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생각> 류승연

초등학교 2학년. ‘문제집 인생’이 시작됐다. 이 단계가 지나면 ‘학원 인생’이란다. 늦출 수 있는 데까지 늦추고 싶었으나 어쩔 수 없다. 학교 수업을 따라가려면 ‘문제집 인생’에 발을 디뎌야 한다. 이제 고작 아홉 살인데…. 불쌍해 죽겠다.

딸은 수학이 약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연산이 약했다. 이해력은 높았다. 책을 많이 읽은 덕이다. 덕분에 어휘력도 풍부하고 글로 자신의 마음을 잘 표현한다는 칭찬도 받았다. 이해력이 높아서 수학 중에서도 ‘비교하기’나 ‘시계보기’ 등의 단원은 잘했지만 더하기 빼기 등 연산만 나오면 손가락이 등장했다.

 

 

남편은 수학처럼 쉬운 걸 왜 못하는지 의아해했고, 시어머니는 남편이 수학을 얼마나 잘했는지 늘어놓으며 “누굴 닮아 그럴까?”라고 물었다. 그래. 나다. 날 닮았다. 일찌감치 수학을 포기했던 날 닮아 우리 딸도 수학을 어려워한다.

어쨌든 난 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내며 1~2학년 동안에는 공부를 시키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아이를 방치하겠다는 얘기가 아니다. 엄마의 강요에 의한 공부를 시키지 않으려 했던 거다. 다행히 딸은 이런 엄마의 마음을 잘 헤아려 주었다. 들들 볶지 않아도 되게끔 일기쓰기도, 받아쓰기 연습도, 숙제도 혼자서 하는 기특한 어린이가 되었다.

수업 중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숙제만 잘해 가면 진도는 따라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기껏해야 초등학교 1학년 아닌가! 방정식이 나올 리도 없고 루트가 등장하지도 않는다. 문제집이나 학습지를 할 필요도, 선행학습의 목적이 아닌 이상 굳이 학원을 다닐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수학익힘책만 다 풀 줄 알면 된다고 생각했다.

아. 요새 초등학교는 수학 교과서가 두 권으로 되어 있다. 우리가 배운 것처럼 학습내용을 배우는 교과서가 한 권, 교과서에서 배운 것들을 풀어보는 문제집이 한 권이다. 문제집의 이름이 수학익힘책이다. 딸은 수학익힘책을 막히는 부분 없이 다 풀었다. 하지만 막상 시험을 보면 많이 틀려오곤 했다.

딸은 한 달에 한 번씩 학교에서 본 수학 시험지를 가지고 왔다. 20문제씩이었는데 어쩔 때는 2개를 틀렸고, 어쩔 때는 5개를 틀렸다. 물론 어쩔 때는 100점을 맞기도 했다.

나는 수학 시험지를 보고서 아이가 틀린 부분을 함께 체크했다. 틀린 부분이 모르는 부분이었으니까. 진짜 몰라서 틀린 것도 있었고, 아는 내용인데 질문의 형식을 이해하지 못해서 틀린 것도 있었다. 틀린 것을 체크하며 모르는 부분만 배워나갔다. 그것이 내가 시킨 공부였다.

그런데 2학기 말이 되자 8문제를 틀린 시험지를 가지고 온다. 죄다 연산이다.

딸은 더하기 식과 빼기 식을 서로 바꾸는 것을 헷갈려했다. (A+B=C)라는 식을 (C-A=B)와 (C-B=A)의 두 개로 바꾸는 건 잘했는데, (A-B=C)라는 식을 (B+C=A)와 (A-C=B)로 바꾸는 건 한참을 끙끙거렸다.

물어보면 원리를 이해 못한 건 아니었다. 원리는 알고 있는데 자주 풀어보지 않아서 눈에 익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럴 때 해결책은 하나뿐이다. 자주 풀어보는 것. 척하면 척하게, 이런 문제는 이렇게, 저런 문제는 저렇게. 척하면 척 나오게 많이 풀어보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마침 2학년부터는 세 자릿수 더하기 빼기를 배운다는 얘기를 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봄 방학을 앞두고 두 자릿수 더하기 빼기를 몇 개 시켜보니 몇 주 전까지 알고 있던 풀이들을 그새 또 까먹고 끙끙대고 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이건 뭐 선행학습을 위해서가 아니라 2학년 수업을 제대로 따라가기 위해서 1학년 수학을 완전 마스터해야 했다. 봄방학이 되자 딸을 데리고 서점에 갔다. 연산이 약하기 때문에 많이 풀어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해시키고 문제집을 고르게 했다.

완전한 선택권을 주지는 않았고 내가 먼저 훑어본 뒤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두 권을 앞에 두고 그 중에서 마음에 드는 걸 고르게 했다.

딸은 단원이 넘어갈 때마다 만화가 그려져 있는 문제집을 골랐다. 응용문제가 더 많은 문제집이었는데 만화에 껌뻑 속아 넘어갔다. 1학년 수준의 마지막 단계 두 권을 사서 집으로 왔다. 2주일의 방학 기간 중 매일 5장씩 풀기로 했다.

확실히 딸은 응용문제를 푸는 데 애를 먹었다. 원리는 이해하고 있어도 질문의 형식을 이해 못하는 게 많았다. 다양한 문제들을 접하며 여러 질문형식을 익혀 나갔다.

