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이빙 미스 노마'와 상실의 시대
'드라이빙 미스 노마'와 상실의 시대
  • 강진수 기자
  • 승인 2016.12.26 16: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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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생각> 강진수

노마 할머니가 별세했다는 소식은 10월에 이미 뉴스에서 접했다. 그런데 그 기억은 옅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내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다. 오히려 더 짙어져가는 기분이다. 암 치료를 거부하고 90세의 나이로 미국대륙횡단 여행에 나선 노마 할머니의 행적과 길 위, 낯선 타향에서의 죽음은 결코 기억 속에서 쉽게 지워질 수 없을만한 기행(奇行)이다.

노마 할머니의 페이스북 페이지였던 ‘드라이빙 미스 노마(Driving Miss Norma)’에서는 그녀의 별세 소식과 함께 한 시인의 말을 인용해 올렸다.

“인생은 붙잡는 것과 놓아주는 것 사이의 균형 잡기.”

 

▲ 암 치료를 거부하고 90세의 나이로 미국대륙횡단 여행을 택했던 노마 할머니

 

인생이라는 모호하고 평생 이해할 수 없는 개념에 대해서 어떤 정의를 내리는 것을 그다지 선호하는 편은 아니지만, 노마 할머니의 죽음을 두고 저 좁은 정의는 생각보다 많은 뜻을 담는 그릇의 역할을 한 것 같다. 특히, 너무 많은 것을 붙잡아두려는 우리 시대의 욕심으로 인해 잃어버리고, 망각해버리는 것들에 대한 상기는 그녀의 죽음이 가져오는 가장 첫 번째의 것들이 된다.

상실의 시대, 우리가 살아가는 순간들을 수식하는 말이 되어버렸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제목 ‘상실의 시대(Norwegian wood)’는 다른 의미들도 여럿 내포하고 있겠지만, 우리가 주로 사용하는 상실이라는 단어와 그 상실로 표현될 수 있는 우리의 시대는 사실 소설로는 담을 수 없는 더 깊은, 짙은 상실의 색깔이다. 우리는 무엇을 잊고 살아가고 있는지, 에 대해서조차 돌이켜보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일단 상실의 상태가 더 익숙하기도 하고, 상실이란 이미 포기하는 것에 염두를 두므로 되찾아올 수 있다는 자기 의지를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런 가운데에서 노마 할머니의 의지는 굉장한 힘과 메시지를 갖는다. 암 판정을 받은 뒤 얼마 지나지도 않아 남편을 잃은, 아흔의 노마 할머니가 병상을 떠나기로 마음먹은 것에는 어떤 생각들이 작용했을까. 때로는 생각들이 큰 도움을 주지 않을 수도 있다. 합리적이라고, 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을 때, 그제야 우리는 비로소 몸이 움직이는 대로, 손가락과 발걸음이 닿는 대로 움직일 수 있곤 한다. 충동이라는 것은 항상 우리가 자제해야 할 만한 것으로 여기지만, 우리의 몸은 애초부터 충동으로 가득 흘러넘쳐 있다.

하루키 소설 ‘상실의 시대’의 원제는 ‘노르웨이의 숲’인데, 우리가 마주한 상실의 시대가 공허하고 피폐한 황무지가 아닌 노르웨이의 사시사철 푸르게 가득 들어선 숲이라는 것, 그만큼 우리가 생각하는 상실의 개념과 익숙해진 상실 사이의 간극이 크다는 것이다. 잃어버린 것들에 대하여 우리는 완전히 텅 빈 공간을 사유하고 있는 것만 같지만, 사실 우리는 수도 없이 많은 나무들과 가지들, 생각의 뿌리들로 하여금 길을 잃은 것과 같다. 그래서 우리의 상실은 사시사철 푸르고, 우리를 단 한 순간도 놓아주려 하지 않는다. 충동적이거나, 몸과 마음에 충실하지 않은 우리의 삶은 결국 생각의 한 가운데에 갇혀버린다.

