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괴와 납치 통해 동원된 위안부, 일본정부와 군이 공모해 저지른 만행”
“유괴와 납치 통해 동원된 위안부, 일본정부와 군이 공모해 저지른 만행”
  • 한성욱 선임기자
  • 승인 2018.05.03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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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인터뷰> '일본군 위안부 증거 자료집 발간'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2회

<1회에서 이어집니다.> 

▲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

- 일본과 조선에서의 동원실태는.

▲ 상하이 주둔군에 위안부 3000명을 송출하기 위해 모집업자들이 여기저기 난무했다. 업자들은 때로는 유괴와 납치 건으로 경찰에 검거되기도 했다. 일본 내무성은 인신매매금지 국제조약에 가입한 상태였지만, 현지 군인을 고려해 슬그머니 눈을 감아줬다. 그러면서 여성동원을 위해 영사관과 헌병대, 무관실 등에 역할을 분담시켰다. 동원된 여성들을 중국으로 송출할 때는 군이 군함을 보냈고, 도착 즉시 헌병대가 인도받아 위안소로 보냈다. 일왕 직속부대로 기세등등했던 상하이 일본군의 결정을 따를 수밖에 없었던 일본 내무성은 국내외 언론의 시선을 피해 업자들을 위해 정책적 지원을 했다. 군 허가만 있으면 경찰이 무조건 업자들을 봐줬고 불법행위들이 지속됐다. 돈 벌기 위해 지원한 여성들은 부모나 호주의 허가가 필요했지만, 부모가 없으면 사실기재만으로도 허용됐다. 사실상 문서위조와 사기가 횡행했다.

 

- 강제 동원된 조선여성은 어디로 끌려갔나.

▲ 당시에 일본군 독립혼성 제4여단에 배속됐던 ‘곤도 하지메’(近臟一) 병사가 시사주간지 ‘DAYS JAPAN’과 2007년 6월에 인터뷰한 ‘특집 : 위안부 100인의 증언’에 따르면, 강제동원된 조선여성들은 중국 산시성(山西省) 타이유안(太原)으로 끌려갔다. 이곳 대대본부에 위안소가 운영되고 있었다. 일본에서 끌려온 여성은 장교를 상대했다. 하급병사들은 일본여성과 접촉이 금지됐고, 조선인과 중국여성이 있는 위안소는 병사용으로 분류됐다. 한번은 곤도 병사가 조선여성들이 있는 위안소에 갔다가 한 조선여성의 말을 듣게 됐다. 그녀는 시골출신으로 집안이 가난해서 돈벌이를 찾고 있었는데, 마침 일본의 한 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말에 속아서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엄연한 취업사기다. 위안부 만들 목적으로 해외로 이송한 약취행위였다. 그 여성은 중국으로 끌려온 뒤 모든 것을 포기했다고 말했지만, 이것을 ‘수용했다’로 해석하면 안 된다. 자유를 구속하고 도망갈 수 없는 상황을 만든 것은 형법 제226조에 위배되는 약취 범죄행위다.

 

- 당시 일본 정부도 불법모집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 아닌가.

▲ 일본 형법은 사람을 폭행 또는 협박 등으로 연행하거나, 약취 또는 감언에 의한 유괴행위 등과 관련 법률 224조부터 227조에 명시하고 있다. 또한 일시 가불금을 주어 자유를 구속해 사람을 해외로 연행하는 것을 ‘제국(일본) 외 이송목적 인신매매죄’로 다뤘다. 당시에는 일본법이 조선에도 같이 적용됐는데, 1912년에 내려진 ‘조선형사령’(朝鮮刑事令)이 그것이다. 일본 내무성도 여성을 해외로 이송할 때 형법상 만21세 이상 여성과 매춘여성, 부모승인을 받은 여성만 가능하게 했다. 내무성은 조선에서 약취와 유괴에 의해 위안부 모집이 이뤄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부모나 호주가 없는 여성도 서류위조를 통해 동원할 수 있도록 묵인했다. 내무성을 비롯 일본군과 헌병, 외무성, 경찰, 육군성 등이 공조해 일본여성과 조선여성, 대만여성들을 위안부로 끌고 갔다. 이런 역사적 사실들이 있었기에 2015년 박근혜 정부가 아베정권과 맺은 ‘한·일 위안부 합의’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 ‘위안부’라는 말은 어떻게 만들어지게 됐나.

