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남미여행기-여덟번째 이야기 / 강진수

15.

구불거리는 산길을 버스가 얼마나 올랐을까, 어느새 버스는 멈춰서고 우리는 하나씩 내리기 시작했다. 들뜬 마음을 감추질 못하면서. 준비했던 티켓을 손에 꼭 쥐고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틈을 타 얼른 출입문으로 갔다. 들어가서도 들떠있는 기분을 어떻게 주체하지 못했던 것 같다. 마추픽추를 보러 간다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전율이 오고 심장은 두근거렸다. 그런 기분은 나뿐만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노부부, 어린 학생들, 여러 관광객들 모두 마추픽추로 긴장되는 얼굴을 숨길 수 없었다.

돌로 된 보도를 조금 걷다보니 교과서 속에서나 보던 마추픽추의 모습이 천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신성한 그곳의 모습을 감추고 있던 구름이 천천히 개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마추픽추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서서 내려다봤을 때 그 기억이 잊히지가 않는다. 그것은 분명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어떤 신성함과 성스러움이 그 공간을 묵직하게 지배하고 있었고 나는 가만히 서서 모든 것을 아주 느린 속도로 일일이 내려다보았다. 건물을 이루는 돌 하나하나가 신비로웠고 어떻게 저 모든 돌과 흙을 이고 이 높은 곳까지 올라왔을까 말도 되지 않는 미스터리였다.

 

 

사진을 몇 장 찍고 여유롭게 마추픽추를 산책하다가 우리는 옛 도시에서 벗어나 그 외곽을 돌기로 하였다. 마추픽추 산 너머까지 엄청나게 긴 등산로가 있는데 그 길을 따라 걸으면 태양의 문이 나온다는 것이다. 태양의 문이 무엇인지는 전혀 알지 못하지만, 이곳까지 온 이상 볼 수 있는 것은 전부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무작정 등산을 시작했다. 사람들도 우릴 따라 태양의 문을 향해 산을 하나 둘 올랐다. 마추픽추의 중심가와는 완전히 멀어지고 있었지만 우린 그게 무슨 대수냐는 생각이었다. 길이 있으니 사람이 가는 거지. 우리는 그런 쓸데없는 걱정보다도 태양의 문이 과연 어떻게 생겼을까 하는 기대감과 설렘을 안고 한 층씩 돌계단을 밟았다.

등산로는 상당히 길어서 이래저래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가도 금방 이야깃거리가 동나곤 했다. 그럴 때면 우리는 휴대전화로 온갖 노래를 틀었다. 처음엔 노래를 가만히 들으며 길을 걷다가, 어느새 우리는 입으로 흥얼거리며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낯선 땅, 낯선 길을 걸으면서 우리는 한국 노래들을 신나게 불러댔고, 지나가는 외국인들은 신기하다는 듯이 우리를 쳐다보면서 지나가곤 했다. 어떤 사람은 노래 잘 한다고 칭찬해주면서 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젊어서 좋겠다며 농담을 던지고 가기도 했다. 또 너무 긴 등산로에 지쳐버린 외국인이 있으면 우린 힘내라고,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응원을 해주기도 했다. 꼭 마추픽추라는 이 신비한 도시가 나의 마을이 된 것처럼, 나는 외국인이 아닌 나의 이웃 또는 여행객들을 마주하는 기분으로 산을 올랐다. 우리는 모두 태양의 문을 향해 걷고 있다.

 

 

얼마나 더 걸었을까, 희뿌연 안개 사이로 태양의 문이 드디어 보였다. 기대했던 문의 모양새보다는 무슨 제단 같이, 각 지게 잘 자른 돌들을 무더기로 세워놓은 공간이었다. 아마 이 문 또는 요새는 마추픽추를 지키는 가장 전방이었을 것이다. 누가 혹시라도 이 신비스런 공간에 침입해 오지 않을까, 긴장하며 이 문 앞에 병사들이 서 있었을지도 모른다. 안개가 조금 걷히자 사람들이 한 명씩 돌 위로 주저앉기 시작했다. 주저앉아 각자 음식을 먹거나 노래를 들었다. 가만히 산 너머를 바라보기도 했다. 나와 형도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용오름이 오르는 건너편 산봉우리를 구경했다. 구름은 힘차게 봉우리를 걷어차고 계곡 사이로 흘러내렸다. 누군가 저 높은 산꼭대기에서 구름을 마구 붓고 있는 것처럼. 내가 앉아있는 자리를 덮칠 것만 같이 넘실거리는 구름은 흐르고 흘러 저 멀리 마추픽추의 도시를 덮쳤다. 우리도 앉은 자리에서 노래를 다시 틀었다. 몇 곡 따라 부르고 나서, 그리고 다시 한참 산 밑을 내려다보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빗방울이 약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넘실거리는 구름은 무거운 비를 이고 있어선지 우리가 걷는 속도보다 느렸다. 우리는 서둘러 다시 도시 쪽을 향했다.

