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한국영화사 훑어보기-3회: <하녀>

영화소개 : <하녀>, 1960년 작, 김기영 감독, 출연 김진규, 이은심, 주증녀 등

“The success of the film The Housemaid(Hanyo, Kim Ki-yong, 1960) can be contextualized in this vein. The reception of the film by female audiences at the time was registered in their reactions to the scene in which the maid seduces her married male employer. It has been reported that female audiences responded to this scene by yelling, "Kill the bitch!"” - 『The Maid, Madame Freedom, and Women』 중에서, Soyoung Kim

▲ 영화 <하녀> 포스터

이 영화는 말 그대로 충격과 공포로 관객들을 몰아넣었다. 관객들의 공포는 처음엔 아주 일차적인 것이었다. “Kill the bitch!" 라는 표현에서와 같이 하녀를 바라보는 관객들의 표정은 분노와 공포로 일그러져 있었을 것이다. 어떻게 저런 인물이 있을 수 있지, 반드시 없애버려야 할 악의 근원 정도로 여겼을 것이다. 영화가 상영되었을 당시, 여성 관객들은 더 충격을 받았다. 여성에 대한 모독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조숙하고 얌전한 여성상이 무너지고 당시 사람들에게는 악행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짓들을 하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른다. 그리고 그녀와 완전히 반대되는 동식의 본처를 보라. 아주 모범적인 여성상의 사례라고 볼 수 있는 그녀를 하녀는 지옥의 끝까지 몰아내는 모양새다. 그래서 사람들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하녀를 악인으로 규정하고 동식의 ‘집’이라는 공간에서 쫓아내야 할 인물로 받아들인다. 얼마나 그런 경향이 심했는지 다음 인용을 다시 살펴보자.

“The housemaid, who dreams of being upwardly mobile, is presented as a monster within the middle-class family. She is a hybrid monster born out of the repression of feminine sexuality and the lack of opportunities for class mobility. Her uncontainable and dispersed identity is designed to disturb her employer's family and the audience as well. The incoherent development of the character in The Housemaid, an often-noted negative attribute of South Korean film, is productively mobilized to a greater extent in order to create a sense of fear and unpredictability.” - 『The Maid, Madame Freedom, and Women』 중에서, Soyoung Kim

실상은 하녀를 괴물로 설정해놓은 것도 사실이고, 괴물로 받아들이는 관객들의 반응 역시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괴물이 할 수 있는 역할이다. 그 역할에서 우리는 하녀라는 캐릭터를 다시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일차적인 공포의 대상, 공포와 충격의 주체로 하녀를 받아들이면 안 되는 것이다. 왜 굳이 hybrid monster 라는 표현을 써서 하녀라는 캐릭터를 표현했을까. 단순한 악인으로서 괴물이 아니라, 다양한 역할이 얽혀있는 괴물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혼합된 괴물이라고 부를 수 있다. 내적인 다양한 모습과 사회적인, 또는 여성이라는 젠더담론 안에서의 캐릭터가 진득하게 혼합된 상태가 바로 영화 속 하녀의 모습이다.

하녀는 공포를 제공하는 주체로서의 역할 말고도, 여성상을 완전히 해체시키는 역할도 하고, middle-class family에게(다른 논문에서는 부르주아로 규정하는데, 그 부분을 설명하는 인용문도 살펴볼 것이다.) 위협을 제공하는 lower-class로도 역할 한다. 이렇게 영화의 심층적 내용을 살펴보게 되면 하녀가 부라리는 눈과 폭행, 범죄들로 이루어진 일차적 공포는 사실상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회와 여성, 계급이라는 더 큰 본질에 위협을 가하고 있고 그렇기에 하녀가 제공하는 공포는 사실 관념 혹인 이념의 붕괴와 해체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다음 인용을 다시 살펴보자.

