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순 할머니와 떠난 여행 ①>

“다 늙어서 무슨 여행이냐, 그리고 우리 형편에….”

아마도 할머니는 내가 직장을 갖고, 정기적인 용돈을 드리거나 했더라도 그 말씀을 입에 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아직 들어가야 할 학비도 적지 않았으며, 이전보다 가계지출이 늘어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올해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더 늦추면 영영 늦어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올해는 특별한, 그러니까 우리 할머니의 일흔 번째 생신이다.

 

▲ 일러스트=정다은 기자 panda157@weeklyseoul.net

 

보통은 ‘엄마’라는 말을 입에 머금기만 해도 가슴이 아리다고 한다지만, 내게는 ‘할머니’라는 단어가 훨씬 크게 가슴에 사무치곤 했다. 이제까지 일생의 8할을 할머니 품 안에서 커왔으면서도, 당신께도 역시 그 칠십 년 일생의 못해도 삼분의 일을 내가 나눠가졌을 터인데도 고작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요즘 필요로 하는 선물이 뭔지조차 가늠하기조차 어렵다는 건 새로이 얻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게다가 조금씩 돈을 벌기 시작한 때부터는 이것저것 선물을 가장한 자기만족 차원의 물질을 드려오던 터라, 물어봤자 “됐다. 이미 있다”는 실속 없는 답변을 들을게 뻔했다.

그냥 그게 가장 눈에 들어왔을 뿐, 달리 큰 이유는 없었다. 할머니 생신까지 일주일이 채 남지 않은 때였다. 이유라면 그저 ‘같이 있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꼽을 것이다. 다른 가족들은 공교롭게도 할머니 생신날 함께하지 못하는 일이 있었고, 그것은 다른 비용 없이 오롯이 할머니와 나의 여행을 계획할 수 있는 기회라는 뜻이었다. (현실적으로 다른 가족들의 여행경비까지 부담하기엔 아직 부담이니까….)

‘일본이 좋겠다.’

스물 둘 셋 즈음이었나. 대학생활도 지겨워질 무렵 곧잘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1948년 출생으로 아직 해외에 나가보신 적 없는 옛날 어른이시다. 엄마는 워낙 가꾸는 것,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해 내가 굳이 이거 좋대, 저거 해봐 하지 않아도 당신의 삶을 즐기고 계신 듯하다. 그래, 내 꼭 할머니 손을 잡고 언젠가 멀리 멀리 즐겁게 놀다 오리라, 늘 생각했었다. 일본이라면 내게 낯설지 않았고, 비행시간도 짧고, 무엇보다 온천이라는 겨울여행의 테마가 있지 않은가. 잘만 이야기하면 가볍게, 좋은 생일 선물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았다. 덜컥 비행기표는 끊어버렸는데, 막상 여러 가지 고민이 뒤따랐다. ‘일본을 싫어하시면 어떡하지’ ‘할머니 무릎이 약했는데, 나 혼자 괜찮을까’ ‘안 간다고 하시면 어떡하지(환불도 안 되는데)’ ‘날씨는 좋게 맞으려나… 재해라도 생기면 어떡하지?’ ‘이 숙소가 나은가, 저런 호텔이 나은가’ ‘차를 렌트하는 것이 나은가’ ‘패키지를 끊을 걸 잘못했나?’ ‘목욕은 확실히 좋아하시고(좋다!), 쇼핑은 좋아하시나….’ 이에 급히 짱구를 굴리기 시작했다. 20대의 눈높이로 70세의 크고 작은 불편과 취향을 전부 감당하기엔 역부족이다, 라는 의구심이 솟구쳤다.