 

16.

내려가는 길에서 제일 많이 마주친 것은 등산로가 끝나지 않아 괴로워하는 사람들이었다. 코너 쪽 돌담에 위태롭게 기대어 그들은 등산로가 얼마나 남았냐고 물어보곤 했다. 그럼 우리는 살짝 거짓말을 섞어 금방 도착할 수 있다고 희망을 불어넣어주곤 했다. 그들은 고맙다고 인사했고 우리는 괜찮다고, de nada, 겸연쩍게 인사했다. 아무래도 태양의 문 쪽에는 비가 내릴 텐데. 걱정스러웠지만 실제로 걱정도 해주었지만, 그들의 길은 그들의 길이다. 오를 것인지 포기할 것인지. 신기하게도 정말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이 닥쳐오더라도 무언가를 드디어 손아귀에 넣을 때, 예를 들면 태양의 문을 보고 그곳에서 쉴 수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이든 이룰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을 얻는다. 나는 태양의 문을 오르는 사람들이 다들 그러한 이유를 지니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힘내서 더 걸으라고 응원을 많이 해줄 수밖에 없었다. Bienvenidos! 환영합니다. 이제 막 등산로를 오르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넸다. 그들은 모자를 벗으며 gracias,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제 갈 길을 묵묵히 갔다. 늙든 젊든, 부유하든 가난하든, 살이 적든 살이 많든. 모두가 말없이 걸었다.

 

 

도시에 다시 도착했을 때는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도시의 구석구석을 살피며 돌아다녔다. 건물 사이사이에는 여러 마리의 라마들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사람들을 신기해하지도, 무서워하지도 않았다. 그저 제자리를 지키고 싶을 뿐인 것처럼 앉아 있는 게 전부였다. 석상처럼 움직이지 않는 라마들을 보며 속으로 저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했다. 이 황폐한 돌무덤과 무너진 건물들을 보며 라마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혹시 이 곳에 사람이 살던 때를 기억하고 있을까. 빗줄기가 거세지기 시작했다. 나는 준비해온 우비를 뒤집어쓰고, 형은 급한 대로 내 비상용 우산을 썼다. 그러고 돌아다니다가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비가 내리 쏟기 시작했다. 우리는 오두막을 찾아서 들어갔고 그곳은 이미 사람들로 꽉 차있었다. 우리는 아까 날이 맑을 때 도시의 전경을 전부 보아서 비가 오더라도 상관이 없었지만, 방금 도착한 사람들은 절망하는 눈빛이었다.

 

 

오두막에 앉을 자리가 났다. 형과 나는 나란히 자리에 앉았다. 이어폰을 꽂고 아까 태양의 문에서 듣다 만 음악을 다시 들었다. 듣다가 나는 나도 모르게 잠에 들었다. 빗소리와 섞이는 음악을 들으며. 형의 어깨에 살짝 기댄 상태로 피곤했는지 깊은 잠에 들었다. 비와 함께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일수도 있는 마추픽추가 가는구나. 형과 나 둘이서 다시 이곳을 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노래가 너무 태연히 흐른다. 비는 슬프다고 내리는데 음악은 너무나도 초연하다. 그래서 빗소리와 섞인 음악은 듣기가 괴롭다. 슬픈 건지 초연한 건지 모르겠다. 즐거운 건지 아쉬운 건지 모르겠다. 시간은 벌써 구름이 흘러가듯 지나갔고, 우리는 꿈에 그리던 마추픽추에 왔다. 근데 이 공허한 마음은 무얼까. 우리는 다시 마을로 내려갈 준비를 했다. <대학생>

 

 

키워드
#N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