“인텔리겐치아이자 부르주아인 동식의 주변에는 세 명의 여인들이 배회한다. 이 세 명의 여인들은 모두 시골에서 올라온 여공들이다. 이들은 각자 자신들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상경한 욕망의 화신이다. 그 중 한 명은 자살로 인해 그 욕망이 실패해 버리고, 두 명의 여인이 끈질기게 동식의 주변에 서성거린다. 이 두 명의 여인 중에서 문제적인 사람은 바로 하녀(이은심 분)이다. 그녀는 담배를 피울 줄 알고, 유부남을 유혹할 줄 아는 여자이다. 하녀는 관객에게 있어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공포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졌다.” - 『한국영화와 가족 담론 : 1960년대와 2000년대를 중심으로』, 박명진

중요한 것은 동식이 소유하는 모든 것들이다. 그는 인텔리겐치아이자 부르주아로 살고 있고 세 명의 여인들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앞서 읽은 논문에서는 middle-class라고 했지만 여공이라는 사회적 신분에 비해 동식은 넓은 집과 예술가라는 세련된 직업을 가지고 있다. 이 뒤편에는 물론 성실히 재봉질을 해 돈을 버는 아내라는 훌륭하고 도덕적인 여성상이 자리하고 있다. 결국 동식이 부르주아 생활을 하기까지는 아내의 끝없는 희생이 뒷받침했던 것이다. 그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것이 하녀다. 하녀는 세 명의 여인 중에서 가장 독기 어린 방식으로 동식을 취하고자 하는데 여기서 관객들은 하녀를 악인으로 설정한다. 하녀가 동식을 유혹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순진하고 바른 성격의 동식이 하녀에 의해 망가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천편일률적인 사고는 버려야 한다. 동정하지 않으면 공포의 시각으로 캐릭터를 바라보는 관객의 입장은 이 영화를 깊게 들여다보지 않는 것이다. 이 영화를 깊게 들여다보려면 오히려 하녀의 행동 가짐을 영웅적으로 바꿔서 보아야 한다. 하녀는 성공한 프롤레타리아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가장 성공한 주체임에 틀림없다.

 

▲ 영화 <하녀> 스틸컷

 

그녀는 하녀라는 처참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명령을 내리는 위치에 선다. 이것은 하녀야말로 주체성을 갖추고 있다는 틀림없는 증거다. 또한 욕망에 따라 움직이며, 동식의 아내처럼 참거나 견디려하지 않는다. ‘갖지 못하면 부숴버린다’, 이게 곧 하녀라는 캐릭터가 가지는 의식이고 주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부르주아를 사랑한 프롤레타리아이지만, 그 어느 영화에서나 가져다 쓰는 구조처럼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의 사랑에 목매지 않는다. 오히려 쟁취하려는 모양새다. 부르주아의 동정을 바라지도 않는다. 차라리 그럴 거라면 다 같이 죽는 편이 낫다. 하녀는 이처럼 독기가 넘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독기라는 방식으로 철저히 무장한 해체주의적 여성, 새로운 시대의 여성이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간극을 부수고, 동식의 집 1층과 2층의 경계를 허문다. 하녀의 노동 공간인 부엌은 동식의 아내에게 주어지고, 동식의 아내는 부르주아임에도 불구하고 프롤레타리아의 삶을 영위해야 한다. 삼각형은 역삼각형이 되었고 하녀는 혁명을 일으켰다. 하녀가 진심으로 동식을 사랑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녀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조금의 감정이 있었든 없었든 중요한 것은 동식을, 그리고 동식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아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소멸시켰다. 해체하고 분열시켰다. 하녀의 혁명적 기질은 그런 사회성과 탈여성성에 있는 것이며 그것은 또 다른 공포로 관객들에게 다가온다. 솔직히 말하자면, 일차적이고 단순한 공포심보다도 하녀가 주는 사회적, 탈여성적, 탈계급적 공포는 더 규모가 크고 우리를 압도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하녀가 야기한 저런 극단적 분열을 비난할 만큼 새로워졌고 혁신되었는지 의문이다. 마지막으로 아래와 같은 논문에서 인용을 짧게 하고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부르주아를 꿈꾸는 소시민의 욕망이 불온한 타자들에 의해 훼손당할지도 모른다는 뿌리 깊은 불안감에 대한 감독의 표명일 수도 있다. 그런 만큼 이 영화는 분열적이다. 이 집은, 여공과 하녀와 같은 타자들의 개입에 의해, 언제라도 부서질 수 있는, 너무 허약하고 가벼운 가건물에 불과하다.” - 『한국영화와 가족 담론 : 1960년대와 2000년대를 중심으로』, 박명진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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