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을 바꾼 커피 마시기 ‘피카(Fika)’
스웨덴을 바꾼 커피 마시기 ‘피카(Fika)’
  • 이석원 기자
  • 승인 2017.05.29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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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기획> 복지국가 스웨덴에서 살아보기: 3회 / 이석원

 

한두 주 사이 스톡홀름의 산하는 짙푸른 녹색의 향연이다. 불과 2주 전까지만 해도 잔디는 푸르게 돋아 올라도 나무들은 여전히 지난겨울의 헐벗음을 면치 못한 채 을씨년스러웠는데, 자고 일어나니 세상이 바뀐 듯 몰라볼 정도로 짙푸르게 새 옷을 입었다. 게다가 이미 백야의 기운이 시작돼 새벽 4시면 세상이 밝아오고, 밤 10시 돼야 검은 그림자가 세상을 덮는다. 이것도 잠깐, 몇 주만 더 있으면 스웨덴은 하루에 두세 시간만의 밤이 존재하는 백야의 세상이 될 것이다.

날씨가 좋아지면 집집마다 진한 향의 커피 끓이는 냄새가 창을 타고 퍼진다. 아래층 사는 군나르 씨 부부와 워킹 홀리데이로 스웨덴에 와 있는 한국인 청년 강하 씨가 집에 왔다. 피카(Fika)를 하러 온 것이다. 군나르의 아내 애니는 직접 집에서 구운 카넬블레(Kanelbulle. ‘시나몬 롤’이라고도 불리는 스웨덴 전통 빵) 6개를 들고 왔다.

 

▲ 순드베리 콘디토리 - 스톡홀름 구시가인 감라스탄에 있는 피카의 명소. 1785년 처음 문을 열었으니 232년 된 카페다.

 

스웨덴 사람들이 ‘목숨’ 걸고 하는 게 있다. 피카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스웨덴 사람들은 수시로 피카를 한다. 피카는 ‘커피 브레이크’라는 의미지만 단순한 커피 브레이크 이상이 의미를 지니고 있다. 토론과 소통, 정보 교환과 정치의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혼자보다는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마시는 것을 특별히 피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피카에는 유의미한 히스토리가 있다. 19세기 말 스웨덴 노동자들은 극도로 열악한 노동 환경으로 고통스러웠다. 그런 노동자들에게 자그마한 낙이 있다면 쉬는 시간에 커피를 마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노동자들은 커피만 마시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 몇몇이 모여 커피를 마시면서 처우와 노동 환경 개선 등에 대한 토론도 했고, 자연스럽게 공장주에 대한 비판과 함께 결사와 연대에 대한 이야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공장주들은 노동자들이 모여서 커피 마시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대놓고 노동자들끼리 모여 커피마시는 것을 금하거나, 아예 커피를 마실 수 없는 노동 환경을 만들려고 골머리를 앓기도 했다. 그러니 노동자들은 공장주들의 눈과 귀를 피해 몰래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당시 노동자들은 커피를 뜻하는 스웨덴어 ‘카페(Kaffe)를 ’카피(Kaffi)‘라고 줄여서 부르기도 했는데 그러다보니 공장주 몰래 커피를 마시자는 이야기를 하면서 ’Kaffi‘를 거꾸로 말했다. 그게 ’Fika‘다. 그래서 스웨덴 노동조합의 발상을 피카로 보기도 한다.

19세기 말 스웨덴 노동자들은 피카를 하면서 노동조합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1931년 총파업 때는 시위 노동자와 경찰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보수당 휘하의 경찰은 험악하게 몰려오는 노동자들의 행진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 결국 노동자들을 향해 발포하고 이로 인해 5명의 노동자가 사망하기에 이른다.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고, 이듬해 결국 보수당은 실권, 정권을 사회민주당에게 넘겨준다. 이때 새롭게 스웨덴의 총리가 된 페르 알빈 한손은 노동자와 노동조합 문제를 지금처럼 처리해서는 나라가 위급해진다고 판단하고 노동자들의 대표를 불러 모아 그들과 피카를 하기 시작한다.

 

▲ 피카 테이블 - 피카가 일상화된 스웨덴 카페의 일반적인 풍경. 처음 커피를 주문한 이후에는 스스로 계속 커피를 가져다 마실 수 있도록 했다.

