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기획> 복지국가 스웨덴에서 살아보기 / 이석원

▲ 스웨덴의 어린이들은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자유분방하고 독립적이다. 18살이 되면 부모에게서 완벽히 독립을 하는 것도 이미 그 전부터 몸에 배어 있는 독립심 때문이다.

 

“형님, 우리 아들이 오늘 뭐라는 줄 아세요?”

어느 날 스웨덴 한 대기업으로 파견돼 3년 째 근무 중인 후배가 어이가 없다는 투로 얘기한다.

“뭐라는데?”

“내년이 되면 자기는 아빠 허락 없이 여자와 자도 된다고 하네요.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예요?”

“XX가 내년에 몇 살이지?”

“15살이요. 스웨덴 나이로. 중학교 3학년 되는 거예요.”

이 후배의 아들은 현재 사춘기다. 어느 날 학교에서 다른 친구들에게 스웨덴에서는 15살이 되면 부모의 허락 없이 이성 간의 성관계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15세는 18세가 되기 전, 즉 법적으로 성년이 되기 전 어른을 준비하는 나이다. 식당이나 극장 등에서 성인(Vuxen)과 구분되는 요금 적용을 받을 수 있는 어린이(Barn) 자격이 14세까지다. 즉 15세가 되면 스웨덴 미성년자들에게 주어지는 혜택 중 많은 부분들이 없어진다. 서서히 어른으로 가는 준비를 하는 셈이다.

그런데 스웨덴의 어린이(14세 이하의 청소년 포함)들은, 적어도 한국의 부모들 입장에서는 키우기 어렵다. 자기주장이 강하고, 반항심도 강하며, 어른들의 세계에 대한 기본적인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 스웨덴의 학교에서도 아이들은 자유롭게 즐기면서 학업을 할 수 있다. 강압적인 수업은 존재하지 않고, 한겨울에도 야외 활동이 많아 아이들의 자존감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만약 가정에서 엄마나 아빠가 아이에게 큰 소리로 화를 내거나 매를 들 경우 많은 아이들은 즉시 경찰에 신고한다. 경찰에서 가정 폭력으로까지 인식하지는 않더라도 이를 정당한 교육의 일환이라고 인정하지는 않는다. 학교는 물론 가정에서도 어떤 체벌이든 불법이다. ‘아이는 교육의 대상이지 훈육의 대상이 아니’라는 게 스웨덴 어린이 교육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잘못한 일을 가지고 부모가 꾸지람을 할 경우, 적어도 한국 사람들의 눈에는 그것이 꾸지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마치 아이와 부모가 아이의 잘못한 행동을 놓고 토론을 벌이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실제 부모의 일방적인 꾸지람이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꾸지람을 위해서 부모는 아이에게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심지어는 논리적인 이유를 들어 무엇을 왜 잘못했는지 지적해야 한다.

물론 아이도 반론을 펼 수 있다. 아이 본인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또 그것이 상대적 개념의 잘못이라면 자신의 경우는 어째서 잘못한 것이 아닌지 소명하고 항변할 수 있다. 명백히 자신의 잘못이라고 인정해도 그에 합당한 벌이 무엇인지에 대해 자기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

적어도 한국의 부모라면 가정 내 교육은 학교에서의 교육 이상으로 골치가 아플 것이다. 하지만 유럽을 비롯한 다수의 선진국 교육 전문가들은 스웨덴의 이런 방식의 가정교육은 장래에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토론이 가능한 사람으로 자녀들을 성장 시킬 수 있다고 얘기한다. 물론 아이들이 부모와 이런 식의 토론을 벌일 수 있는 것도 주입식이 아닌 토론 위주의 학교 교육의 영향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 1969년부터 방영된 TV 드라마 ‘삐삐 롱스트룸프’는 스웨덴 어린이들에 대한 인식이 획기적으로 바뀌는 계기가 됐다.

 

그런데 스웨덴의 어린이들이, 또 스웨덴의 부모들이 이럴 수 있었던 것은 아주 오래된 일은 아니다. 현재 스웨덴 20 크로나 지폐의 모델이며 스웨덴을 대표하는 아동 문학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동화 ‘말괄량이 삐삐(원제 Pippi Långstrump)’가 그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1945년부터 1948년까지 4권의 시리즈로 출간된 후 1969년부터 1975년까지 다시 6권의 시리즈가 나왔으며, 1979년부터 2000년 사이에 2권이 더 나와 총 12권으로 된 이 동화는 지금까지 1억 5000만 부 이상이 팔렸다. 세계에서 18번째로 많이 번역된 책이기도 하다. 1969년 TV 드라마로 만들어진 이후 영화와 애니메이션 등으로 각색됐다. 우리나라에서도 1977년 KBS에서 방영돼 상당한 인기를 끈 바 있다.

농경 중심 사회인 스웨덴에서도 전에는 가정 폭력이 많았다. 특히 농경 사회의 특징 중 하나인 가부장 제도에서 아버지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에 대한 폭력은 물론 가정 내 자녀에 대한 훈육도 폭력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말괄량이 삐삐’는 그런 스웨덴 사회에 엄청난 반향이었다.

동화 속 삐삐는 자유분방하다. 학교는 제 맘대로 빠지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뭐든지 한다. 학교 선생님이나 마을의 어른, 그리고 경찰관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어른이라도 불의하거나 부당하면 삐삐는 그에 대해 응징한다. 자기가 해야 할 이야기를 어른의 권위 때문에 참는 법이 없다. 삐삐의 그런 면은 절친인 아니카와 토미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된다.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스웨덴 사회는 서서히 이 파격 캐릭터인 삐삐에게 빠져든다. 동화가 TV 드라마로 방영된 후 그 파급력은 더 커진다. 그저 재미로 보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들의 자존감과 탈권위 의식으로 확산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삐삐적 사고방식’은 스웨덴의 사고를 지배하기에 이른다.

상당히 많은 스웨덴의 교육 전문가나 아동 전문가들은 현재 스웨덴 아동들의 독립성이 강하고, 자존감이 어른 못지않으며, 권위에 굴복하지 않는 모습을 삐삐에게서 찾는다. “1945년 이후 스웨덴은 언제나 삐삐 제너레이션”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스웨덴으로 이주한 한국의 부모들 중 상당수는 스웨덴식 교육에 대해 선망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정작 와서 목격한 것에 대해 걱정도 적지 않다. 스웨덴 어린이들의 학습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도 그들의 고민이 되고 있다. 게다가 아이들이 스웨덴 애들처럼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들이 될까봐 걱정도 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웨덴의 어린이 교육이 한국보다 더 큰 문제가 있을까? 처한 입장과 지향하는 바에 따라 각기 달리 생각할 일이다.

<이석원 님은 한국에서 언론인으로 일했습니다. 지금은 스웨덴에서 살고 있습니다.>

 

 

 

 

 

 

 

 

키워드
#N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