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 류승연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늘 겸손해야 한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말로만 알고 글로만 안다. 실제 생활에서 ‘겸손’의 미덕을 실천하고 사는 이는 많지 않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더더욱 필요하다. 바로 지금이야말로 ‘겸손’이라는 덕목을 실천에 옮겨야 할 때다.

요즘 나는 버블현상을 겪고 있는 듯하다. 버블현상의 중심에 있는 건 바로 나다. 타 매체에 기고하고 있는 장애 아이 육아기가 자리를 잡으면서 고정 독자층이 생겼다. 책으로도 발간될 예정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작가님’ ‘선생님’이란 직함으로도 불리게 되었다.

 

▲ 사진=pixabay.com

 

반년 전부터 SNS 활동을 시작하자 나를 둘러싼 거품은 순식간에 더 부풀기 시작했다. 글로만 접해오던 존재가 SNS를 통해 모습을 드러내고 사람들과 소통을 시작하니 신기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했을 것이다.

발달장애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이나 특수교사, 관련 전문가 사이에서 어느새 나는 유명 인사 비스무리하게 되었고, 드물긴 하지만 일반인 중에서도 거리에 돌아다니는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제법 뿌듯하기도 했다. 연예인병 초기 증상이 이런 것일까? 집 앞 슈퍼를 나가는 데도 거울 앞에서 입술을 바른다. “맨 얼굴로 나가면 생기가 없어”라고 말하는 나를 보고 남편은 콧방귀를 뀐다. “네가 언제부터 외모에 신경을 썼다고.”

그러게 말이다. 평소 로션 하나도 안 바르고 다니던 내가 말이다.

나는 항변을 한다.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단 말이야.” 그랬다. 아들의 이야기를 다루다보니 아들이 다니는 특수학교와 병원, 치료실 관계자 및 장애 아이 엄마들이 내가 쓰는 연재를 주의 깊게 읽었다. 그 뿐이랴. 딸 학교의 학부형들도 오가다 만나면 “글 잘 읽고 있다”는 인사를 건넸다. 동네에서 이미 얼굴이 팔린 것이다.

동네를 벗어나도 마찬가지. SNS 상에서 소통하던 이들은 나를 만나고 싶어 했다. 내 게시물에는 나를 “작가님~” “선생님~”이라 부르는 이들의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좋았다. 출산 후 ‘누구 엄마’로만 살다 누군가가 나를 내 이름으로 불러준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거기에 제법 그럴싸한 호칭까지 붙어 있다. 작가님이라니. 선생님이라니. 싫어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비록 발달장애 관련 분야에서이긴 하지만, 그것도 SNS라는 특정 공간 속에서이긴 하지만, 유명인 비스무리해지는 건 좋은 점이 많았다. 나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만큼 나 역시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가고 싶은 모임에도 거리낌 없이 갈 수 있었고, 듣고 싶은 강의도 마음껏 들을 수 있었다.

명성이랄 것까진 없지만 어쨌든 나름의 인지도가 있다는 건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요즘 나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우려가 들기 시작한다. 나에 대한 거품이 필요 이상으로 커져가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나 혼자만의 착각은 아니었다. 최근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나는 나를 둘러싼 버블현상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내가 접촉을 한 이들은 대부분 나름의 업적과 명성을 갖고 있는 훌륭한 분들이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나에게 “영향력이 크다” “스타성이 있다” “발언권이 있다”고 말을 한다. 좋은 뜻으로 스쳐가듯 나온 말이지만 그런 말을 들으면서 나는 무서워진다. 영향력이 커지면 그에 따른 책임도 커져야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심을 잡는 게 필요했다. SNS 상에서 영향력이 커진 나는 어느 한 쪽에 치우치면 안 됐다. 내가 박수를 보내고 지지하는 곳에 힘이 실리게 되는 현상이 벌어질 수 있었다.

개인으로서의 나는 마음껏 호불호를 드러내도 되지만 내 말에 공공성이 실리게 되면 그 때부턴 그에 따른 책임도 져야 했다. 대중의 판단과 선택에 있어 유명인 비슷한 내가 무언의 힘을 작용시키면 그건 내 책임이 됐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그 힘에 도취되지 않으려면 겸손해야 한다. 한 없이 겸손해야 한다.

나로 인해 같은 처지의 평범한 엄마들이 위축감을 느끼게 해서도 안 됐다. 분명 똑같이 장애 아이를 키우는 엄마인데 내가 특별취급을 받으면 받을수록 일부 엄마들의 상대적 박탈감은 커져만 갔다. 말로 하진 않아도 느낌은 다 전해져 왔다. 그건 옳지 않았다. 당신이나 나나 똑같이 장애 아이를 키우는 엄마일 뿐이다. 나로 인해 위축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무엇보다 거품이 커져가면서 내가 온전한 내 자신이 아닌, 내 자신보다 더 나은 무엇으로 포장되어 가고 있는 게 우려스러웠다.

