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코카차…비를 맞으며 길을 걸었다
따뜻한 코카차…비를 맞으며 길을 걸었다
  • 강진수 기자
  • 승인 2017.12.29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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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남미여행기-다섯번째 이야기 / 강진수

9.

얼마간 잠들어 있었을까. 덜컹거리는 버스 안이 이제야 적응되는 것 같던 새벽, 차창에는 하얗게 김이 서려 있었다. 옷깃으로 김을 닦아내니 멀리 드높은 산들이 보이고 그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누런 강물의 굽이침이 보였다. 그렇게 굽이굽이 산길로 버스가 다닌 지 열 몇 시간. 버스를 그렇게 오래 타 본 것도 생애 처음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타야할 버스 구간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도 참 모순적일 수밖에 없다. 예상 경비보다도 경비를 덜 챙겨온 우리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불편하더라도 경비를 아끼기 위해 저렴한 육로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 첫 번째 시작이 되어준 쿠스코행 버스. 정말 불편하고 심지어 온갖 냄새에 시끌벅적한 분위기, 더러운 바닥… 따지고 보면 이래저래 이야기할 것이 많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통틀어서 그렇게 나빴다고 까지는 말 못할 것 같다. 이는 곧 그만큼 남미에 적응해버렸다는 것일지도.

 

 

김이 서리다가 만 차창 너머로 빼곡한 한 도시가 보이기 시작한다. 쿠스코다. 페루의 원래 수도였으며 잉카 족의 역사가 서려있다는 도시. 나는 버스 안에서 쿠스코의 전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설렌다. 많은 책에서 수없이 마주해왔던 쿠스코. 단 한 번도 내가 이곳에 발을 디디리라는 생각을 못 했다. 도시 전체를 에워싸는 거대한 잉카 족의 산줄기. 그 줄기를 타고 흘러내려오는 도시 위의 안개도 전부 웅장하며 아름답게 보인다. 버스는 천천히 그 웅장함 속으로 밀려들어간다.

버스에서 내린 후, 바쁘게 짐을 내렸다. 일단 아르마스 광장으로 가기로 한다. 아르마스 광장은 스페인 권역의 남미 국가들 어디를 다니더라도 그 도시의 중심부를 가리키는 징표 같은 것이다. 즉, 아르마스 광장이 어디있는지만 알아도 도시의 대부분을 파악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르마스 광장 쪽으로 가서 후보로 둔 근처 숙소들을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고 의견을 모았다. 초행에 택시를 타기는 조금 두렵기도 하고 리마에서의 안 좋은 추억이 떠오른다. 실제로 쿠스코에는 택시 강도가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정보도 접했다.

 

 

지도를 보고 걷기 시작한다. 꽤나 걸어 갈만한 거리라고 생각했다. 주변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즐거웠고 도시의 안 보이는 곳 까지 속속들이 구경하고 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 와중에도 짐 관리는 철저해야 한다. 언제 어디서 위협을 당하거나 소매치기, 강도 등의 범죄에 노출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짐을 손으로 꼭 쥐거나 껴안고 걸었다. 신기한 마음으로 길 한복판에서 두리번거리고 있으면 형은 나를 툭 치면서 조심하라고 조언해주곤 했다. 그렇다. 우리는 아직 초보 여행자에다가 남미에 온 지 얼마 안 된 말하자면 얼간이 같은 존재다. 그렇기에 더욱 자신의 신변에 신경을 쓸 수밖에.

그렇게 한참을 걷고 있었을까. 갑작스럽게 비가 쏟아진다. 한 두 방울씩 떨어지던 빗줄기는 점점 거세졌다. 내가 가진 우산 하나뿐인데… 어쩔 수 없이 형과 우산을 나눠 쓰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커다란 성당을 지나고 나서야 저 편에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길목이 보인다. 쿠스코의 중심부 아르마스 광장이다. 아르마스 광장은 두 개의 커다란 성당과 상점 건물로 둘러싸인 곳이다. 중앙에는 분수가 있고 사람들은 평화로웠다. 분수마저 평화로웠다. 비가 멈추고 분수의 물줄기가 흘러나왔다. 꼭 우리의 도착을 축하해주는 것처럼.

빨리 숙소를 찾아서 짐을 풀어야 한다. 쿠르미 호스텔을 찾아갔다.

 

 

아르마스 광장의 뒤편은 상당한 오르막길이다. 게다가 쿠스코는 해발 4000미터가 넘는 고산지대. 그런 고산지대에서 오르막길을 오르려니 숨이 가빠오고 두통이 밀려오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올라가다가 작은 공원이 있기에 잠시 쉬어가기로 한다. 어디선가 한국말이 들려왔다. 한국인 단체 관광객이다. 인사를 나눈다. 그들은 우리의 다음 목표지인 볼리비아에서 건너왔다고 했다. 우리도 볼리비아를 간다고 하니 그들은 쓰고 남은 볼리비아 돈과 고산병약을 건넨다. 감사한 인연. 서로의 여행에 행복이 있기를 기원하며 우리는 다시 숙소를 찾아 올라갔다.

수소문 끝에 찾아간 쿠르미. 그곳은 여느 호스텔보다도 더 평화롭고 고요하다. 체크인을 하고 짐을 풀며 잠시 쉬기로 했다. 이곳에서 그렇게 오랜 시간들을 보낼 줄은 몰랐다. 하지만 여행의 묘미는 아무래도 돌발적인 상황들이다. 시간이 지나면 그것으로부터 점점 익숙해지고 평온해진다. 그때부터 여행은 더 즐겁다. 더 아름답다.

 

10.

형은 고산병 증세가 좀 심했다. 한참동안 쿠르미 로비에 놓여있는 코카차를 마시며 휴식을 취했다. 심장이 아파오고 숨이 가쁘다고 한다. 나도 조금의 두통이 있다. 고산병 증세에는 코카차가 그렇게 좋다하니 몇 번이고 따라 마셨다. 쿠르미는 ‘ㅁ’자의 구조로 되어있어 로비의 천장이 뚫려있고 밑엔 마당이 있다. 그곳의 벤치에 앉아서 코카차를 마시면 한결 몸이 나아지는 기분이 든다. 해야 할 일이 많기에 더 이상 게으름을 피울 수는 없다. 한국에서 황열병 예방 접종을 받지 않고 왔기에 반드시 이곳에서 해결해야만 한다. 문제는 우리는 스페인어도 잘 못하는데 병원을 가서 접종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한참 블로그와 여행 가이드 책을 뒤져가며 병원의 위치를 알아내고 접종을 받는 곳의 위치도 자세히 알아봤다. 병원까지는 또 걷기로 한다. 비가 오고 고산병 증세도 있지만, 아까보다도 더 천천히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병원까지 왔다 갔다 하는 경로를 알아놓을 필요도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병원에 우리는 들어섰고 순조롭게 접종실을 찾아 문을 두드릴 수 있었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는다. 황열병 접종을 쉬는 날이다. 허망하게 다시 숙소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빗방울이 다시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한다. 숙소에 놓여있는 따뜻한 코카차를 생각하며, 아무 말 없이 비를 맞으며 길을 걸었다.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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