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좀 도와줘, 나 안 그러면 죽을 것 같아…”
“나 좀 도와줘, 나 안 그러면 죽을 것 같아…”
  • 정리 최규재 기자
  • 승인 2017.02.0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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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군대 폭력’, 난 이렇게 잡았다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24시간 365일 폐쇄된 군대에서는 ‘국방의 의무’라는 신성한 이름으로 ‘인격 살인’이 멈춰지지 않고 있다. 같은 인간임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범죄 행위가 선량한 병사들의 숨통을 조이고 있는 것이다.

군내 가혹행위는 창군 이래 근절된 적이 없었다. 억울한 죽음은 ‘군대 부적응’이라는 핑계로 은폐됐다. 한때 대한민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윤 일병 사망 사건 때 역시 군 당국은 평소처럼 사건을 감추려 했다. 하지만 윤 일병의 시신은 가혹행위를 은폐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온몸에 멍이 들고 고문을 당한 것처럼 흉터가 진했다. 실제로 윤 일병은 가해자 이모 병장 등 동료 병사들로부터 지속적인 폭행과 고문을 당했다. 통계에 따르면 3일에 1명씩 군대에선 자살이나 사고사로 병사들이 목숨을 잃는다.

 

 

대한민국에서 군대는 성역이다. 외형상 군사독재가 무너졌지만 군대는 여전히 성역으로 남아있다. 아직도 타살을 자살 또는 사고사, 병사로 처리했던 사건을 바로 잡기 위해 자살자에 대해서는 진짜 원인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부모들이 있다. 그 결과 구타와 가혹 행위, 성추행, 과중한 업무 관리, 관리 소홀 등 부대 내 환경이 자살의 주요 원인임이 밝혀지기도 했다.

지금도 군 어디에선가는 또 다른 윤 일병이 도움을 청하고 있을지 모른다. <위클리서울>은 과연 그들이 도대체 왜, 어떤 방법으로 후임들을 괴롭히는지 군인권센터가 수집한 사례와 수사 기록, 전역자들의 증언 등을 통해 살펴본다. 이번 호엔 최모(28) 씨의 이야기를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엮어봤다. 최 씨는 육군 출신으로 2012년 전역했다.
 

부대장의 강력한 맹세

나는 군 복무 때 ‘특별한 행동’을 한 경우다. 일병 시절 구타와 가혹행위에 시달리다가 참다 못해 간부와 선임병들에게 ‘전쟁 선포’를 했기 때문이다. 부대 위치나 이름은 부득이하게 밝힐 수 없다. 그 사건 이후 ‘구타와 가혹행위 근절 약속’을 잘 지켜준 당시 부대장에게 누를 끼칠 수 없기 때문이다. 나 역시 제대한 지는 꽤 지났지만 그래도 부대의 존재가 밝혀질 수 있다면 상당한 부담이 될 듯하다.

나는 군 시절 부대에서 부모님께 연락해 “부대장을 고소해달라”고 부탁했다. 아버지는 곧바로 해당 부대를 방문했고, 부대장에게 “요즘도 애들을 그렇게 때리냐”고 따졌다. 당시 부대장은 나와 아버지 앞에서 그야말로 ‘벌벌 기었다’.

부대장 입장에선 구타와 가혹행위 신고가 접수될 경우 진급에 악영향을 받는 게 당연했다. ‘밥줄’이 달린 문제였기에 우리 부자 앞에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노라”고 약속했다. 부대엔 큰 변화가 일어났다. 구타와 가혹행위가 싹 사라졌다.

내게 ‘복수’를 하는 선임들도 없었다. 나를 때리던 선임들은 오히려 내게 “영창 가기 싫다. 구속되기 싫다. 용서해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빌기까지 했다. 그렇게 무참히 후임들을 짓밟던 이들이 한 순간에 겁쟁이로 전락한 것이다. 한편으론 비겁하고 구질구질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한동안 내무실에선 밤마다 해당 선임들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구타를 당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동기들과 후임들은 허구한 날 구타와 가혹행위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니 이런 나의 ‘행동(소원수리)’에 후임들은 박수를 보내던 상황이었다. 물론 선임들로부터는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힐까봐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불의를 참지 못해 배신한 것이 과연 배신이었을까. 배신이라는 말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스스로 부끄러움이 없다는 생각이 드니 그런 두려움조차 사라졌다. “또 때려봐라. 나는 또 다시 행동할 것이다. 어디 누가 이기나 갈 때까지 가보자”라는 생각이었다.

일부 선임들도 나의 행동에 박수를 보냈다. 반면 그때까지도 정신을 못 차린, 시대의 낙오자 격인 또 다른 선임들은 복수의 칼날을 갈았지만, 내 행동이 두려워 어떤 폭력도 행사하지 못했다.

간부들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그 계기로 대오각성 했다고 할까. 병장들에게 가혹했던 간부들은 그들에게도 이등병, 일병을 대하듯 너그럽게 대했다. 밥줄이 달린 문제였기에. 부대가 그렇게 한번 발칵 뒤집히고 부대장의 ‘구타 근절’ 슬로건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신고만은 제발 하지 말아 달라. 앞으로 구타와 가혹행위는 우리 부대에 없을 것”이라던 부대장의 맹세는 지켜졌다.
 

간부도 없고…

그렇다면 구타와 가혹행위가 만연했던 이등병, 일병 시절로 돌아가보자. 우리 부대는 전투 부대도, 최전방도 아닌, 훈련도 거의 없다시피 한 속된 말로 ‘당나라 부대’였다. 초소 근무 위주로 돌아가는 부대였고, 보급 물품을 이리저리 옮기거나 여름이면 무성한 잡초들을 깎는 게 일상이었다.

