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할매들, 다 여기 계셨구먼”
“우리 동네 할매들, 다 여기 계셨구먼”
  • 남인희·남신희 기자
  • 승인 2018.05.25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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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닷컴> 장흥 갯길 따라-한재
▲ 보기만 해도 간질간질. 두터온 솜옷을 입고 겨울을 이겨낸 끝에 피어나는 할미꽃.

‘눈부신 꽃사태’는 아니다.

가만히, 오래, 자세히 보아야 보인다. 거기 엎드린 할미꽃! 한번 눈에 띄고 나면, 어느덧 걸음걸음 다 꽃이다.

회진면 한재공원. 봄이면 그곳에 할미꽃 피고진다더라, 는 아름다운 소문이 난 지 오래다.

<키작은, 햇볕을 탐하지 않아 아주 작은 그녀는 발목 밑을 떠도는 바람의 한숨을 듣지//…태어나자마자 늙어버리길 소망한 그녀,…그녀가 어느날 당신에게 말을 걸어 올 것이네. “잘 봐, 이게 다야!”>(김선우 ‘할미꽃’)

땅바닥 가차이 고개 수그려 피는 그 얼굴 마주하려면 한없이 몸을 구부리고 낮춰야 한다.

이곳 할미꽃들에서 ‘우리 동네 노인들’을 본 이는 작가 이청준.

“우리 동네 그 노인들이 모두 어디로 가셨나 했더니 모두 여기 와 모여 계셨구먼. 우리 한골목 이웃이던 섭섭이 할머니도 고깔나무집 숙모님도, 갯나들 방죽가 정문이 할머님도, 우리딸 은지 할머니랑 모두 함께.”

 

 

꽃이 아니라 할매들을 뵈옵는다. 이땅에 피고진 삶의 이야기를 듣는다.

슬픈 할미꽃이야기속 할매가 넘던 고개도 이런 고개였을까. 한재는 저 너머 신덕리, 대리, 신상리 사람들이 회진과 대덕을 오갈 때 꼭 거쳐야 하는 고개였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과 싸우기 위해 넘던 고개였고 갑오년엔 동학농민군들이 새 세상 꿈꾸며 넘던 고개였다. 일제강점기에는 공출나락 가마니를 이고지고 넘던 고개였고 3·1운동 때는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기 위해 이 고개를 넘었다. 6·25전쟁 때는 인민군과 경찰이 번갈아 서로 상대쪽에 가담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묶어끌고 이 고개를 넘어다녔다 한다.

그러니 이 고개에 흩뿌려진 눈물과 한숨과 의분이 그 얼마나 많았을 것인가.

정겹고 그리운 이야기들도 있다. 고개 너머 장산·덕산·대리·신덕·신상리에 살던 아이들과 청년들에게 이 고개벌판은 무엇보다 소 뜯기고 꼴 베고 땔나무 하러 와서 씨름하고 자치기 하며 놀던 곳으로 떠오르는 곳.

 

▲ 한재 고개에 서리서리 쌓인 수많은 이야기마냥 이 봄날에 할미꽃 지천으로 피고진다.

 

고개 너머 신덕리가 고향인 작가 한승원의 단편 <앞산도 첩첩하고>에서 주인공 달병이가 넘던 고개도 이곳이다.

“앞산도 첩첩하고/ 뒷산도 첩첩한디….”

명창 임방울이 자기가 사랑하던 기생이 죽었을 때 지어 불렀다는 단가를 부르며 달병은 한재를 넘는다. 오래 전 딸 하나 낳고 불도 지피지 않은 헛간방에서 숨을 거둔 아내 ‘장례’, 밤 봇짐 싸가지고 나간 열아홉 살 딸을 가슴에 품고 넘는 고갯길. ‘카랑카랑한 촉기가 늪 속에 질꺽거리는 물기처럼 배어 있는 목청’에 첩첩한 생을 실어낸다.

작가는 스무 해 전 고향 근처인 안양면 율산마을로 들어와 ‘해산토굴’(海山土窟)을 짓고 글 쓰는 일에만 전념하고 있다.

 

▲ 고향 바다 이야기를 줄곧 풀어온 한승원 시비(한재공원.)

 

“가둔다는 것은 그 속에서 나를 양생한다는 것”이란 그의 말에서 집필실을 ‘토굴’이라 명명한 속내가 짚어진다. 소설 《다산》을 쓰며 다산 선생은 기구하고 신산한 자신의 운명을 어떻게 무엇으로 이겨냈을까 궁구한 바 있는 그가 내어민 열쇳말은 ‘사업’이었다.

‘사업(事業)’은 경제적인 활동만을 뜻하지 않는다. 주역에 따르면 ‘우주의 율동 원리에 따라 천하의 인민에게 실행하는 것’이 사업.

그의 이생에서의 ‘사업’은 글쓰기이다.

“동어반복 같은 파도. 그러나 파도는 결코 동어반복이 아니다. 파도의 갈피갈피에는 한 발짝씩 더 높은 삶으로 나아가려는 꿈과 음모가 서려 있다. 우주적인 율동. 달려와서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무수한 삶과 죽음이 교차한다. 그것은 우주 시간의 시계추이다."(산문집 《바닷가 학교》 중)

늘 그의 작품의 시원(始原)이었던 고향 바다에서 날마다 일상으로 ‘우주적 율동’을 목도하고 체험하며 치열한 글쓰기를 통해 ‘화엄의 바다, 우주라는 바다, 내 가슴속에 들어 있는 바다, 어머니와 아내와 이웃 사람들의 가슴에 들어 있는 바다’ 등등 여전히 그 끝이 멀리 있는 바다를 우리 앞에 끌어오고 있다.

글 남인희·남신희 기자 사진 최성욱 다큐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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