D-6. 일주일 전부터 여권 하나 만들어 두라고 신신당부 했지만, 초조해진 나는 구청에 전화를 걸어 발급 가능 날짜를 물었다. 우리 비행기는 수요일인데, 다행히 오늘 신청하면 늦어도 화요일에 나온단다(!) 어제 여권 사진을 찍으신 듯 했다. “할머니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구청 가야해!” 라고 발을 동동 구르는데 “어~ 지금 교회 전도하러 왔음. 이따가~” 라고 카톡이 왔다. 한 시간에 한 번 꼴로 안부를 가장한 독촉을 했던 것 같다. 마침내 여권 신청을 마쳤다고 연락을 받았고, 나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도 터뜨린 듯 했다.

 

▲ 내가 사랑하는 할머니

 

“우리 목욕하러 일본 갈 거야.”

주말에 본가에 내려갔다. 선포를 하고 나서 며칠 쯤 지난 뒤였고, 그 동안 할머니는 말이 없으셨다. 만난 지 2년 된 연인 K는 “의도는 좋은 거 알겠는데, 혹시 좋은 소리 못 들어도 너무 서운해하지마. 또 집에 안 좋게 다녀 올까봐 걱정돼서 그러지” 라고 당부했다. “안 그래!” 하던 자신감은 점점 걱정으로 바뀌곤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분위기는 훨씬 화목했다. 할머니는 말은 없으셨지만, 평소 기독교 방송 아니면 안보시던 분이 갑자기 일본의 웰빙 라이프 다큐를 틀어보시지 않나, 엄마는 파- 하고 꽃이 만개하는 표정으로 ‘어화둥둥’이라든지 ‘우쭈쭈’하는 식으로 나를 대하는 기분이 들었다.

스윽, 할머니 옆에 다가가 앉았다. “근디, 엄마랑 같이 가야지… 너랑 가면 뭐허냐. 재미도 없게.” 순간 가슴에 화살이 푹 날아온 기분으로, “내가 뭐!!! 나도 재밌는 사람이다!!!” 하고 싶던 걸 꾹 눌러 잡고 말꼬리를 돌렸고, 엄마는 “말은 저래 하셔도…”하면서 쿡쿡 웃음이 새어나오는 걸 참느라 입이 씰룩씰룩 거렸다.

“너 일본어는 좀 하냐.”

 

 

할머니가 틀어 놓은 다큐멘터리에서 같은 기숙사에 거주하며 생활하는 청년과 노인의 인터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눈앞에 닥친 고령사회를 두고 일본의 작은 마을에서 시도한 대응이었다.

“조금? 그나저나… 할머니는 할 줄 아셔?”

“우리 때는 일본어 안 썼어~ 나야 모르지. 팔십 먹은 아저씨들은 가끔 잘 허는데….”

인터뷰가 끝나자 고령사회를 노래한 일본의 신인 아이돌 그룹의 소개가 이어졌다. 평균 연령 67세로 도합은 337, 막내 59세부터 리더 80세까지 구성된 5인조 그룹이다. 코치 현의 고령화 모습을 노래한 ‘爺-POP’이 대표적인데 후크로 돌리는 “高齢バンザイ(고령-만세!)”가 중독성 있다.

 

高知県 こうなってるんだ(고치현 이렇게 돼 버렸다)

3人に1人 65歳以上(3명 중 한 명 65세 이상)

だけど陽気陽気 エブリバディ陽気(하지만 쾌활쾌활 에브리바디 쾌활)

5時半なら 目がさめる(5시 반이라면 눈이 떠진다)

だけど元気元気 気持ちは元気(그래도 건강건강 마음은 건강)

高齢バンザイ! 高齢バンザイ!(고령 만세! 고령 만세!)

- 지팝(爺-POP)의 노래 고령만세!(高齢バンザイ!) 中-

 

“고여 있는 강은 NO THANK YOU” 라는 가사가 유독 와 닿았다. 가까이서 할머니 온기를 느끼니 그녀는 아직 건강하고, 유쾌했으며 충분히 젊다. 흐르는 강이 되어 뜨거운 포옹을 나눌 수 있길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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