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초록 여행스케치> 지울 수 없는 역사와 사철 아름다운 자연, 충남 천안

천안은 3·1독립 만세 운동을 드높이 외쳤던, 유관순 열사의 고향이다. 예부터 삼남(三南:충청, 전라, 경상) 지방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 중심지이기도 했다. 천안(天安-‘天下大安’의 줄임말)이란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하늘아래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이곳이 평안해야 세상이 태평하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 3.1만세운동의 이미지 모형(유관순기념관)

☞천안에서 일어난 3·1운동

천안 하면 유관순이 먼저 떠오른다. 유관순은 ‘조선의 잔 다르크’라 불릴 정도로 우리 민족의 자랑이다. 때는 3월이 아닌가. 유관순은 3월의 아이콘이다. 유관순 열사를 기리는 유적지 순례는 그래서 더 각별하다. 유관순열사기념관, 유관순 생가, 추모각, 동상, 아우내장터, 초혼묘, 봉화대(탑), 매봉교회 등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열사의 유적지는 일제 강점기의 항일 투쟁사를 두루 살펴볼 수 있는 산 역사교육장이다.

 

▲ 유관순 생가
▲ 3.1만세운동의 진원지인 아우내장터

 

“만국이 평화를 주장하는 금일을 당하야 (…) 우리도 비록 규중에 생활하여 지식이 몽매하고 신체가 연약한 아녀자 무리나 국민 됨은 일반이요 양심은 한가지라 (…) 우리는 아무 주저할 것 없으며 두려워할 것도 없도다. 살아서 독립기(獨立旗) 하에 활발한 신국민이 되어 보고 죽어서 구천지하에 이러한 여러 선생을 좇아 수괴(羞愧)함이 없이 즐겁게 모시는 것이 우리의 제일의무가 아닌가. 간장에서 솟는 눈물과 충곡(衷曲)에서 나오는 단심으로써 우리 사랑하는 대한 동포에게 엎드려 고하노니 동포! 동포여! 때는 두 번 이르지 아니하고 일은 지나면 못하나니 속히 분발할지어다.”

-3․1운동 시기 발표된 ‘대한독립여자선언서’ 중에서-
 

‘대한독립여자선언서’에서 보듯 3·1운동은 여성이 주축이 되어 벌인 민족운동이다. 그 중심에 유관순이 있다. 김인종 김숙경 등 만주지역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발표한 이 선언서는 우리나라를 강점한 일제를 규탄하고 독립운동을 촉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발표한 대한독립여자선언서(유관순기념관)
▲ 만주러시아 지역 독립운동가 39명이 조국독립을 이루겠다고 결의한 대한독립선언서(유관순기념관)

 

사적지 안내도를 들고 한옥 양식의 유관순열사기념관에 들어가 본다. 열사의 출생과 성장과정, 3·1 만세운동 이미지 상징물, 아우내장터의 독립만세운동, 유 열사의 수형기록표, 재판기록문, 서대문 형무소의 벽관, 대한독립선언서, 대한독립여자선언서, 태극기 목각판, 옥중투쟁과 순국, 영상실, 타임캡슐 등이 자세한 설명과 함께 일목요연하게 전시돼 있다.

기념관에서 나와 유 열사의 영정이 모셔진 추모각에서 잠시 묵념에 잠긴다. 유 열사의 애국정신을 마음에 새기고 방명록에 흔적을 남긴다. 추모각 옆으로 난 매봉산 기슭을 따라 올라간다. 500m쯤 오르니 그의 영혼을 모신 초혼묘(招魂墓)가 보인다. 여기서 돌계단을 따라 조금 더 오르니 열사에게 바치는 헌시(獻詩)가 새겨진 돌비가 서 있고 조금 더 올라가니 당시(1919년 3월 31일 밤(4월 1일))의 거사를 알렸던 봉화대와 봉화탑이 서 있다. 횃불을 높이 들고 떨쳐 일어났던 3·1만세운동은 이렇게 우리 앞에 어렴풋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매년 2월 말일에는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고 유관순열사를 비롯한 애국선열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사적지와 아우내장터 일원에서 봉화제가 열린다. 또한 유관순열사의 순국일인 9월 28일엔 추모각에서 추모제가 거행된다.

 

▲ 봉화대와 봉화탑
▲ 유관순 생가 옆의 매봉교회

 

생가는 봉화대에서 매봉산 허리를 돌아 조금 내려가면 있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만세운동 당시 일본군들이 가옥과 헛간을 불태워 빈터만 덩그러니 남아 있던 것을 다시 복원했다. 생가 안방에는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논의하던 모습이, 건넌방에는 태극기 제작하는 모습을 밀랍인형으로 재현해 놓았는데 문득 숙연해진다. 나무 울타리와 초가로 단장된 생가 옆에는 기념비가 서 있고 열사가 다녔던 매봉교회가 있다. 매봉교회는 1919년 항일운동을 펼칠 당시 교인들이 주축이 되어 아우내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의병들과 함께 국채보상운동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한 교회다.