▲ 대본영 소속이던 일본 군부는 전시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영향력이 막강했다. 정부도 군부를 통제하지 못했다. 군부 마음대로였다. 1931년 11월 해군당국은 중국 홍커우(虹口) 일대에서 일본인이 경영하던 성적유흥시설 전체를 통째로 해군특별위안소로 지정하기도 했다. 이듬해 상하이사변 이후에도 위안소가 증설됐다. 중국침공이 한창이던 1938년 1월, 일본 관동지방 북쪽 군마현에서 모집업자들의 일본여성 위안부 모집이 있었다. 업자들은 중국 상하이 현지 일본군특무기관의 의뢰라고 했다. 그런데 모집방법에서 뭔가 수상한 점을 발견한 군마현 경찰이 이들을 체포해 심문했다. 경찰은 위세가 막강한 군부의 실정을 몰랐다. 군이 여성모집을 업자에게 의뢰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특히 상하이 주둔 일본군부의 위세는 강했다. 일본정부의 지시를 어길 정도였다. 그럴 정도로 상하이는 일본군 위안소의 ‘발원지’였다. ‘위안부’라는 말이 처음 생긴 곳도 상하이다. 위안부라는 단어를 만든 사람은 당시 일본군 상하이 파견군 참모장 ‘오카무라 야스지’(岡村寧次)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나중에 일본군 전체를 통괄하며 중국 지나 파견군 총사령관에까지 승승장구했다. 그가 ‘일단’(一團)이라는 용어를 붙여서 ‘위안부 단(團)’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다.

 

- 유네스코 ‘위안부 세계기록유산’ 신청이 무산됐다. 일본의 음해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 어떤 면에서 일본의 방해는 맞지만, 엄밀히 보면 사정은 다르다. 일본정부가 유네스코에 재정지원을 끊겠다는 것을 방해로 잘못 말한 부분도 있다. 미국도 유네스코에 부담금을 내지 않고 탈퇴했지만, 유네스코가 일본이 돈을 내지 않겠다고 해서 와해될 만큼 신념이 없는 단체가 아니다. 세계기록유산신청이 불발된 것은 일본의 맞불작전 때문이다. 일본의 시민단체가 중국 등 8개국이 유네스코에 ‘위안부 세계기록유산’을 심사 요청한 것과 ‘위안부는 성노예’라는 주장에 대해 ‘위안부는 합법적 제도’였다는 반박자료를 보냈는데 이것이 서로 충돌했다. 난감해진 유네스코도 이 문제에 대한 명확한 근거자료와 판단력이 없었기 때문에 대화로 풀 것을 종용했고 중재에 나섰던 것이다. 이에 대한 한국의 대응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확실한 반박자료도 없다. 아무런 역사적, 논리적 준비절차 없이 일본과 야합해 맺은 ‘위안부 합의’에 대한 어떤 대응책도 찾기 어렵다.

 

- 독도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독도운동을 하게 된 계기는.

▲ 1988년 한국에 왔을 당시, 독도문제가 핫이슈였다. 일본에서는 그다지 관심이 많지 않았다. 일부에서 논쟁만 있었고 일반 국민들은 모르고 있었다. 그런 때에 한국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는데, 어떤 학생이 ‘독도가 어느 나라 영토인가’라고 물었다. 그런데 대답을 하지 못했다. 부끄럽게도 역사를 깊이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생에게 약속을 했다. 역사공부를 많이 해서 대답하겠다고 했고, 그때부터 정치학과 역사공부에 매진했다. 몇 년간 공부한 결과, 일본이 역사를 완전히 숨기고 왜곡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독도가 역사적으로도 한국영토라는 많은 증거들이 나왔고, 이런 진실들을 국민에게 널리 알리게 되면서 지금까지 오게 됐다.

 

- 일본에서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하는데 그 경위는.

▲ 일본인들은 독도를 죽도(竹島) 즉 ‘다케시마’라고 부른다. 옛날부터 일본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던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교류가 별로 없었던 오랜 옛날 일본사람들은 울릉도를 죽도라고 불렀다. 1904년까지만 해도 일본은 독도를 엄연한 한국영토로 알고 있었다. 독도에 대한 정확한 명칭이 없었음도 인정했다. 1905년 이전까지 일본사람들은 독도에 가보지 못했고 독도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다. 섬에 대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착각한 것이다. 대나무도 없는 섬을 죽도로 잘못 알고 있었다. 그런데 1905년에 일본이 독도를 일본영토로 편입시키면서 문제가 됐다.

 

- 독도에 몇 번 가보았고 느낌이 어땠나.

▲ 지금까지 7번 갔다. 독도는 매우 아름다운 섬이다. 한때 EBS 교육방송 일로 1박2일 일정으로 독도에 갔는데, 다음날 비가 내려 배가 못 뜨게 되면서 4박5일 동안 머물렀다. 대부분 관광객들은 독도에 30분 정도 머물다 가지만, 그에 비하면 나는 행운아다. 독도 구석구석을 볼 수 있는 기회였다. 비에 젖은 독도의 모습은 매우 아름다웠다. 그리고 생각보다 컸다. 멀리서 보면 작아 보이는데, 들어가서 보면 의외로 섬 높이도 상당하다. 울릉도는 20번 정도 갔다. 독도는 기상 변화가 많아 가기가 어려운데 갈 때마다 독도에 들어갈수 있었다. 희한하게도 행운이 많았다. 하늘이 나에게 독도운동을 잘하도록 기회를 열어준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3회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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