문제는 중대 막사가 본부 막사와 다소 떨어져 있었고, 간부들의 동선과는 늘 거리를 두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병 위주로 돌아가는 독립 중대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오죽했으면 일직사관도 간부가 아닌 사병이 도맡았고, 일직사관과 일직하사 이 둘을 병장들끼리 나눠 가졌다. 그래서인지 병장의 말이 곧 법이었고 간부의 통제 없이 하루 일과를 보내는 날이 많았다. 몇 년 전의 ‘윤 일병 사건’도 그런 구조가 낳은 비극이었을지 모른다. 거기다 간부가 병장을 형이라고 부를 정도였으니,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모든 선임이 그러했던 것은 아니지만, 우리 부대에서 상당수 선임들에게 폭력은 일상적인 것이었다. 당연히 후임들은 늘 폭력에 일상적으로 노출돼 있었다. 화장실에 들어서면 코피를 흘리며 기절해 있는 이등병들의 모습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군대에서 맞는 데엔 이유가 없다. 혹자들은 잘못해서 맞은 게 아니냐고 하는데, ‘잘못’의 기준은 늘 모호하다. 혹자의 말대로라면 어쩌면 잘못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는 게 후임들이다. 매 사안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였다. 암기를 못해 맞았다고 가정하자. 암기력은 천차만별이고 암기 수준의 기준도 누가 정할 수 없는 노릇이다. 암기력이 아무리 좋아도 차량 번호 50개를 1분 만에 다 외우지는 못할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후임이 있으면 선임은 차량 번호 50개를 1분 만에 외우라 지시하고, 구타를 일삼는다.

가혹행위는 여느 부대와 마찬가지로 내무실과 초소에서 벌어지는 일이 많았다. 그 종류는 언론 등을 통해 수 없이 등장한 바 일일이 열거하지 않아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가혹행위나 구타는 그 종류에 따라 고통의 강도가 다르긴 하지만, 정말 본질적인 문제는 그것이 어떤 종류이든 상황에 따라선 병들의 영혼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멍든 영혼, 부러진 다리

내가 그런 행동을 결심한 결정적인 이유는 구타를 당한 나의 바로 윗 선임 때문이었다. 일병이었던 그 선임은 부대에서도 악명을 떨치고 있던 한 상병 선임에게 주요 타깃이 돼 구타와 가혹행위에 노출돼 있었다.

“최 일병. 나 좀 도와줘. 너네 동기들이 나 좀 도와주면 안 되겠니. 나 안그러면 죽을 것 같아….”

착하기로 소문났던 그 선임은 몸이 왜소해 무거운 짐을 잘 옮기지 못하는 것을 제외하면 별 탈 없이 군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상병 선임에게 끌려가 맞고 다녔다고 한다. 등과 다리 등엔 시커멓게 멍이 들어 있었고, 내게 도와달라고 한 날은 다리가 부러져 있었다. 악명 높던 그 상병 선임에겐 나를 비롯 많은 동기들과 후임들 역시 맞았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문제의 일병 선임은 상대적으로 허약한 체질이라 괴롭히기가 더 용이했나 보다. 선임은 서럽게 울면서 내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자신이 당한 구타와 가혹행위 때문에 선임이 후임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은 그 전까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내 동기는 둘 밖에 안 되잖아. 힘이 없잖아. 그나마 너네 동기들이 인원도 많고 하니, 힘을 합치면 고참들도 함부로 못건드릴 것 아니야. 너도 많이 맞았잖아.”

군에서 동기가 많다는 것은 축복임에 분명하다. 나의 동기들은 중대 통 틀어 20명에 달했다. 중대 인원이 120여명이었고 각 소대별로 동기들로 넘쳐났다. 그러니 선임들 입장에선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위에선 ‘쿠데타’를 우려해, 버릇 들인다며 이등병 시절부터 찍어 누르긴 하지만, 계급이 오를수록 윗 선임들도 함부로 못하는 경향이 있다. 어쨌거나 나는 다리가 부러진 그 선임을 보고 결심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소원 수리, 곧 행동이었다.

부대는 변했다. 일직사관은 하사급 이상 간부가 도맡았고, 부대 주변에선 늘 장교들이 병장과 상병을 감시했다. 때로 간부와 사병이 함께 근무를 서기도 했다. 식당, 목욕탕, 이발관, 보일러실 등 구타와 가혹행위가 만연하던 곳은, 일과시간 이외엔 출입이 금지되었다. 혹자는 그것이 통제이며, 이 때문에 사병들의 군 생활 전체가 힘들어진다고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다. 군 생활이 무엇이고 군대가 무엇인지를. 군대라는 곳은 그 자체가 통제사회다. 외부로부터의 통제가 아닌, 스스로 통제하는 사회다.

그렇게 세련되게 통제된 군대는 병장부터 이등병까지 큰 근심이 없다. 물론 여기엔 제대로 사병을 통솔할 수 있는 훌륭한 간부가 전제조건이다. 구타와 가혹행위가 근절된 이후, 내가 병장이 된 이후, 부대 병장부터 이등병까지 모두가 편했다. 혹자는 구타와 가혹행위가 없으면 상병과 병장이 힘들어진다지만, 어떤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지 무슨 음흉한 의도로 그런 주장을 펼치는지 이해할 길이 없다. 구타와 가혹행위가 사라졌다고 해서 악의적으로 지시를 불이행하는 후임들은 없었다. 지금에 와서 좀 늦은 감이 있지만, 구타와 가혹행위 근절에 심혈을 기울였던 해당 부대장에겐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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