 

 

▲ 유관순 동상

☞맑고 당찬, 의지가 강했던 소녀

유관순은 1902년 11월 이곳(병천면 용두리)에서 태어났다. 5남매 가운데 둘째 딸로 일찍이 계몽운동가였던 아버지 밑에서 스스로 민족의식을 깨우칠 정도로 활달하면서도 정의가 불타는 아이였다고 한다. 열서너 살 무렵에 선진학문(근대식 교육)을 배우기 위해 선교사 부인을 따라 선뜻 고향 마을을 떠날 정도로 꿈도 다부졌다.

 

▲ 유관순기념관에 전시한 유관순 자료들
▲ 이화백년사에 소개된 유관순 자료들(유관순기념관)

 

이화학당(현 이화여고)과 정동교회는 유관순의 꿈이 결실을 맺는 첫 관문이었다. 그러던 중에 맞이하게 된 3월 1일과 3월 5일의 만세 운동은 그의 운명이 바뀌는 획기적인 사건이 되고 말았다. 1919년 3월 13일 이화학당에 다니던 유관순은 일제 당국(조선총독부)이 여기저기 들고일어나는 학생들의 만세운동을 두려워한 나머지 휴교령을 내리자 독립선언문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는 김구응, 조인원, 유중무 등 큰뜻을 같이하는 분들과 함께 마을 사람들을 설득해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모으고 태극기를 만드는 등 시위 준비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 유관순의 영혼을 기리는 초혼묘

☞독립만세운동의 현장, 아우내장터

그리고 마침내 4월 1일(음력 3월 1일) 마을 사람들과 함께 생가에서 가까운 아우내 장터로 향했다. 아우내 장터엔 3000명을 헤아리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오후 1시 독립선언서 낭독이 끝나자 그는 장대에 커다란 태극기를 매달고 시위대열에 앞장섰다. 만세 함성이 아우내 장터를 뒤흔들자 일본 헌병과 주재소의 헌병들이 들이닥쳐 시위대를 제지했다. 헌병들은 선두에 선 유관순을 총검으로 위협하더니 태극기 깃대를 쳐서 부러뜨리고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그날 수많은 희생자가 생겨났는데 그 중엔 안타깝게도 유관순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있었다.

유관순은 부상을 입고 체포되어 천안 헌병대와 공주 감옥에서 재판을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고 만다. 일본 재판관은 유관순의 논리정연하고 당당한 말에 격분해 징역 5년을 선고했다. 유관순은 옥중에서도 계속 만세를 외쳤는데 그녀의 집요함에 일본군은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유관순은 심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1920년 9월 28일 서대문 교도소 안에서 열여덟 살의 꽃다운 나이로 눈을 감았다. 유관순의 시신은 이화학당에서 인계받아 정동교회에서 간략한 장례의식을 치르고 수레에 실려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지만 그 후 일제의 도시개발에 묻혀 사라지고 말았다. 정말이지 안타깝고 애석한 일이다. 세월이 흐른 지금 그의 영혼은 사적지에 있는 초혼묘에서나 더듬어볼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유관순의 애국혼과 고귀한 정신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이와 함께 충청남도는 그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기 위해 2002년에 유관순상을 제정했다. 고등학교 1학년 여학생 수상자에게 유관순횃불상을 수여하고 있다. 3·1운동이 일어난 지 어언 98년, 우리는 유관순을 통해 굳은 염원과 고귀한 인간성이 무엇인지 배우게 된다. 그건 바로 자신보다 모두를 생각하는 진한 조국애가 아닐까.

 

 

▲ 이동녕 생가 앞에 세워놓은 (산류천석) 휘호석

☞독립운동에 몸 바친 분들

천안엔 유관순 열사를 비롯해 독립운동에 몸을 바친 분들이 여럿 있다. 신간회에 가입하여 항일 민족운동을 전개한 유석(維石) 조병옥 선생은 1929년 광주학생 운동 배후 조종 혐의로 3년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 수립 후 대통령 특사, 유엔 한국 대표, 6.25 동란 때에는 내무부장관을 지냈으며 독립운동가로 정치가로 의회 민주주의를 펼치려다 병세가 악화돼 미국에서 숨을 거뒀다. 유관순 생가에서 2km 거리에 선생이 태어난 옛집(생가)이 있다.