결국 지나친 생각의 가지와 뿌리를 잘라내고 거두는 방법에는 충동이 있다. 몸이 뜨거워지도록 열정적이고 그 자체를 사랑할 수 있는, 그래서 그런 감정들이 흘러 넘쳐, 그것이 흐르는 대로 따라가는 것. 노마 할머니는 병상에서 죽어가는 자신의 몸을 보며, 단 한 순간도 뜨겁게 불태우지 못했던 자신의 삶을 아쉬워했을 것이고 이대로 잃어버릴 수 없다며 결단했을 것이다. 물론 그런 간단한 이유만으로 그녀가 그녀의 삶을 마무리하는 방식을 돌이키지는 않았겠지만, 적어도 아주 조금은, 마지막이라는 기회 앞에서 다시 뜨거워진 것일 테다.

그런 노마 할머니의 죽음은 노마 할머니다웠다. 끝까지 여행을 고집하다가, 낯선 땅 낯선 길목에서 병이 악화되고, 회복하기를 기다렸던 할머니는 결국 죽음이 다가왔음을 인정하고 눈을 감는다. 그 죽음은 실로 평안한 것이었다. 그동안 풀어내지 못한 숙제를 다 하고 가기라도 한다는 만족감으로 죽음은 풍요롭고 고요하게 그녀를 감싸 안았다. 그녀는 오히려 그녀의 죽음으로 상실을 감싸 안았고, 상실이란 결국 죽음의 허무와는 전혀 별개의 것이라는 점을 드러내 보였다. 상실의 시대 속에서 상실은 우리의 생과 죽음의 문제에서 벗어나, 오히려 허무해지지 못해서 만들어지는 것임이 명확해지는 것이다. 죽음을 바로 앞에 두고 노마 할머니의 여행은 얼마나 허무한가. 하지만 오히려 그녀야말로 진정 상실의 측면으로부터 회복된 모습임을 우리는 목격했다.

그녀의 충동은 결국 허무하지만 그 속은 가득 들어차 있다. 이는 얼마나 많은 생각들과 고민들이 우리에게 불필요한 것인지를 역설한다. 비로소 완전히 비워낼 때에야 우리는 더 풍요로운 지점을 마주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모순된 명제는 사실 무소유와 허무, 수많은 고요함을 마주한 사람들로부터 우리가 들어온 것이기도 하다. 생각과 고민이 더 이상 우리의 길에 들어차 있지 않은 순간, 걸어갈 방향을 정하는 것은 오직 나, 자신이다. 노마 할머니, 그녀 자신이다. 그녀는 죽음에 무너지지 않고 걸어갈 수 있었다. 죽음에 대한 생각이 가져오는 자기비관, 염세에 무너지지 않고, 그녀는 허무의 정 가운데로 걸어 들어갈 수 있었다.

노마 할머니에 대한 이런 설명과 주석들은 상당히 많은 철학적, 문학적, 예술적 고찰들에 근거하고 있다. 하지만 난해하고 복잡한 설명들을 뒤로 하고, 그녀의 행보와 삶에 대한 마무리가 또 하나의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은, 그런 학문적인 얽힘과 그 속의 어떤 사실에 대한 탐구가 사실 삶이라는 이름 앞에서 얼마나 가볍고 단순한 일인지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결국 단어와 문장으로 표현해냈을 때, 소설이나 시, 그림이나 영화 등으로 표현해냈을 때 어려워 보이는 것들이 우리에게 전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마 할머니는 그녀 자신이 남긴 말들과 페이스북을 통해 그런 점을 강조한다. 그녀의 깨달음은 그녀의 페이스북과 인터뷰에 여실히 담겨있는 것이다. 또한 그녀의 여행 과정과 그것을 찍은 사진과 영상들에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책을 들여다보고 이른바 수준 높은, 어렵고 복잡한 것들을 향유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벗어내야 한다.

“내 여행을 통해 사람들이 삶을 마무리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보길 바랍니다.”

드라이빙 미스 노마가 상실의 시대 앞에 선 문을 여닫고 나가면서 남긴 말이다. 이 말은 다른 한편으로, 삶을 마무리하는 방식에 대한 그동안의 생각들을 저버리라는 뜻을 아련히 담고 있다. 또한 그녀를 단순히 멋진 사람, 불가능한 일을 해낸 노인 정도로 여기지 말고, 그녀가 해낸 만큼 당신도 쉽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으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동안 상실 앞에서 어떤 시대를 보냈는가. 너무 많은 우리가 우리를 묶어두고, 상실이라는 늪 속에 빠뜨리지는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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