한 권은 다 끝냈는데 다른 한 권은 채 마치지 못한 채로 2학년을 맞았다. 남은 분량을 매일 3장씩 풀기로 했다. 연산은 쉬지 않고 매일 조금씩 해야 실력이 줄지 않는다는 주변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문제집을 푸는 게 싫은 일이기는 하지만 딸도 수긍을 했다. 1학년 수준에서도 끙끙거리면 2학년 이상부턴 수업조차 따라갈 수 없다는 위기감을 납득한 것이었다.

어제는 집에 오더니 손을 씻고 나서 숙제부터 한다. 숙제를 하고 나선 문제집도 꺼내 3장을 푼다. 할 일을 먼저 하면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해도 된다는 집 안의 ‘규칙’을 따른 것이다. 녹화해 둔 ‘무한도전’이 보고 싶었던 딸은 얼른 해야 할 일을 마치고 TV 앞에 앉았다.

할 일을 다 했으니 보상도 줘야지. 리모컨이 딸 손에 쥐어졌다. ‘무한도전’에 빠져 한참을 깔깔거린다.

그런데 잠들기 전 딸이 말한다. “엄마, 근데 개학을 하고 나니 책을 읽을 시간이 없어.”

그랬다. 일상이 바쁜 요즘 아이들은 책을 읽을 시간이 없었다. 1학년 때 딸은 피아노 학원 하나만 다녔다. 방과후로 방송댄스, 아나운서, 쿠키클레이 등 재미있게 놀 수 있는 수업들을 들었지만 방과후 활동은 일주일에 한 번씩만 진행됐다.

그러다보니 책을 읽을 시간이 많았다. 아침에 눈 떠서 밤에 잠들기 전까지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았다. 특히 만화로 된 백과사전인 ‘WHY’ 시리즈를 좋아했다. 한 번에 시리즈를 다 사면 읽지 않을 것 같아 주말마다 서점에 가서 스스로 읽고 싶은 ‘WHY’ 책을 고르게 했다.

반 년 넘게 ‘WHY’ 시리즈에 빠져 있더니 어느 날부턴 마법천자문과 그리스로마 신화에 푹 빠졌다.

딸은 읽었던 책도 읽고 또 읽었다. 책 속에는 처음 보는 단어도 많았고, 이해가 안 되는 의미들도 많았다. 딸은 책을 읽고 또 읽으며, 그 때마다 “이건 무슨 뜻이야?” 질문을 해가며, 매일매일 세상을 이해하는 폭을 넓혀나갔다.

2학년이 되면서 학원 하나를 추가했다. 태권도 학원이다. 장애 동생 때문에 알게 모르게 받는 스트레스가 상당할 것 같아 몸을 움직이며 스트레스를 발산할 수 있게 하려고 등록을 했다. 너무 좋아한다. 줄넘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고, 게임도 하고, 찌르기와 발차기를 배우는 태권도장이 너무너무 좋아 행복하단다.

방과후는 컴퓨터 교실을 선택했다. 1학년 2학기부터 수업 중에 컴퓨터를 배웠는데 딸이 그림판을 그리면서 애를 먹었던 것이다. 문제는 나도 컴맹이라 기본적인 것조차 가르쳐줄 수 없었다는 것. 외부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일주일에 두 번 4교시 수업이 끝난 후 곧장 컴퓨터 수업을 듣도록 시간표를 짰다. 하교 후 컴퓨터 수업을 듣고 피아노학원을 갔다가 태권도장으로.

5교시를 하는 나머지 3일은 피아노학원에 갔다가 태권도장으로. 이러다 보니 아침 8시30분에 등교를 한 아이는 매일 오후 5시가 되어야 집에 왔다.

집에 와선 씻고, 저녁 먹고, 숙제를 하고 문제집을 풀었다. 해야 할 일을 마치면 자유시간은 아주 조금밖에 가질 수 없었다. 자유시간에 책을 읽을 수도 있었지만 TV도 보고 싶은 게 아홉 살짜리의 마음. 그러다보니 책 읽을 시간이 잠들기 전 얼마밖에 없었다. 딸은 그게 못내 아쉬웠다.

나도 아쉽다. 초등학교 2학년 아이가 벌써부터 컴퓨터를 배우고 수학 문제집을 푸느라 책 읽을 시간이 부족하게 된 현실이. 딸은 책을 읽으며 많은 가치들을 배워나갔다. 위인전을 읽으며 ‘희생’에 관한 생각을 하는 걸 보았고, 그리스로마 신화를 읽으며 사랑과 질투, 배신과 탐욕 등 인간의 감정에 관한 다양한 질문들을 했다.

그렇게 인간으로서의 감정과 가치 등을 배워나가야 할 시기에 더하기 식을 빼기 식으로 바꾸는 수학문제를 풀기 위해 책상에 앉아있어야 하다니. 그렇다고 책만 읽게 할 수는 없다. 100점을 맞기 위해서가 아니라 학교 진도라도 따라가게 하려면 집에서의 과외 공부가 필요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는 국정교과서만이 아닌 것 같다. 너무 어린 나이부터 너무 많은 것들을 다 배우게 하려는 교육부 관계자들의 욕심이 진짜 문제가 아닌가 싶다. 이제 고작 아홉 살일 뿐인데. 대한민국에서 초등학생으로 사는 딸이 살짝 불쌍해지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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