 

▲ 이동녕 선생의 생가와 동상
▲ 조병옥 선생 생가

 

목천읍 동리에서 태어난 석오(石吾) 이동녕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임시의정원 초대의장, 국무총리, 국무위원, 주석 등의 중책을 맡았다. 조국광복의 염원을 담아 즐겨 쓰셨던 대의(大義)라는 글과 선생께서 독립을 향한 강한 의지로 자주 인용하셨던 ‘산류천석(山溜穿石)’ ‘광명(光明)’은 오늘날까지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생가 옆의 기념관에서 선생의 삶과 사상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선생의 친필 휘호와 친필서신, 임시정부 문서, 초상화, 사진 같은 귀중한 유품이 눈길을 끈다.

 

 

▲ 독립기념관 겨레의 집

☞한민족 5000년 역사를 모아둔 독립기념관

나라를 세운 독립운동의 정신을 좀 더 느껴보고 싶다면 독립기념관으로 가면 된다. 선사시대부터 일제 강점기까지의 역사를 시대별, 주제별로 한곳에서 볼 수 있는 곳으로 5천년 우리 겨레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7개의 전시관과 겨레의 집, 겨레의 탑, 광개토대왕릉비, 입체영상관, 독립군체험학교, 시어록비, 추모의 자리, 태극기한마당, 통일염원의 동산, 밀레니엄숲, 조선총독부 철거부재 전시공원 등을 차례로 돌아보노라면 나라사랑의 마음을 진하게 느낄 수 있다. 광장 한복판에 서 있는,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의 날개와 기도하는 양손의 모습을 표현한 높이 51미터의 ‘겨레의 탑’과 수덕사 대웅전을 본떠 설계하고 지은 ‘겨레의 집’은 한식 맞배지붕에 동양최대의 기와집이다. 매주 월요일은 휴관한다.
 

 

▲ 천안삼거리공원

<둘러보면 좋은 곳>

♦천안삼거리공원=우리 민요 <흥타령>에 나오는 천안삼거리(천안시 삼룡동)는 조선시대, 지방에서 서울로 갈 때 한번은 거쳐야 했던 길목이었다. 능수버들로 둘러싸인 커다란 공원은 쉼터 구실을 톡톡히 한다. 이파리를 다 떨구어버린 휘늘어진 능수버들 주위로 아담한 연못과 정자(현소각, 영남루)가 서 있고, 공원 들머리에 세워놓은 ‘흥타령(興打令)비’는 지나가는 길손의 발길을 머물게 한다.

♦광덕사(산)와 호두마을=천안 시내에서 서남쪽 광덕면 소재지로 가면 신라 선덕여왕 때(637년) 자장율사가 창건한 천년고찰, 광덕사가 나온다. 광덕면은 호두 주산지로도 유명하다. 우리나라 호두의 50%가 이곳에서 생산된다. 산자락마다 빼곡하게 들어찬 호두나무는 이곳이 호두 산지임을 알려준다. 광덕사는 호두나무가 처음 심어진 곳이다. 보화루 앞에 서 있는 호두나무는 높이 20m, 둘레 4m, 수령 400년을 헤아린다.

♦태조산=천안 남서쪽에 광덕산이 있다면 북서쪽에는 고려 태조가 머물렀다는 태조산이 있다. 태조가 산신제를 지냈다는 제단의 흔적을 비롯하여 동양 최대의 아미타여래청동좌불이 있는 각원사는 절집 특유의 고즈넉함이 물씬하다. 부처님 진신사리와 팔만대장경을 둔 청동좌불상은 무게만 60톤에 달한다.

 

▲ 태조산 각원사
▲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광덕사 호두나무

 

 

여행팁(지역번호 041)

◆가는 길=유관순사적지: 천안논산간고속도로나 경부고속도로를 이용, 남천안 나들목 또는 목천 나들목으로 나오면 된다. 천안역, 천안종합터미널에서 400번대 병천 방면 시내버스 운행. 기차편: 경부선, 호남선, 장항선-천안역, 고속전철 천안아산역. 독립기념관: 경부고속도로 목천 나들목에서 3분 거리. 천안종합터미널에서 진천행 시내버스(400번) 이용. 30분 소요. 이동녕기념관: 경부고속도로 목천나들목-목천읍사무소-이동녕생가. 천안역(터미널)에서 400, 402번 버스 이용→목천교 앞 동리 입구 하차.

◆맛집=독립운동의 현장인 아우내는 예로부터 장터가 크게 발달했다. 아우내장터의 명물은 병천 순대. 아우내한방순대(555-9833), 쌍둥이네순대(567-8777), 부부순대(555-1912) 등. 순대국밥, 병천순대, 모듬순대, 순대곱창전골이 주 메뉴다.

◆숙박=천안시내의 모텔, 호텔을 이용하거나 병천면 소재지에 아우내펜션(522-9999), 병천3·1펜션(010-9040-3096) 등이 있고 광덕사 쪽에도 마메종펜션(010-8801-8458) 등이 있다.

 

<여행작가/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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