤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온돌방을 달군 열기는 이른 아침까지 남아 있게 마련이었다.

군불을 지피고 난 다음 타고 남은 불씨를 질화로에 옮겨 담는 일은 내 몫이었다. 어머니는 화로에 석쇠를 올려놓고 생선을 굽거나 찌개를 끓였는데, 그 구수한 냄새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어디 그뿐인가. 고구마나 밤을 구워먹기도 했으며 화롯가에 둘러앉아 아버지가 들려주시는 옛 이야기에 귀를 모으기도 하였다.

집집마다 헛간에는 장작이며 솔가리가 차곡차곡 쌓여 있곤 했다. 밥을 짓거나 소여물을 끓일 때 아주 요긴하게 쓰인 게 땔나무였다. 그 시절의 겨울나기는 땔나무와 아궁이를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질화로엔 언제나 한 쌍의 부젓가락 혹은 인두가 꽂혀 있었다. 부젓가락은 불씨를 헤치거나 간혹 떡을 구울 때 요긴하게 쓰였다. 부젓가락 두 개를 적당한 간격으로 벌리고 그 위에다 인절미나 절편을 올려놓고 구우면 그 구수한 냄새에 정말이지 입맛을 다시지 않을 수 없었다.

 

 

세모꼴 모양의 인두로는 밤이나 고구마를 묻어 굽기도 하고, 옷 팔소매를 다려 꺾거나 저고리 앞 동정을 여미기도 하였다. 후자는 언제나 어머니가 떠맡았다. 인두질로 쭈글쭈글한 옷을 반듯하게 펴는 일은 어머니의 특기였다. 놋다리미가 있었지만 다리미가 닿지 못하는 부분은 인두질이 그만이었다. 어머니의 옷 다루는 솜씨는 동네에서도 알아줄 정도였다. 어머니는 가끔 당신의 손 솜씨는 할머니가 물려주신 거라며 겸손해 하셨다.

화롯불 위에는 언제나 청국장이나 찌개가 보글보글 끓었고, 가끔 석쇠에다 읍내에서 사온 생선을 굽기도 했다. 화롯가에 둘러앉아 고구마나 밤을 구워먹던 기억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부젓가락으로 재를 헤치고 불씨 속에다 고구마를 묻고 기다리면 구수한 냄새가 나면서 군침이 도는 것이었다. 고구마를 끄집어내 껍질을 벗겨 한 움큼 물면 진수성찬이 부럽지 않았다.

화롯가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매서운 추위도 저만큼 물러났다. 부어엉, 부어엉…. 깊은 밤, 고향집 앞산에서 들려오는 부엉이 우는 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했지만 따뜻한 화로와 아버지의 구수한 옛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두려움이 싹 가셨다. 몇 초 간격으로 계속되는 그 소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장가 소리처럼 들렸다. 동생은 그 소리가 무서워 얼른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는데, 한참 동안 그러고 있었다. 아버지는 겨울밤 늦게까지 으스스한 귀신 얘기며 호랑이 얘기, 여우 얘기를 하시다가 잠들곤 하셨다. 어린 시절의 긴긴 겨울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어쨌거나 화로의 쓰임새는 이렇게 다양했다. 문명의 혜택을 온전히 누리고 사는 요즘 세대들에게는 실감이 안 날 테지만 나이 오십 줄 안팎의 중 장년 세대들에게 화롯불은 추억의 한 상징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은 그렇게 흘러가고 어느 새 청년기를 훌쩍 지나 오십 대를 보내고 있는 지금, 그 때의 시골살이가 사무치게 그리운 것은 무슨 까닭일까.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것은 요즘처럼 살기 어려운 때에 큰 힘이 될 수 있다. 추억은 모든 것을 포용하고 너그럽게 감싸준다.

요즘은 기름보일러다 전기보일러다 해서 군불을 때는 집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온돌방을 구경하기도 쉽지 않다. 시대가 변하면서 가옥 구조도 표나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아파트와 신식주택의 등장으로 우리들의 주거 환경은 좀 더 편리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변모하였다. 아궁이 대신 연료통을 설치하였고, 땔나무는 석유와 가스, 연탄으로 대체되었다.

 

 

온돌방 하면 으레 아랫목이 연상된다. 아랫목은 예나 지금이나 한국 정서의 고향이다. 어린 시절, 바깥에서 놀다 들어오면 자연스레 아랫목을 찾게 마련이었다. 아랫목 이불 밑에 언 손을 집어넣고 한참 있으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언 몸이 노곤하게 풀어지면서 그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온돌방은 흔히 구들방으로도 불린다. 온돌은 방을 따듯하게 하는 기능 말고도 습기를 제거하고, 각종 성인병으로부터 몸을 보호한다. 요즘 쓰는 말로 이른바 ‘바이오 에너지’다. 전문가들은 온돌이 생리적인 안정감과 함께 물리치료 효과를 톡톡히 낸다고 말한다. 요즘 들어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황토방이나 찜질방도 온돌의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고온의 열을 쬐어 강제로 땀을 내는 사우나와는 달리 80도 정도의 적당한 온도로 땀을 내게 함으로써 체내에 쌓인 노폐물을 없애준다. 이런 좋은 효과가 있다 보니 너도나도 찜질방을 들락거리게 되고 그 수가 날로 증가하고 있다.

황토방은 우리나라 기후와 풍토에 가장 어울리는 집이다. 사계절 쾌적한 온도를 유지해 주고 습기를 흡수했다가 때에 맞춰 뿜어주는 이상적인 건축 형태이다. 황토 한 숟갈에는 무려 2억 마리에 달하는 미생물이 들어 있어 누런 이 흙을 가까이 하면 몸이 튼튼해진다고 한다. 황토가 질병의 치료나 건강에 탁월한 효과를 보인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실제로 어떤 이는 황토 집에 살면서 그 흔한 감기 한번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황토의 효능은 옛 의서(醫書)에서도 잘 나타난다. ‘동의보감’이나 ‘본초강목’ ‘향약집성방’에서는 황토를 다른 약초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치료제로 보고 있다. 또 고려시대에도 황토방이라는 것을 만들어 나이가 많은 재상이나 병자들의 치료용으로 이용했다고 한다.

장작불 땐 황토방에 누워 있으면 몸으로 느끼는 따스함이 보일러나 가스로 전달되는 온기와는 사뭇 다르다. 토방 아랫목에 누워 명상에 잠겨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풋풋한 흙냄새를 맡고 있으면 마음이 더없이 훈훈하고 피로가 말끔히 풀린다. 황토집 굴뚝에서 나는 연기는 그 얼마나 목가적인가.

이렇듯 일상생활에서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온돌과 황토방이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더 반가운 것은 요즘 짓고 있는 아파트에도 온돌이 등장해 눈길을 끌고 있다는 점이다. 건설 회사들은 새 문물에 밀려 거의 자취를 감춘 온돌을 주거문화의 핵심으로 자리 잡은 아파트에 선보임으로써 소비자들의 다양한 욕구에 부응하고 있다. 온돌의 ‘제자리 찾기’는 옛 생활의 멋을 다시 끌어 들였다는 점에서 찬사를 받을 만하다.

몸보다 마음으로 느끼는 추위가 더한 2016년 겨울. 아궁이에 군불을 때 난방을 했던 그 옛날이 삼삼히 떠오른다.

<수필가,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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