협동조합을 시작하려는 한 모임이 있어서 공부도 할 겸 포럼에 참석을 했다. 강사의 강연도 듣고 토론자들의 발언도 이어진다. 나는 열심히 받아 적으며 공부를 했는데 포럼이 끝난 후 협동조합의 대표님이 인사를 건네며 미안해하신다.

“선생님에게도 발언 기회를 드렸어야 했는데….”

아뇨아뇨 대표님. 선생님이라뇨. 발언이라뇨. 전 그냥 사회적 협동조합에 대해 공부하러 나온 엄마일 뿐이에요. 협동조합에 대해 아는 게 쥐뿔도 없는데 뭔 발언을 한단 말입니까. 게다가 저보다 연배도 높으신 분이 제게 선생님이라뇨.

물론 이런 말을 직접 하지는 못했고 속으로만 생각했지만 이때부터 나는 경각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건 아니다. 이러한 현상은 분명 거품이다. 나는 나여야 한다. 그냥 놔둬도 거품이란 건 때가 되면 사라지기 마련이지만 이 현상이 더 오래가기 전에 내 손으로 직접 거품을 걷어내야겠다. 그래서 이 글을 쓰기에 이르렀다.

우선 내가 쓰는 장애 아이 육아기. 그래. 처음 나올 때는 분명 이슈가 될 만했다. 그동안 TV나 SNS 등을 통해 아이의 장애를 공개한 부모는 많이 있었지만 나처럼 매체를 통해 공개적으로 대중 앞에 연재를 한 경우는 없었던 듯하다.

하지만 요즘은 상황이 달라졌다. 부모들로 구성된 전문가 집단에서 자신들의 독자 사이트를 통해 장애 아이를 키운 경험담을 공유하기 시작했고, 멋진 화가로 자폐증 자녀를 키워낸 어머니 한 분도 내년부턴 다른 매체를 통해 글을 기고하기로 했다.

이제 나와 같은 형식의 글을 볼 기회가 많아졌다. 독자들은 골라볼 수 있게 되었고, 나 역시 ‘심리적 책임감’을 줄일 수 있게 되었다. 더불어 나의 ‘특별함’도 사라지게 되었다.

사실 ‘특별함’이 사라지게 되는 건 아쉬운 일이기도 하다. 이왕이면 남들이 인정해주는 존재로 사는 게 뭔가 더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속된 말로 하자면, 뽀다구가 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나여야 한다. 나로서 인정받아야지, 나 이상의 것으로 포장되어서는 안 된다.

포장된 거품 속에 있는 요즘의 나는 마치 전문가라도 된 것만 같다. 여기저기서 선생님이라 부르고 작가님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노노. 나는 발달장애 자녀의 성공적 후일담을 쓰고 있는 엄마가 아니다. 여전히 아이의 장애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고, 사회적 법과 제도 및 시스템과 조직 등 알아야 할 것도 산더미다.

다른 엄마들과 마찬가지로 열심히 배워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일 뿐이다.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고민하고 시도하는. 전문가가 아닌 엄마일 뿐이다. 이 지점은 확실하게 모두가 인지해야 한다.

마지막으로는 내 외모에 대한 거품도 빠져야 한다. 내가 올린 프로필 사진을 보고 내가 발달장애 아이를 키우는 ‘예쁜 엄마’라는 환상을 품고 있는 이들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슬프게도 나는 셀카의 여신이다. 셀카에 미친 동네 아줌마로부터 셀카의 모든 기술을 전수받은 몸이다.

실제로 나를 만나면 깜짝 놀랄 정도로 프로필 사진 속 나와 현실의 나 사이에는 괴리감이 있다. 이렇게 고백할 바엔 프로필 사진을 실사로 바꾸면 되지 않겠냐고?

아니, 그러고 싶지는 않다. 나도 예뻤던 과거가 있었고, 푹 퍼진 아줌마가 됐어도 지금의 이 모습을 곧이곧대로 보이고 싶지 않은 누군가는 마음속에 있는 법이다. 아무리 누군가의 아내가 되었고 누군가의 엄마가 되었어도 과거의 내 모습으로 나를 기억해줬으면 하는 누군가에게 현실의 나를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자. 여기까지 고백했으면 이제 내 할 일은 다 했다. 나는 성공한 부모로서 자랑스럽게 후일담을 쓰는 엄마가 아니며, 전문성을 지닌 전문가도 아니고, 실제로는 사진만큼 예쁘지도 않다.

이제 나에 대한 거품이 빠지고 온전한 내 자신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거품에 취해 연예인병에 걸릴 뻔했던 과거를 청산하고 맨 얼굴로 집 앞 슈퍼에 나가야 할 시간이다. 솔직한 내 자신을 드러내고 끝없이 겸손해져야 할 시간이다.

거품이 빠지고 나면 한동안은 상실감이 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헛된 나비의 꿈에 취해있는 것보단 실존하고 있는 나로서 존재하는 게 낫다. 나는 나여야 한다. 그것이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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