 

그런데 이 자리에는 한손 총리와 노동자 대표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에도 스웨덴 경제의 절반 이상을 좌지우지하던 막대한 재벌 그룹 발렌베리의 총수가 함께 했던 것이다. 자기들끼리 모여서 피카를 하던 노동자들은 총리와 커피를 마시게 됐고, 또 스웨덴 최대 재벌 기업의 총수와도 커피를 마시게 된 것이다. 그 가운데 탄생한 것이 스웨덴 사회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인민의 집(Folkhemmet)’이다. 즉, 정부가 소유하는 사회주의식 경제 체제는 아니지만 법률에 의해 기업을 규제하고, 대신 기업 활동을 통해 얻어진 부는 모든 인민들이 고루 나누는, 국가와 기업과 노동자가 유기적 결합을 이뤄 국가가 ‘인민의 집’ 역할을 하는 스웨덴식 사회민주주의가 완성된 것이다. 그들이 피카를 하면서.

페르 알빈 한손에 이어 스웨덴의 총리가 된 타게 에를란데르는 1952년 스웨덴 출신 거부인 칼 아우구스트 비칸데르라는 기업인으로부터 스웨덴에서 남서쪽으로 120km 떨어진 하르프순드(Harpsund)의 한 호숫가에 있는 영지를 기증받는다. 관저도 없이 임대 아파트에 살던 총리에게 준 것이다. 그런데 에를란데르는 이곳에서 종종 휴가를 보내면서 각계의 인사들을 불러모은다. 그 중에는 발렌베리 그룹의 총수도 있고, 노동조합 연맹의 간부도 있고, 보수당이나 농민당 등 보수 정당의 대표들도 있었다. 에를란데르는 그들에게 전화해서 “피카나 합시다. 스웨덴 총리의 별장에서”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하르프순드 민주주의’라는 별칭을 가진 스웨덴 복지의 토대가 만들어졌다.

인구 90만 남짓이지만 북유럽 최대의 도시인 스톡홀름에는 수도 없이 많은 카페가 있다. 그 카페들에는 언제나 사람들로 넘친다. 카페에 앉아있는 사람만 봐서는 천만 인구의 서울보다 스톡홀름이 사람이 더 많아 보일 정도다. 그들은 현재 자신들의 방식으로 피카를 하는 것이다. 10대 청소년부터 7, 80대 노인들까지 집에서, 직장에서, 또는 학교와 거리의 카페에서 삼삼오오 모여 피카를 하는 지금의 스웨덴 사람들은 또 어떤 미래를 만들어갈까?

 

▲ 피카의 기본 - 커피와 함께 피카 때 꼭 먹는 것이 카넬블레라고 부르는 계피빵이다.

 

스웨덴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정치인으로 꼽히는 올로프 팔메가 총리로 재직 중이던 1984년 내각 장관들과 하르프순드 별장에서 피카를 할 때 이런 말을 했다. “19세기 노동자들의 피카는 노동조합을 만들었고, 1930년대 한손(페르 알빈 한손. 1932~1946년 스웨덴 총리)과 노동자들의 피카는 ‘인민의 집’을 만들었고, 1952년 에를란데르(타게 에를란데르. 1946~1969년 스웨덴 총리)와 발렌베리(스웨덴 최대 재벌가)의 피카는 사회보장제도의 완성을 만들었는데, 우리들의 피카는 뭘 만들까?”

애니가 구워온 카넬블레는 스웨덴 사람들이 피카를 할 때 빠뜨리지 않는 핵심 아이템이다. 향긋한 시나몬 향과 진한 커피 향이 어우러지면 대화는 한결 쉬워지고 일체감까지 만들어준다. 그건 일종의 도취이고, 몰입이기도 하다. 나누는 이야기가 정치건, 철학이건, 또는 신변잡기의 시답잖은 농담이건, 그게 무엇이 됐든 생산적이다.

한 잔의 커피가 주는 의미는 적어도 스웨덴 사람들에게는 세계에서 가장 행복하고, 투명하고, 정직한 나라 그 다음이 만들어져 나가는 과정일 수 있다.

<이석원 님은 한국에서 언론인으로 일했습니다. 지금은 스웨덴에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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